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 앤더슨 실바(46, 브라질)는 지난 6월 20일 멕시코 과달라하라 할리스코 스타디움서 있었던 복싱 경기에서 세자르 차베스 주니어(35, 멕시코)를 판정으로 제압하며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40대 중반의 노장이 10살 이상 어린 상대를 이긴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데, 한술 더 떠 승자 실바는 복서가 아니었다.

프라이드, UFC 등에서 활약했던 MMA 파이터로, 40대에 접어들어 급격하게 기량이 떨어진 채 퇴물 소리를 듣던 노장이었다. 그런 인물이 사실상 전혀 다른 종목인 복싱 무대에 뛰어들어 WBC(세계복싱평의회) 미들급 챔피언 출신 복서와 경기를 가진다고 했을 때 기대 못지않게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전성기 시절이라해도 불리 했을 것 같은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가득했다.

실바는 이 모든 우려를 실력으로 잠재워버렸다. 차라리 카운터 한 방으로 승부가 기울었다면 '운이 좋았다'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는 달랐다. 경기 내내 흐름을 잡아가며 차베스 주니어에게 승기를 빼앗기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경기에 임했던 차베스 주니어는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결국 승부가 끝나는 시점까지도 해법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실바가 타격위주 스트라이커 출신이라고 해도 오픈핑거 글러브가 아닌 복싱글러브를 끼고 10살이나 어린 복서를 압도했다는 것은 충분히 놀랄 만한 대형 사건이었다.

물론 상대인 차베스 주니어 역시 전성기는 지난 상태였다. 하지만 실바는 동나이대로 비춰보면 현역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며 대부분이 코치나 감독으로 일할 연령대다. 더욱이 복서로서는 초보나 다름없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쪽은 실바였다.

어쨌든 이날 승리로 인해 실바는 복서로서 제2의 행보를 이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많은 나이로 인해 본격적인 랭킹 싸움은 힘들겠지만 이른바 돈이 되는 이벤트 매치는 당분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역 시절에도 레전드 로이존스 주니어를 언급하는 등 복싱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입증한지라 머지않은 시기에 또 다른 이벤트 매치도 기대되고 있다.
 
 전 UFC 미들급 챔피언 출신 실바는 한창 옥타곤 무대서 맹위를 떨치던 시절 ‘투신(鬪神)'으로 불렸다.

전 UFC 미들급 챔피언 출신 실바는 한창 옥타곤 무대서 맹위를 떨치던 시절 ‘투신(鬪神)'으로 불렸다. ⓒ UFC

 
인파이팅과 아웃파이팅에 모두 능했던 '타격 장인'
 
전 UFC 미들급 챔피언 출신 실바는 한창 옥타곤 무대서 맹위를 떨치던 시절 '투신(鬪神)'으로 불렸다. 강자들이 쟁쟁한 미들급을 완전히 장악한 것을 비롯 상위 체급 강자들마저 종종 잡아내며 절대 제왕의 포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그래플러가 득세하던 UFC에서 타격가로서 최고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실바는 긴팔과 다리에 흑인 특유의 유연성은 물론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이 탁월하다. 타격을 잘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태권도, 무에타이, 복싱 등 다양한 타격 베이스를 익혔으며 주짓수 실력도 점점 발전하면서 그라운드 공방전 상황에서 상대를 서브미션으로 잡아내기도 했다.

한때 미들급 최고의 압박형 그래플러로 악명을 떨치던 차엘 소넨을 트라이앵글 초크로, 올림픽 국가대표 레슬러 출신 댄 헨더슨을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잠재워버린 것이 이를 입증한다. 타격이 가장 무서운 존재지만 서브미션 한 수도 갖추고 있던지라 상대 선수들 입장에서는 더욱 까다로웠다.

료토 마치다, 스티븐 톰슨 최고급 타격가들이 그러하듯 실바 역시 거리 싸움에 매우 능했다. 현란하면서도 실용적인 스텝과 순간 동작을 바탕으로 상대는 때리기 힘들고 자신은 공격을 넣기 좋은 거리를 잘 만들어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동체시력, 반사신경이 워낙 좋은지라 공격을 끝까지 보고 흘리듯 피해낸 후 부드럽게 이어지는 짧고 정확한 카운터가 일품이었다.

상대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순간적으로 공격이 들어오는 느낌인지라 실바의 거미줄에 걸리게 되면 대부분 피해내지 못하고 큰 충격을 받거나 그대로 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종 펀치 공격에 미들킥, 하이킥, 프런트 킥, 빰클린치 니킥, 플라잉니킥 등 레퍼토리 역시 다양한지라 공격 동선을 예측하기도 매우 까다롭다.

