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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조선의용대는 본부를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1주년을 기념하였다.(1939.10.10.)
 1939년 조선의용대는 본부를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1주년을 기념하였다.(1939.10.10.)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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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에 중대한 시련이 닥쳤다.

의용대원 일부가 화북(華北) 지역으로 진출한 것이다. 일제와 본격적인 전투를 위해 필요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조선의용대가 후방에서 대적선전활동이나 하고 있기에는 정세가 너무 급속히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당정부는 여전히 내부의 적을 먼저 소탕해야 한다는 이유로 공산당세력 타도에 전력을 쏟고 대일 항전에는 소극적인 노선을 취하였다. 반면에 화북지역의 팔로군은 치열하게 일제와 싸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용대의 젊은 대원들은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일제와 싸우기를 바랐다. 당시 만주지역에는 조선인 120여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화북지방에는 20만 명 내외에 이르렀다. 중일전쟁 이후 이 지역의 한국교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조선의용대원들은 여기에 착안하여 만주ㆍ화북에 근거지를 구축하여 동북지방의 조선무장부대와 연합하여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계 전개되었다. 

1940년 11월 4일 충칭의 조선의용대 본대에서 열린 제1차 확대간부회의에서는 지난 2년여 동안의 활동에 대해 평가하고, 자체무장 결여ㆍ자력갱신 정신결핍 등 문제를 지적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적 후방으로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적후방'은 화북지역과 만주지역으로 압축되었다. 조선의용대 제2지대는 이미 공산당이 장악한 인접지역인 시안(西安)과 뤄양(洛陽) 전구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제1대와 본대만 떠나면 되는 처지였다.

당시 혈기왕성한 젊은 대원들은 적진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하는 것을 바랐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측보다는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 팔로군측의 노선에 더 동조하고 있었다. 조선의용대 대원 중에는 레닌주의정치학교 과정 등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이념에 경도하는 대원도 적지 않았다. 

조선의용대의 화북이동에는 내부적인 역학관계도 크게 작용하였다. 민족혁명당 시절부터 내부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세력이 있었고, 최창익이 그 중심인물이었다. 최창익은 조선의용대 활동 중에도 김원봉과 자주 마찰을 빚는, 일종의 라이벌 관계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최창익은 일본 유학 중인 1923년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1925년 이후 공산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일제의 감시와 검거를 견디지 못한 최창익은 1934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대륙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조선독립동맹 활동을 이어갔다. 해방 이후 북으로 귀환해, 연안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최창익은 한빈과 행보를 함께 한 '평생 동지'였다.
▲ 한빈의 동지, 최창익 최창익은 일본 유학 중인 1923년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1925년 이후 공산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일제의 감시와 검거를 견디지 못한 최창익은 1934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대륙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조선독립동맹 활동을 이어갔다. 해방 이후 북으로 귀환해, 연안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최창익은 한빈과 행보를 함께 한 "평생 동지"였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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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최창익이 옌안으로 떠난 뒤에도 부대에 남아 있는 그의 추종자들과 계속 연계하면서 김원봉의 지도력을 흔들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화북지역에 주둔한 팔로군 측과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부의 역학관계와 함께 중국내의 국민당세력과 공산당세력 관계가 악화되는 등 제반 상황이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가 화북으로 이동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김원봉은 자신의 지도력에 손상을 감내하면서도 주력부대의 화북이동을 막기 어려웠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 겨울에 병력을 뤄양에 집결시켰다가 이듬해 봄과 여름에 황허(黃河)를 건너 팔로군 전방총사령부가 있는 타이행산(太行山)에 도착하였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이들을 인도하여 대원들이 무사히 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오래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용맹성과 한중일어에 능통하고 반일의식이 강한 병사들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이들을 자기들 세력권으로 끌어들이고자 여러 가지 공작을 추진해 왔다. 무엇보다 리더십이 강한 김원봉이 대원들과 함께 화북에 도착하면 조선의용대 지휘권이 그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직접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 김원봉의 화북행은 차단하고 그들의 오랜 동지인 무정(武亭)과 김두봉ㆍ한진 등을 내세워 대원들만 화북으로 오도록 하였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군복 입은 약산 김원봉.
▲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군복 입은 약산 김원봉.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군복 입은 약산 김원봉.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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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와 김원봉은 자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해 온 조선의용대가 명분이나 시대상황과는 별개로, 화북지역으로 이동하고 자신들은 충칭에 남게 되었다. 노선 갈등이라기보다 임시정부를 택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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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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