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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말]
 박창수 열사.
 박창수 열사.
ⓒ 김동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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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기상을 한 창수는 평소와 같이 부산 영도 봉래산 자락 바닷가에 위치한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로 출근하기 위해 문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통근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통근버스가 도착했다. 통근버스는 항상 창수가 승차하는 곳부터는 자리가 없다. 통근버스에 오르면 항상 먼저 타고 오는 동료들이 피로에 지쳐 자고 있었다.

당시 한진중공업은 부산에서 가장 큰 기업으로 통근버스를 30대나 운행하고 있었다. 통근버스에서 내린 노동자들이 회사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은 역동적인 노동현장의 시작을 알리는 광경이었다. 4000여 명의 노동자가 물밀듯이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창수도 출근길 대열에 끼여 정문에 설치되어 있는 타각기에 타각을 하고 배관공장 위 생활관으로 가서 작업복으로 갈아 있었다.

도시락 거부투쟁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박창수 열사.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박창수 열사.
ⓒ 한진중공업 열사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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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며칠 전부터 현장 내 화장실에 '식당을 지어 달라',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임금인상 쟁취하여 가족에게 사랑받자'라는 글들이 적혀 있었다. 회사 측에서는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찾는다고 혈안이었다.

당시 한진중공업은 쥐가 우글거리는 관물대에 옷을 넣고, 식어 빠진 양은 도시락을 점심식사로 제공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서무들이 주전자에 보리차를 받기 위해 줄을 선다. 식은 양은 도시락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먹기 위해서였다. 추운 겨울은 보리차 없이는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고 나면 조선소 노동자들은 그 자리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이날은 달랐다. 누군가가 양은 도시락을 내동댕이쳤다. 이를 보고 있던 노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곧바로 도시락을 던졌다. 각 생활관별로 던져진 도시락이 산더미 같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이 싸움을 '도시락 거부 투쟁'이라고 불렀다.

현장 조합원들은 도시락을 거부하고 굶은 채로 작업장으로 내려가 버렸다. 회사는 밥을 먹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회사는 '식당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노동자들이 뭉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준 투쟁이었다. 이 투쟁으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도 민주노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고,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풍물패 '햇새벽'
 
 1989년 12월 28일 부산지역 노동조합 연합 송년회에서 공연 중인 햇새벽 풍물패(맨앞이 박창수 열사).
 1989년 12월 28일 부산지역 노동조합 연합 송년회에서 공연 중인 햇새벽 풍물패(맨앞이 박창수 열사).
ⓒ 한진중공업 열사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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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는 부산 문현동 산동네 슬레이트집 단칸방에서 부인, 아들, 딸 네 식구가 살았다. 어려운 삶에도 함께했던 동료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고, 노동자들의 진정한 일터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현장 내 풍물패 '햇새벽'의 회원이 되었다.

한진중공업 햇새벽 풍물패는 1989년 최초로 민주노조가 세워지면서 만들어졌다. 발족 당시 풍물패원은 50여 명이었다. 동아대학교 벙커에서 학생들의 지도를 받으며 풍물 가락을 익혔다. 풍물을 친 지 일주일만에 조선소 내 지신밟기를 했다. 영도조선소 8만 평과 다대포 공장 6만 평을 돌면서 지신을 밟았다.

배운 지 겨우 일주일이었지만 선생이 치는 대로 따라 치고 선생이 내는 소리를 따라 했다. 7시간 동안 북, 장구를 메고 풍물 울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단원들은 초주검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지신밟기 수입도 좋아서 덕분에 북과 장구를 구입하고 선생님 보너스까지 줄 수 있었다.

한번은 동지들과 함께 남천병원 간호사들의 파업 현장에 문화공연을 나간 적이 있었다. 햇새벽 패원들은 퇴근하면 연습실에 모여 노래와 풍물로 혼합된 단막극을 준비했다. 용접쟁이, 기름쟁이들로 구성돼 유연성이라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열정 하나는 대단했다.

드디어 파업 중인 간호사들 앞에서 선을 보이는 날이 왔다. 당시 풍물패 단원들 나이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이었다. 20대 초반의 간호사들 앞이라 다들 긴장을 했던 모양이다. 북채를 놓치는 일이 허다했고, 대사를 까먹는 해프닝도 속출했다. 하지만 오히려 박수는 더 많이 받았다. 창수는 북도 치고 기타도 치며 파업현장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창수는 노동조합 활동에서도 모범적이었다. 위원장으로 출마하기 전까지 현장 활동가의 역할을 충실히 실천했고 노동자다운 삶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노동조합 감사 자리는 그러한 철학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동지가 바로 창수였다.

