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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쓰러진 이승에서 백범 선생 최후의 모습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쓰러진 이승에서 백범 선생 최후의 모습
ⓒ 백범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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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초기에 국회의장의 역할은 할 일이 많았다.

폭주하는 이승만 행정부를 견제하고 아직 운영과 질서가 잡히지 않은 입법부를 바로 세워야 했다.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해체와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 반민법 제정에 앞장섰던 노일환의원 등 현역의원 13명이 두 차례에 걸쳐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런 와중에 백범 김구가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승만의 수하에는 일제에 충성을 다하다가 일제 패망으로 한때 숨죽이고 있다가 그가 집권하면서 다시 요직을 차지한 충성파들이 우글거렸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승만의 충복이면서 김구에는 적의를 품고 있었다. 그 충복들의 수뇌가 거개 8ㆍ8구락부의 멤버들인데, 이들은 조선총독부 시절과 미군정 시기에 거느렸던 막강한 인맥ㆍ조직ㆍ정보ㆍ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1949년 8월 3일, 백범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 당시 범인 안두희의 모습 (1949년 8월 4일자 『동아일보 』보도사진)
 1949년 8월 3일, 백범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 당시 범인 안두희의 모습 (1949년 8월 4일자 『동아일보 』보도사진)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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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조직 88구락부는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포병사령관 장은산, 특무대장 김창룡, 서울시경국장 김태선, 정치브러커 김지웅이 핵심이고 여기에 헌병사령관 전봉덕, 친일경찰 노덕술ㆍ최운하 그리고 서북청년단과 그 출신으로서 하수인에 낙점된 안두희였다. 안두희는 주한미군 CIC정보원으로 활동하다 정식요원이 된 인물이다. 

이승만의 주위에는 주로 이런 인물들이 포진하고, 이들은 주군(主君)의 심기와 심중을 귀신같이 꿰면서 먹잇감을 찾았다. 당시 이승만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 것은 반민특위였다. 헌법 규정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되고 특위가 구성되어, 정부와 군경에 똬리를 튼 자신의 수족들이 하나씩 체포되자 이승만은 정치적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회한 책략가였다. 또 국민의 시선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경찰, 헌병대 등 공안팀을 동원하여 먼저 국회의 진보적민족주의 인물들을 쳐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다. 1949년 5월부터 현역의원 13명을 "북한 공산집단의 프락치로서 국회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국회의원들이 불안ㆍ공포에 떨고 있을 때 6월 6일에는 경찰을 동원하여 활동 중인 반민특위를 짓밟고 요원들을 체포한 것이다. 그리고 6월 26일에 백범이 암살되었다. 암살사건 후 제2차 국회의원 구속사건이 벌어졌다. 정권수뇌부는 1차국회프락치사건→반민특위해체→김구암살→2차국회프락치사건으로 이어지는 정교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극히 잘 짜인 각본이었다.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서 축사 중인 김구 주석(1948.4.22.)
▲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서 축사 중인 김구 주석(1948.4.22.)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서 축사 중인 김구 주석(1948.4.22.)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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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는 환국 후 백범과는 비록 노선ㆍ정견의 차이로 갈라서기는 했지만 망명기 간난신고를 함께하면서 그의 애국정신을 깊이 흠모하였다. 비보에 접하여 국회의장으로서 추도사를 발표하였다.

백범(白凡) 선생의 흉변을 비로소 듣고 무어라 형용못할 경악과 비통과 애도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백범 선생은 청년 시대부터 우리 국가 독립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오던 터이며, 조국광복운동의 선두였던 터이다. 나와의 관계도 30여 년을 하루같이 독립운동에 종사해 내려 왔을 뿐더러, 더욱이 상해임시정부시대부터 때론 동사(同事)의 형편으로 때로는 동료의 형편으로 동지 중에는 남과 다른 허여(許與)와 신뢰로써 지내내려 오던 나로서는 무어라 얘기할 수 없으나, 임정이 환국한 이래로도 견해와 주장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우리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노년의 선생이 노방익왕(老芳益旺) 격으로 노력해 온 것은 동포들이 다 아는 사실이라 믿는다. 국내 국제적으로 급업한 부면에 처한 우리로서 독립운동에 노전사(老戰士)요, 우리 건국 대업에 지도자의 한 사람인 백범 선생을 상실하게 된 것은 국가민족의 대손실이고 대불행사이다. (주석 1)


주석
1>유치송, 앞의 책, 54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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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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