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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력까지 동원한 끝에 개헌을 이루어낸 이승만 대통령은, 훗날 영구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까지 불사하게 된다.
▲ 발췌개헌안에 서명하는 이승만 (1952년 7월 7일) 물리력까지 동원한 끝에 개헌을 이루어낸 이승만 대통령은, 훗날 영구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까지 불사하게 된다.
ⓒ 국회기록보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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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과 함께 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 취임한 이시영은 임시정부 요인 출신으로 새나라 건설에 몸을 아끼지 않고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승만의 견제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거듭된 실정으로 국정은 피난지 부산에서 더욱 어지러워지기만 했다.

제헌국회의 뜻을 받아들여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된 이래 만 3년 동안이나 봉직했으나, 6ㆍ25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쟁과 이승만의 권력욕을 지켜보면서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1년 5월 이시영은 〈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하고 부통령직 사임서를 피난국회에 제출했다. 두 사람은 상하이 임시정부 '약헌' 등을 함께 기초했던 독립운동의 동지였다.

이시영은 〈국민에게 고한다〉는 사임서에서 "취임 3년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왔던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부통령의 임무라 할진대, 내가 취임한 지 3년 동안에 얼마마한 익찬(翼贊)의 성과를 거두어왔단 말인가"라고 자탄하면서 사임이유를 밝혔다.
 
골령골 살해현장. "더 올라가면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겠어." 1950년 6.25 당시 골령골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
 골령골 살해현장. "더 올라가면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겠어." 1950년 6.25 당시 골령골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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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통령의 돌연한 사임서 제출로 국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방위군사건으로 국민의 여론이 악화되고 군경의 거창민간인학살사건으로 책임문제가 논란되고 있을 때 터진 이 부통령의 사표제출은 국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사임서 내용 또한 우국충정이 담긴 명문장이었다. 

국회에 보낸 사임서에서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시위(尸位)에 앉아 소찬(素餐)을 먹는 격에 지나지 못했으므로 이 자리를 물러나서 국민 앞에 무위무능함을 사과함이 도리인 줄 생각되어 사표를 내는 것이다. 선량 여러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국정감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이도(吏道)에 어긋난 관료들을 적발ㆍ규탄하되, 모든 부정사건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 국민의 의혹을 석연히 풀어주기 바란다."라고 사임의 이유를 밝히고 의원들에게 당부하였다.

이시영의 사임서가 전달되자 신익희는 그 내용을 본회의에서 공개하고 의원들의 토의 끝에 반려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재석 131명 중 가 115표로 반려가 의결되었다. 이에 따라 신익희는 장택상ㆍ조봉암 두 부의장과 각파 대표를 부통령 숙소로 보내 사임의 뜻을 거두어 줄 것을 요청케했다. 그러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국회의 각파 대표들은 이승만을 방문, 사임을 만류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부통령이 현정부를 만족하게 생각지 않아서 나가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리느냐"고 오히려 그의 사임을 바라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만큼 부통령의 존재를 고깝게 여겼던 것이다. 부통령 사임서는 국회에 제출된 지 3일 후에야 본회의에서 수리되었다.
 
1950. 10. 24. 이시영 부통령이 ‘유엔의 날’ 기념식에서  만세 삼창을 선창하고 있다(왼쪽 프란체스카 이승만 대통령 부인).
 1950. 10. 24. 이시영 부통령이 ‘유엔의 날’ 기념식에서 만세 삼창을 선창하고 있다(왼쪽 프란체스카 이승만 대통령 부인).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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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의 사임서가 수리된 지 3일 후인 5월 17일 국회는 부통령 보궐선거 결과 김성수가 78표를 얻어 74표를 얻은 이갑성을 누르고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피난국회에서 부통령에 취임한 김성수는 잔여임기조차 채우지 못한 채, 1952년 5ㆍ26정치파동이 절정에 오른 5월 29일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승만이 5ㆍ26정치파동을 일으켜 10여 명의 야당국회의원을 체포하고 국회를 탄압하면서 장기집권을 획책하자 사퇴를 결행하고 야당 결성에 나섰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파동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6월의 피난수도 부산은 전란기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장기집권욕은 법과 질서보다 조작된 민의와 폭력에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권력을 연장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가 헌병대로 끌려가는가 하면, 자신을 저격하려는 군인을 정당방위로 사살한 서민호 의원이 석방결의로 석방되었는데도 이에 항의하는 관제데모가 계속되고, 재야원로 60여 명이 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여러 사람이 테러를 당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정정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거행된 6ㆍ25기념식전에서 이승만 저격사건이 발생하여 정계는 한층 더 심상치 않은 먹구름에 가리게 되었다. 이날 유시태(당시 62세)는 민국당 출신 김시현 의원의 양복을 빌려입고 김 의원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유유히 기념행사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여 한참 기념사를 읽는데 2m쯤 떨어진 뒤에서 독일제 모젤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의열단 출신인 유시태는 방아쇠를 잡아당겼으나 탄환이 나가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격발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거듭 방아쇠를 잡아당겼으나 탄환은 여전히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섰던 경호헌병이 권총을 든 유시태의 팔을 탁 치고, 동시에 뒤에서는 치안국장 윤우경이 유시태를 끌어앉혔다. 
 
독립운동가 권애라 김시현 부부
 독립운동가 권애라 김시현 부부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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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암살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유시태는 헌병대로 끌려갔다가 곧 육군특무대로 이송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유시태에 이어 연루자로서 그에게 권총과 양복을 제공한 혐의로 김시현 의원이 체포되고, 뒤이어 민국당의 백남훈ㆍ서상일ㆍ정용한ㆍ노기용 의원과 인천형무소장 최양옥, 서울고법원장 김익진, 안동약국 주인 김성규 등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신익희 등 민국당의 고위층으로까지 수사를 확대할 기미를 보였으나 뚜렷한 혐의사실이 드러나지 않자 더 이상 확대하지는 않았다. 국가원수 살인미수혐의로 구속기소되어 선고공판에서 유시태ㆍ김시현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김성규ㆍ서상일ㆍ백남훈 의원에게는 징역7년, 6년, 3년의 유죄가 선고되었다.

한국정당사상 민주정통세력의 뿌리가 되는 민주당이 창당되는 토양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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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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