조합비 사용에 대한 원칙도 명확했다. 조합비는 개인이 소득을 올리는 밑천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는 것과 조합원들과 함께하는 운동을 강조하며 그에 알맞은 사업배치를 요구하도록 주문했다. 또 사업배치에 따른 사업비는 아낌없이 지출해야 한다는 회계의 원칙을 요구했다.

94% 압도적 지지로 위원장 당선
 
 1990년 7월 28일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당선된 박창수 열사(가운데 꽃다발을 든 이)가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1990년 7월 28일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당선된 박창수 열사(가운데 꽃다발을 든 이)가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 한진중공업 열사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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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은 1987년 7월 25일 어용노조 25년의 왜곡된 역사를 깨고 조합원들의 주체적인 힘으로 민주노조 깃발을 당당하게 세워 냈다. 민주노조를 세우면서 그동안 대의원 간선으로 뽑았던 위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했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직선제 위원장은 얼마 못 가 회사 측의 회유, 협박, 공작으로 개량주의로 변해갔다. 그러자 조합원들 내에서는 민주노조를 제대로 책임질 위원장을 다시 뽑아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현장 활동가 조직으로는 '백두회'가 있었다. 백두회 회원들은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위해 용두산공원 인근에 모여 위원장 후보 만들기에 들어갔다.

당시 민주노조 위원장의 자리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국가와 자본의 탄압이 심했다. 이 때문에 활동가들도 쉽사리 위원장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박창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직이 요구하고 있었기에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박창수가 민주 후보로 확정됐고, 최종 결과는 조합원 94%의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됐다.

'민주노조 위원장'의 구속
 
 1990년 9월 22일 노조위원장 취임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박창수 열사.
 1990년 9월 22일 노조위원장 취임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박창수 열사.
ⓒ 박창수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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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집행부는 1990년 9월부터 임기가 시작됐다. 임기 시작과 함께 전노협, '연대를 위한 대기업 연대회의'(이하 대기업연대회의)에 가입해 부산 지역 민주노조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현장 조합원들의 의식을 높여내기 위해 전체 조합원 교육을 시작하고, 위원장이 직접 교육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정권과 한진중공업 자본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박창수가 위원장에 당선되자 정권과 자본은 강성노조로 낙인찍고 홍상태 안기부 부산지부 요원을 한진중공업으로 잠입시켜 노조 간부는 물론 노조 활동 전반을 감시토록 했다.

당시 대우조선이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대기업연대회의 간부들은 이를 어떤 방식으로 지원할 것인지 논의하기 위해 1991년 2월 10일 경기도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공동선전물 제작 배포와 투쟁기금 지원을 결의하고 다시 수련회장을 나오던 중 참가자들은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에게 연행됐다.

경찰은 72시간의 법적 구금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조사를 진행했다. 홍영표 대기업연대회의 간사를 포함한 위원장급 8명은 대공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이때 박창수도 구속됐다. 위원장이 구속되자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일상적 활동은 마비되다시피 했다. 조합원들은 면회 조를 짜고 부산에서 서울구치소까지 면회를 다녀야 했다.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죽음
 
 2010년 한진중공업에서 열린 박창수 열사 19주기 추모식 광경.
 2010년 한진중공업에서 열린 박창수 열사 19주기 추모식 광경.
ⓒ 한진중공업 열사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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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4일 강경대 학생 죽음 규탄 및 공안탄압 분쇄 전국 동시다발 집회가 있었다. 부산에서도 부산역에서 집회가 열렸다. 집회를 마치고 서면까지 행진하는 도중에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던 박창수 위원장이 운동시간에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후송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들과 박창수 위원장 부인이 안양병원으로 급하게 올라갔다.

후송된 박창수는 이마를 수술하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다. 의사 말에 의하면 이마 부상이 심해 34바늘을 꿰맸고 결과는 5월 6일경에 나온다는 것이었다. 재소자 신분이었기에 중환자실 앞에는 교도관들이 지키며 면회자를 통제하고 있었다. 가족들조차 잠깐 얼굴 보는 정도였지 환자 옆에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통제 속에 있던 박창수는 5월 6일 새벽 5시경 안양병원 건물 뒤쪽 어린이 놀이터 시멘트 바닥에서 의문사한 상태로 발견됐다. 의사와 간호사가 박창수를 소생시켜 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살려내지 못했다.

의사가 자리를 떠나자 곧바로 경찰 병력이 시신을 가지고 가겠다며 몰려왔다. 이에 가족과 노조 간부들은 시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주변 구조물로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변호사와 의사가 도착할 때까지 버텼다. 잠시 후 소식을 접한 전노협 조합원을 비롯해 서울, 안양 지역 동지들이 안양병원으로 오기 시작했다. 이 사이에 전노협 간부들과 재야인사들(백기완, 민주당 국회의원, 민주 변호사)로 대책위를 구성하고 경찰 측에 교섭을 요청했다.

