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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청사의 모습.
 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청사의 모습.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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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일었다. 국무총리 이승만의 적격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회영ㆍ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이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하고, 의정원에서 이승만이 선출되자 이들은 회의장에서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이승만은 상하이로 오지 않고 계속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한성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 사이 3ㆍ1혁명 이후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정부가 추대한 정부 수반이나 각료가 상호 중복되어 있고 또 국내외 각지에 떨어져 활동하고 있어 미취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임시정부는 기능이 공백상태에 빠져들었고 원활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일정부로의 통합이 모색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며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8월 말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 정부와의 통합과 정부개편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수차례의 논의 끝에 9월 6일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반의 호칭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헌법과 개선된 국무위원 명단이 발표되었다. 

통합 임시정부가 정부 수반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게 된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줄기찬 요구 때문이었다. 국무총리로 선출되고서도 상하이에 오지 않고 미국에서 활동해온 이승만은 국무총리 아닌 대통령으로 행세하였다. 그는 대통령 호칭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미국식 정치와 문화에 깊숙히 젖어 있어서 미국 정부의 수반 프레지던트란 호칭이 의식에 각인된 까닭일 터였다. 그는 한성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될 즈음부터 '대통령'으로 자임하였다. <신한민보>와의 회견에서도 자신을 대통령으로 호칭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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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직제에 대통령 직함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무총리 직제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한글로 대통령, 영어로 프레지던트를 자임한 것이다. 사소한 문제라 여길 지 모르지만 그는 헌법 위에 군림하는 오만함을 보여주었다. 해방 뒤 집권하여 몇 차례나 헌법을 뜯어고치고, 헌법을 무시하면서 멋대로 통치한 것은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헌법 위에 군림'하는 태도에서 발원한다.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표를 제출하고, 그 뒤를 이어 안창호(노동국총판)ㆍ김규식(학무부총장)ㆍ남형우(교통부총장) 등이 차례로 정부를 떠났다. 이승만을 수행했던 임병직의 회고에 따르면, 정부 각료들 사이에 독립운동 방법론을 둘러싸고 '강경론'과 '온건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즉 강경론자들은 만주에서 무장활동의 본격화, 러시아 및 중국 내 배일 정당과의 제휴 및 공동전선 구축, 국내에서의 게릴라전의 전개와 총독부 고위 관리의 암살 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이승만은 무장투쟁과 암살 활동은 국내 동포에 대한 일본의 탄압을 가중시키며, 공산당의 원조에 의하여 한국의 독립을 성취한다는 것은 조국을 다시 공산주의국가의 노예로 만들자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주석 4)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면서 현실성이 없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분열되고 있었다. 거기다 이승만은 정무에 전념하지도 않았다.

"상해 체류기간 이승만은 틈을 내어 3월 5~10일 간에는 장붕과 함께 남경을, 3월 25~27일 간에는 크로푸트 부처와 함께 유하를, 그리고 5월 24~25일 간에는 크로푸트 부처 및 신익희 등과 함께 소주를 관광했다." (주석 5)

신익희는 1920년 3월 안창호가 떠난 임시정부 내무총장서리, 외무총장서리, 국무원비서장 등을 맡아 혼란기 임시정부를 수습하느라 애를 썼다. 이어서 1921년에는 법무총장ㆍ문교부장ㆍ외교부장ㆍ의정원부의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습에 노력했으나 수습은 쉽지 않았다.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29일 마닐라행 기선 컬럼비아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6월 29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민찬호 등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동지회 창립석상에서 임시정부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주석
4> 임병직, 《임병직 회고록》, 171~172쪽, 고정휴,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외교노선과 제국주의〉, 《역사비평》, 1995년, 겨울호.
5> 앞의 책, 128~12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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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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