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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말]
천세용 열사.
 천세용 열사.
ⓒ 김동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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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3일 저녁, 한강성심병원을 나와 급하게 달려온 구급차가 세브란스병원에 도달할 쯤, 택시에서 내린 나이 든 남자가 구급차를 세우고 올라탔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인 고 박정기 선생(당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이었다.

박정기 선생은 4월 29일 분신한 전남대 박승희가 입원한 전남대병원을 찾은 뒤, 5월 1일 분신한 안동대 김영균의 마지막 모습을 경북대병원에서 보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경원대 천세용의 분신 소식을 들었다. 한강성심병원에 도착했지만 방금 전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이야기에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구급차를 따라잡은 것이다.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천세용 열사 묘지 전경.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천세용 열사 묘지 전경.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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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5월 2일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천세용 열사 묘역 앞에서 열린 30주기 추모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는 선후배들.
 올 5월 2일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천세용 열사 묘역 앞에서 열린 30주기 추모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는 선후배들.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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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 안에는 천세용이 꺼져가는 생명줄을 붙잡고 있었다. 박정기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천세용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계속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공안통치 분쇄하자!",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마지막 순간까지 온몸으로 항거했던 천세용. 그는 스무 번째 생일을 이틀 앞둔 5월 3일 밤 10시 14분,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와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민족사연구회·현대사연구회 동아리 활동... 말보다 실천
 
어린 시절 환히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맨왼쪽이 천세용 열사다.
 어린 시절 환히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맨왼쪽이 천세용 열사다.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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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한 천세용 열사. 이때만 해도 보이스카웃 활동을 할 만큼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한 천세용 열사. 이때만 해도 보이스카웃 활동을 할 만큼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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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용 열사가 동북고 3학년 재학 시절,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가입을 이유로 여러 선생님들이 교단을 떠나야 했다. 열사는 동료 학생들과 전교조 선생님들을 지지하는 활동을 적극 벌여나갔다. 이를 통해 열사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인식했고, 이러한 비판의식과 역사의식은 대학에 와서도 이어졌다. 열사가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한 데에는 고3 때의 경험이 큰 작용을 했다.

열사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외할머니 밑에서 동생과 함께 자랐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낮에는 건설 노동일과 세차장 알바를 하며 학비를 벌었고, 야간 강좌에서 수업을 들었다. 어려운 형편에 일찍부터 사회를 경험해서인지 열사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관심이 높았고, 늘 고민과 생각이 많았다.

1990년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전자계산학과에 입학한 열사는 동아리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족사연구회 '한얼'에서 역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공부했고, 현대사연구회 '열린마당' 활동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런 동아리 활동을 통해 열사는 양심적인 지식인을 넘어 사회변혁 운동가로서의 삶을 자신의 기본가치로 삼았으며, 민중 승리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갖게 됐다. 열사는 운동대오 내의 정치노선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바른 성격과 속 깊은 인간관계로 모든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열사는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학교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다. 낮에는 투쟁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밤에는 수업과 학습을 병행했다. 그런 열사에게는 자신의 몸을 편히 누일 변변한 자취방도 없었다. 당시 경원대는 동아리실 대부분이 진리관(C동) 지하에 위치했는데, 열사는 주로 여기서 먹고 자며 생활도 하고 공부도 했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종종 피부병에 걸리는 일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입생 후배들을 잘 챙겼고, 그래서 유난히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말보다는 실천으로 묵묵히 헌신하던 청년학도였다.

투쟁의 선봉 '횃불대' 대원이 되다
 
대학 교정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천세용 열사(맨왼쪽). 열사는 선후배들과 동기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대학 교정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천세용 열사(맨왼쪽). 열사는 선후배들과 동기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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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는 사회 모순에 대한 방관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해결의 주체로 참여하고자 했다.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 5월 메이데이 집회와 6월 10일 전대협 방북대표 임수경 학생의 공판 투쟁에 참여했다가 서초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또한 11월 11일 노동자대회와 11월 25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민중대회에도 참여하는 등 모든 집회와 시위를 빼놓지 않았던 실천가였다.

특히 열사는 1학년 때부터 경원대학교 총학생회 산하 '횃불대'의 대원으로 활동했다. 횃불대는 전남대의 오월대, 조선대의 녹두대처럼 당시 대학마다 꾸려졌던 투쟁선봉대였다. 집회를 준비하고, 집회 현장에서는 최선두에서 경찰에 맞서 싸우는 역할을 담당한 조직이었다.

열사는 농활과 아르바이트를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실감하면서 노동자, 농민들과의 연대투쟁에도 적극 참여했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 스스로의 힘과 노력만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 이를 적극 실천하기 위해 경원대 민주주의학생연맹에도 가입했다.

이 과정 속에서 군사정권에 편승해 뇌물과 특혜로 성장한 독점자본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사회화를 주장했고, 민중생존을 위협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을 강조했다.