같은 시각 부산의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은 위원장의 비보를 듣고 자발적으로 일손을 놓았다. 조합원들은 바로 안양으로 출발했다. 안양 지역 시민단체, 노동단체에서도 긴급하게 박창수 위원장 주검을 사수하기 위해 안양병원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되자 경찰도 쉽게 시신을 손대지 못했다. 노조 측 변호사와 의사가 도착해 정부 측 관계자와 협상 자리가 만들어졌다. 협상 결과 우선 시신을 놀이터에서 영안실까지 이동해 안치하는 것으로 했다.

백골단, 영안실 벽 뚫고 시신 탈취
 
 1991년 5월 8일자 <한겨레>. 백골단은 병원에 안치된 박창수 열사의 시신을 탈취했다.
 1991년 5월 8일자 <한겨레>. 백골단은 병원에 안치된 박창수 열사의 시신을 탈취했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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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위원장 주검이 영안실에 안치되면서 영안실 주변은 경찰과 사수대 간의 대치 전선이 형성됐다. 말 그대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부산에서 출발했던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저녁부터 안양병원 영안실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저녁 내내 경찰과 사수대는 난투극을 벌였다. 경찰은 시신을 빼앗기 위해 영안실 입구로 최루탄을 난사하며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사수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 학생은 동맥을 그어 경찰에 저항했다. 경찰이 입구를 뚫지 못하자 이번에는 지하 영안실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2시간이 지나자 영안실 벽에 구멍이 났다. 백골단이 구멍으로 밀려 들어오자 좁은 영안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실신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결국 시신은 강제 탈취되고 말았다. 정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강제로 부검을 하고 시신을 다시 가족에게 넘겨주었다.

이날부터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진상규명 투쟁이 안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부산 영도조선소는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고, 전체 조합원들이 상경해 서울 곳곳을 다니면서 호소했다. 대학교에서 집회가 있으면 어디라도 달려가 투쟁 경과보고를 했다.

안양 시내는 매일 저녁 경찰과 시위대 간의 난투전이 벌어졌다. 경찰은 최루탄으로, 시위대는 짱돌로 맞섰다. 수많은 활동가들이 연행되고 다쳤다. 정권과 자본의 벽을 넘기란 역부족이었다. 결국 진상규명을 다하지 못하고 장례를 치러야만 했다. 이후 투쟁을 주도했던 이들은 구속, 수배, 해고되어 한진중공업 내 현장 활동가 조직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도 패배감에 빠지게 되었다.

국가가 분명하게 책임져야
 
 박창수 열사 의문사의 진실은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박창수 열사 의문사의 진실은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 한진중공업 열사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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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열사의 죽음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탄압이 만들어 낸 타살이다. 국가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 박창수 위원장은 당시 '제3자 개입금지'로 구속됐다. 3자개입 금지법은 이미 시대에 역행하는 법으로 폐기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구속됐고 그 법을 가지고 노동조합을 탄압했다면 제자리로 원상회복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노동탄압 행위에 대해 국가가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하며 사건 관련 자료들을 일체 공개하고 이를 재조사를 진행 중인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특히 당시 정권과 공안기관은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들과 조합원들에게 "전노협만 탈퇴하면 박창수는 풀려날 수 있다", "대기업연대회의에 한진중공업 노조가 앞장서지 않도록 박창수를 설득하라"며 회유했던 것이 드러났는데 이에 대해서도 명확히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를 잃고 긴 세월을 힘들게 살았던 열사 가족들에게도 국가는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열사 명예회복에 나서야 한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열사가 노동운동에 대한 회의감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리는 열사가 당시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동운동을 했는지, 또 구속된 뒤에도 승리와 낙관으로 동료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는지 똑똑히 잘 알고 있다. 만약 현 정권마저 예전 정권처럼 죽음에 대한 사실관계를 은폐하려 한다면 우리는 진실을 밝힐 때까지 그 누구와도 당당히 투쟁으로 맞설 것이다.
 
 5월 1일 양산시 솥발공원 노동열사묘역에서 거행된 박창수 열사 30주기 묘소 참배.
 5월 1일 양산시 솥발공원 노동열사묘역에서 거행된 박창수 열사 30주기 묘소 참배.
ⓒ 한진중공업 열사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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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이 글을 쓴 박성호씨는 1991년 한진중공업 노조 교육선전부장을 지냈고, 현재는 추모연대 과거사청산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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