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2020 F조는 진정한 '죽음의 조'였다. 유럽 축구 전통의 강호이자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이 모두 16강에서 전멸했다.

독일은 30일(한국시간)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 2020 16강전에서 잉글랜드에 0-2로 패하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이보다 앞서 포르투갈은 벨기에에 0-1, 프랑스는 스위스와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나 승부차기 끝에 4-5로 석패하며 이변의 희생양이 됐다.

포르투갈은 지난 유로2016 디펜딩챔피언, 독일과 프랑스는 각각 2014년과 2018년 월드컵을 제패했던 팀이었다. 세계축구 국가대항전을 대표하는 최근 세 차례의 메이저 대회를 나란히 석권했던 전통의 강팀들이 같은 대회에서 모조리 16강을 넘지못하고 전멸한 것은 보기드문 장면이다. 축구에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팀이 속한 F조는 탄생과 동시에 이번 대회는 물론이고 역대 유로 대회 역사상 손꼽힐만한 죽음의 조로 꼽혔다. 조추첨 결과가 완성된 이후 허탈한 웃음을 짓는 F조 감독들의 표정이 축구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을 정도다.

예상대로 조별리그부터 역대급 혼전이 벌어졌다. 우승후보 세 팀은 물론이고 다크호스로 꼽힌 헝가리까지 의외로 탄탄한 전력을 과시하며 최종일까지 결과를 예측할수 없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프랑스가 독일을 잡았고, 독일은 포르투갈을 꺾었다. 헝가리는 포르투갈에 완패했지만 프랑스-독일을 연이어 몰아붙이며 무승부를 기록했다. F조는 2승 이상을 거두며 독주한 팀이 전무했고 근소한 차이로 희비가 엇갈렸다.

결과적으로 우승후보 세 팀 모두 조별리그 통과에는 성공했다. 프랑스(1승2무)가 1위, 독일(1승1무1패)이 승자승에서 앞서 2위를 기록했고 포르투갈(1승1무1패)이 조 3위 6개팀중 상위4팀까지 주어지는 와일드카드로 16강에 간신히 합류했다. 헝가리(2무1패)가 마지막 독일전 막판에서 다잡은 승리를 놓치며 아깝게 조 4위로 탈락했다. 하지만 차라리 '졌잘싸'(졌지만 잘싸웠다) 평가를 받은 헝가리의 퇴장이 차라리 명예롭게 보일 정도로 남은 세 팀에게는 16강에서 더 큰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3위에 그친 포르투갈은 토너먼트 첫 판부터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이자 우승후보인 벨기에와 만나는 불운을 겪었다. 그래도 포르투갈은 내용 면에서 벨기에를 슈팅숫자 23-6, 유효슈팅 4-1로 압도하며 공세를 퍼부었지만, 이날 경기 벨기에의 유일한 유효슈팅이었던 토르강 아자르에게 내준 전반 선제골을 만회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포르투갈의 에이스 호날두는 이번 대회에서 5골을 터뜨리며 역대 유럽선수권 대회 본선 최다골(14골) 기록과 역대 A매치 개인 통산 최다득점(109골) 기록을 갈아치웠지만 16강에서 무너지며 대기록 행진이 중단됐다. 유로2004부터 5회 연속 본선무대를 밟았던 호날두는 어느덧 36세가 되며 나이를 감안할 때 이번 대회가 마지막 유로 출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이른 퇴장이 더욱 아쉽다. 

포르투갈은 4년전 우승때보다도 오히려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자 호날두-페페 같은 노장들에 대한 의존도가 여전히 높았다. 브루노 페르난데스-주앙 펠릭스- 베르나르두 실바 등 젊은 선수들이 기대보다 부진했고 페르난두 산투스 감독의 단조로운 용병술이 한계를 드러내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는 죽음의 조에서 1위를 차지하고도 이번 대회 최대 이변의 희생양이 됐다. 벨기에를 만난 포르투갈, 잉글랜드를 만난 독일과 달리, 스위스는 누가봐도 프랑스의 우위가 예상되는 상대였다. '유럽의 멕시코'로도 불리우는 스위스는 유로 대회 출범 이후 우승은 커녕 지난 대회 16강이 최고성적이었다.