"나의 사랑 횃불대! 통일과 단결로,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끝끝내 파쇼의 무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역사의 새 주인 노동자와 민중 형제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합시다. 역사는 여러분과 함께 전진할 것입니다. 5월 3일, 세용" (분신 당시 횃불대 대원들에게 남긴 글 전문)

학보사 컷 기자 활동... 공대 건물에서 분신하다
 
천세용 열사는 경원대 학보사에서 컷 만평을 담당했다. 사진은 당시 경찰의 채증팀이 망원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로 시위대를 정밀 촬영하기로 한 조치를 비판하는 만평이다.
 천세용 열사는 경원대 학보사에서 컷 만평을 담당했다. 사진은 당시 경찰의 채증팀이 망원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로 시위대를 정밀 촬영하기로 한 조치를 비판하는 만평이다.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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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용 열사는 평소 그림과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1991년 2학년이 되면서 경원대 학보사(경원신문사)의 컷 기자로 활동했다. 열사는 시대상을 풍자와 비유로 그린 컷 만화를 신문에 게재했다. 열사의 만화는 표현과 묘사가 훌륭했고, 사건과 본질을 포착하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당시 이승재 대학신문사 편집장은 "세용이의 한 컷 만평은 다른 대학 학보사 기자들에서도 평가가 좋았고, 시위 현장에 있던 일본의 언론 기자가 감탄을 하고 학교 편집실에 직접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 기자로부터 하나의 컷에 메시지를 함축해 담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칭찬받았던 일화도 있었다"라고 기억했다.

열사가 2학년이 된 1991년 3월 16일 '수서비리 은폐 정권 규탄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를 계기로 경원대에서는 '노태우 정권 완전 타도와 전투적 민중연대를 위한 경원 청년학생 특별위원회'가 구성됐는데, 열사는 여기에 가입해 적극 활동했다.

그러던 중 명지대 강경대 학우의 죽음을 보면서 열사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야만적인 폭력진압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졌다. 평소에도 후배들을 아끼고 배려하던 열사였기에 91학번 강경대의 죽음은 더더욱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경원대는 축제와 교내 체전 일정으로 다른 대학처럼 적극적인 투쟁이 일어나지 못했다.

1991년 5월 3일 오후 3시 15분경이었다. '강경대 학우 폭력 살인 자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애국 경원 2차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던 때였다. 열사는 공대 건물 희망관(F동) 2층 난간에서 시너를 뿌리고 분신했다. '살인정권 폭력정권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다 6미터 아래 1층으로 떨어졌다. 당시 시위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의 사진을 통해 열사의 분신 광경은 지울 수 없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5월 9일 경원대에서 열린 천세용 열사 민주국민장에 참석한 시민과 학생들.
 5월 9일 경원대에서 열린 천세용 열사 민주국민장에 참석한 시민과 학생들.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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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경원대에서 열린 천세용 열사 민주국민장에 참석한 시민과 학생들.
 5월 9일 경원대에서 열린 천세용 열사 민주국민장에 참석한 시민과 학생들.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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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는 외할머니를 따라 성공회 성당을 다녔고, 고등학교 때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성공회 신자였다. 당시 열사의 장례를 두고 성공회에서는 고심이 많았다. 대한성공회 공도문에는 '자결한 자에 대한 예식사용 불가'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에서는 열사들의 분신에 대해 '자살은 죄'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회 사제들은 세 차례에 걸친 토론 끝에 "그의 죽음은 단순한 자결이 아니라 폭력사태와 비민주적 상황에 의한 타살"이라는 데 뜻을 모으고 열사의 장례미사를 집전하기로 했다.

열사의 장례는 5월 9일 문익환 목사님을 장례위원장으로 하고 민주국민장으로 열렸다. 이날 오전에는 서울의 성공회 대성당에서 영결미사가 엄숙히 거행됐다. 오후에는 경원대 대운동장에서 민주국민장을 치른 뒤 장례 대열이 성남시청으로 행진을 했다. 그리고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영원한 안식처를 찾았다. (현재는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열사의 묘역이 있다.)

열사는 1994년 2월 명예졸업장을 받았고, 2007년에는 졸업생과 재학생, 유가협과 성남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힘을 모아 교정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천세용 열사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일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사회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이를 위해 노학연대, 민중연대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열사는 치열한 변혁의식과 활동으로 당시 노태우 정권이나 보수야당에 청원하는 방식이 아닌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주의,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이룬 '민중의 나라'를 열망했다.
 
천세용 열사가 남긴 유서들. 한장은 횃불대 동료들에게, 다른 한장은 경원대 학우들에게 남겼다.
 천세용 열사가 남긴 유서들. 한장은 횃불대 동료들에게, 다른 한장은 경원대 학우들에게 남겼다.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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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용 열사가 남긴 유서들. 한장은 횃불대 동료들에게, 다른 한장은 경원대 학우들에게 남겼다.
 천세용 열사가 남긴 유서들. 한장은 횃불대 동료들에게, 다른 한장은 경원대 학우들에게 남겼다.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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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열사의 열망은 그가 남긴 유서의 구절구절마다 담겨 있다.

"학우들이여, 이제는 봅시다.

우리와 같은 학우들이 쇠파이프에 맞아 죽고 꽃다운 청춘을 불사르는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노태우 정권과 독점자본가들이 1천만 노동자와 4천만 민중형제들을 착취, 수탈하고 저항이 있는 곳마다 광폭한 탄압을 휘두르는 동안 과연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떨쳐 일어납시다. 슬픔과 분노를 그 자체로 끝낼 것이 아니라 현 정치권력에 맞서 정면 투쟁, 정면 돌파해 나갑시다.

많은 할 일들이 남아 있지만 제 몫까지 여러분이 투쟁하여 준다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손으로 노태우 살인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민중의 나라를 건설하는 날까지 힘차게 투쟁합시다.

재벌에겐 특혜분양, 민중에겐 물가고통 노태우 정권 타도!" (5월 3일 천세용 열사가 남긴 유서 전문)

 
5월 9일 오전 성공회대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 풍경.
 5월 9일 오전 성공회대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 풍경.
ⓒ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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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이 글을 쓴 심우기씨는 현재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송광영·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태그:#천세용, #1991년 5월 투쟁, #경원대, #노태우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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