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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19일 제2대 국회가 개원했다. 제2대 국회는 5월 30일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21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국회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장택상, 조봉암, 김동성이 선출되었다. 사진은 개원 6일 만에 6.25 전쟁을 맞은 제2대 국회의 피난시절 모습이다.
 1950년 6월 19일 제2대 국회가 개원했다. 제2대 국회는 5월 30일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21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국회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장택상, 조봉암, 김동성이 선출되었다. 사진은 개원 6일 만에 6.25 전쟁을 맞은 제2대 국회의 피난시절 모습이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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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31일 역사적인 제헌국회가 개원되었다. 최고령자로서 이승만이 임시의장에 선출되고 부의장에는 신익희와 한민당의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개회식에서 이승만은 "이 회의를 대표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이 다시 탄생되고 이 국회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공포한다."고 언명하고 수립되는 정부는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며 연호도 그때부터 기산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주석 11) 그는 여전히 자신을 탄핵한 임시정부보다 한성임시정부를 법통으로 내세웠다. 

6월 1일 열린 국회에서 신익희는 법규기초위원 선출을 위한 10인 전형위원으로 선임되어 헌법 및 정부조직법 등 정부수립의 입법에 착수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약헌을 제정할 때로부터 30여 년 만에 정식정부의 헌법과 각종 법규를 제정하는 기초위원을 선정하면서 심경이 남달랐다. 전형위원들은 헌법 및 정부 조직법의 기초위원 30명을 선출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신익희의 행정연구반에서 만든 초안과 유진오의 초안을 토대로 전문위원들의 심의를 거쳐 성안되었다. 국호문제로 격론을 벌여 표결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하였다.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1948. 7. 20.)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1948. 7. 20.)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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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국회의원들 대부분은 민주적 정치제도는 마땅히 내각책임제여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헌법기초위원회가 전문위원으로 위촉한 유진오와 행정연구반에서 공동기초한 유진오안을 원안으로 하고 과도정부 법전편찬위원회가 수정한 권승렬안을 참고안으로 하여 내각책임제를 권력구조로 하는 헌법 초안이 마련되었다. 원내 주류파인 한민당의 속셈은 대통령에 이승만ㆍ국무총리에 김성수를 염두에 두고 내각책임제 헌법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권력야망은 내각책임제의 국가수반에 만족하려하지 않았다. 1919년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와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굳이 대통령으로 자칭하면서 활동해온 그에게 내각책임제의 대통령 직위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명실상부한 권력, 실권이 요구되었다.

이승만은 6월 21일 두 번째로 헌법기초위원회에 나타나 격한 어조로 내각책임제를 반대함과 동시에 대통령책임제를 역설한 뒤 "만일 이 기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통과되면 그런 헌법 아래서는 어떠한 직위도 맡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하겠다."고 언명, 장내를 아연케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으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겠다는 언사까지 사양치 않는 이승만의 강경자세에 보다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헌법기초위원회가 아니고 한민당 간부진이었다. (주석 12) 

이승만의 독선은 끝내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도록 만들었다. 헌법기초위원들의 합의에서가 아니라 위협과 강요에 의한 변개였다. 이 같은 곡절 끝에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제정되었다. 7월 26일 국회는 신익희 부의장의 사회로 무기명투표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다.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표였다. 무효표의 서재필은 외국국적으로 무효처리되고 초대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부통령선거에는 이시영 133표, 김구 6표, 이구수 1표, 무효 1표로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에 위치한 동상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에 위치한 동상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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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는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자 그를 찾아가 당선을 축하하면서 그동안 지켜보고 느꼈던 바를 간곡히 진언하였다. 

우남장(雩南丈)! 우리가 40여 년 동안 영토도 국민도 없이 해외로 돌아 다니며 독립운동이라고 하다가 이제 정부와 영토와 국민이 있는 버젓한 주권 국가의 공복(公僕)이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우남장은 과거 몇 사람 되지 않는 사회에서 백 가지로 친재(親裁)통찰하셨으나, 이젠 3천만이나 되는 국민이 있으니, 여러 능력있는 사람과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대사의 기틀만 다지시고 일부 유능한 장관들만 총괄하시어 소사(小事)와 세사(細事)는 아랫사람에게 일임하셔야 합니다. 연만하신 처지로 사람의 능력은 유안한데, 전에 상해나 미주(美洲)에 계실 때처럼 혼자 하셔서는 안 됩니다.

잠자코 해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이승만 박사의 안면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아니 됩니다. 해공! 이 다사다난한 때 대통령이 된 내가 모든 일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지금 참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 적습니다. 해공의 말같이 하면 국가의 앞날이 어찌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우남의 말을 듣고 국회의장실을 나오며 해공은 우울한 빛을 감출 수 없었다. 국회 또한 정상적 운영이 어려울 것으로 예감되었다. 

(앞날이 염려되는구나. 개인의 독선이 판을 치게 되면, 민주주의는 끝나게 될 텐데. 부디 저 양반의 독선이 살아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구나!) (주석 13)


주석
11> 《서울신문》, 1948년 5월 31일.
12> 《서울신문》, 1948년 6월 22일.
13> 유치송, 앞의 책, 495~49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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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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