원거리는 물론 근거리에서조차 상대의 연타를 어렵지 않게 흘리거나 막아내는지라 아웃파이터 이미지가 강하지만 인파이팅에도 능하다. 지루할 정도로 거리 싸움을 하거나 카운터 위주 전략을 펼치다가도 상대가 데미지를 확실하게 입었다고 판단된 순간, 무섭게 치고 나가 가드 빈 곳을 뚫고 펀치와 킥을 찔러넣는 것을 비롯 빰클린치를 잡고 니킥 연타를 쏟아부어 회복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가 오기 전까지 미들급 최강자로 군림했던 리치 프랭클린과의 2차례 격돌이 대표적이다.

프라이드 시절에 있었던 카를로스 뉴턴과의 대결에서는 점수에서 밀린다는 판단이 들자 성큼성큼 압박을 하며 상대의 공격 선택지를 차례대로 봉쇄했고 의도적으로 태클 상황을 유도했다. 덫을 놓은 대로 뉴턴이 태클을 시도하자 정확한 타이밍에서 플라잉니킥을 카운터성으로 적중시키며 경기를 뒤집어버리는 사냥꾼다운 면모를 드러낸 적도 있다.

찰나의 빈틈에 카운터를 꽂아 넣는 스나이퍼형 타격가답게 실바는 밸런스와 다양한 상황에서의 응용 동작이 매우 좋다. 중심이 무너진 채 뒷걸음질 치는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뒷발을 딛고 미들킥을 날리는가 하면 불리한 자세를 단 한 번의 스위치 스탠스로 싹 바꿔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타격이 빼어난 선수가 엄청난 밸런스와 센스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타격전에서는 대적불가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

실바의 예술적인 카운터 퍼포먼스는 제임스 어빈, 포레스트 그리핀 등 상위체급인 라이트헤비급 파이터와의 격돌에서 더욱 빛났다. 어빈과의 경기에서는 경기 초반 스탠딩 대치상황이 이어졌다. 답답해진 어빈이 로우킥을 차면서 접근했고 이에 실바는 기다렸다는 듯 전광석화같은 펀치 카운터로 경기를 끝내버렸다.

UFC 레전드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 '아메리칸 히어로' 포레스트 그리핀과의 경기는 실바 격투 인생서 최고의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당초 대진이 잡힐 때까지만 해도 승부를 예측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실바가 미들급서 극강의 경기력을 보여주고는 있었지만 그리핀 역시 챔피언 출신이며 무엇보다 상위체급 라이트헤비급서 활약 중인 선수였다.

타격의 정교함에서는 실바의 우위가 점쳐졌으나 그리핀은 '진흙탕 싸움의 귀재'라는 명성답게 라이트헤비급의 쟁쟁한 파이터들 속에서도 투지나 승부근성을 인정받던 파이터였다. 초반 실바의 타격을 그리핀이 어느 정도 버티어낼 수 있다면 이후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공산도 크다는 분석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실바는 그리핀을 맞아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압도적으로 경기를 끝내버렸다. 공격 성향이 강한 그리핀을 맞아 도발로 선공을 먼저 끌어낸 후 근거리에서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연타를 모두 피해버렸다. 그리핀은 크게 당황했고 그틈을 노려 실바의 짧은 카운터가 가볍게 들어가며 안면을 강타했다. 뻣뻣이 서 있는 상태서 상체만 슬쩍슬쩍 흔든 자세로 팔만 내지르듯 카운터가 꽂혔는데 마치 무협영화에서나 보던 고수와 하수의 싸움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만들어졌다.

이렇듯 전성기 당시 실바의 스트라이커로서의 움직임은 역대 어느 타격가와도 급을 달리했고 그로인해 '투신'이라는 명성까지 얻게 된다. 하지만 지나친 카운터 위주의 움직임이 분석되고 노쇠화까지 겹치면서 신흥강자 크리스 와이드먼과의 2차전 이후에는 절대 강자의 위치에서 내려오게 된다.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흐른 현재, 복싱 무대서 보여준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 감탄까지 자아내게 한다. 물론 이날 차베스 주니어와의 경기는 상성과 당일 컨디션 등 여러가지 다른 상황이 겹쳐 더욱 빛났을 가능성도 있다. 향후 또 다른 상대와의 복싱 경기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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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 싸움의 신 앤더슨 실바 스트라이커 실바 복싱도전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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