프랑스는 스위스에 먼저 선제골을 내주고 끌려갔으나 카림 벤제마의 멀티골과 폴 포그바의 추가골, 위고 요리스의 PK 선방 등에 힘입어 3-1로 역전하여 승리를 눈앞에 두는 듯 했다. 하지만 후반 36분 하리스 세페로비치의 만회골에 이어 45분 가브라노비치가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리며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갔다.

추가골이 나오지 않고 결국 승부차기로 접어든 양팀은 네 번째 키커까지는 모두 골망을 흔들었지만, 프랑스의 마지막 키커로 나선 킬리앙 음바페의 슈팅이 스위스 골키퍼 얀 좀머의 선방에 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한때 호날두-메시의 뒤를 이을 차세대 선두주자로 꼽혔던 음바페는 이번 대회에서는 시작전부터 팀 동료 올리비에 지루와 불화설에 시달리며 도마에 오른 데 이어 16강전까지 무득점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고, 결국 결정적 승부차기에서는 뼈아픈 실축까지 저지르며 팀의 엑스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팀동료의 노출비디오 협박에 연루된 범죄 혐의를 안고 있는 벤제마까지 논란을 감수하고 복귀시켰다. 벤제마의 활약 자체는 출중했으나 프랑스는 그 후유증으로 지난 월드컵 우승때와는 달리 여러 가지 논란과 함께 팀의 단합력에도 문제를 드러내며 소득없이 일찍 무너지고 말았다.

반면 스위스는 원팀의 진수를 보여주며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격언을 증명했다. 1954년 자국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이후 67년만에 메이저대회 8강진출이자, 유로 역사상 첫 토너먼트 승리라는 값진 새 역사를 썼다.

마지막으로 '전차군단' 독일마저 '축구종가' 잉글랜드에게 완패하며 짐을 쌌다. 양국은 역사와 정치적으로도 감정의 골이 깊은 앙숙으로 유명하다. 독일은 상대전적은 물론 메이저대회 본선에서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한번도 지지 않으며 여러 차례 잉글랜드를 울린바 있고, 요아힘 뢰브 감독도 2010 남아공월드컵 16강전에서 잉글랜드를 만나 4-1로 대파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독일은 더 이상 과거의 전차군단이 아니었다. 독일이 몇 차례 역습 상황에서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경기력에서는 오히려 잉글랜드가 압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잉글랜드는 이번 대회 구세주로 등장한 라힘 스털링의 선제결승골에 이어, 해리 케인이 무득점 행진을 끊어내는 쐐기골마저 터뜨리며 노쇠한 독일을 격침시켰다.

독일에게 이번 패배가 더욱 뼈아팠던 것은 상대가 잉글랜드이기도 했지만, 2006년부터 무려 15년간 독일대표팀을 이끌어왔던 요아힘 뢰브 감독의 고별전이었기 때문이다. 뢰브 감독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독일대표팀 감독직 사퇴를 이미 예고한 바 있다.

뢰브 감독은 2014 브라질월드컵 우승을 비롯하여 독일축구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후반기에는 세대교체 실패와 매너리즘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에 덜미를 잡히는 '카잔의 기적에 희생양이 되며 독일축구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당한 데 이어 마지막 명예회복을 노렸던 유로2020에서마저 포르투갈전 외에는 기대에 못미친 경기력을 거듭한 끝에 쓸쓸하게 퇴장하게 됐다.

세계적인 슈퍼스타도,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장도,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결말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결국 '죽음의 조'에서 끝까지 웃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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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2020 죽음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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