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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편집자말]
김동석 화가가 그린 강경대 열사.
 김동석 화가가 그린 강경대 열사.
ⓒ 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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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은 금요일이었다. 그날 새벽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1학년생 강경대는 일찍 일어났다.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던 경대는 공부하는 데 별도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 주로 새벽시간을 이용해 토플 학원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경대는 종이를 꺼내 부모님께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라는 쪽지를 쓰고 집을 나섰다. 경대는 학원을 마치고 입학하자마자 가입한 명지대 민중노래패 '땅의 사람들'에 들렀다.

명지대 1학년, 학교 담장 앞에서 고꾸라지다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 폭력에 쓰러졌던 명지대 교문 앞 집회 모습.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 폭력에 쓰러졌던 명지대 교문 앞 집회 모습.
ⓒ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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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집회는 낮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명지대에서는 학원자주화투쟁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4월 24일에는 명지대 총학생회장이 상명여대 학원자주화투쟁집회에 참석하여 지지연설을 마치고 나오다 서울 서부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에 명지대생들은 총학생회장 구출투쟁에 나서 4월 26일 낮 12시 서부경찰서 앞에서 항의 연좌투쟁을 벌였으나 전원 폭력적으로 연행되었다.

이에 분노한 명지대생들은 오후 3시에 학내집회를 갖고 경찰서 진격투쟁을 벌였다. 당시 대학에는 여전히 사복경찰이 들어와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고, 시위가 발생하면 백골단(사복체포조)이 학내까지 진입하여 학생들을 때리고 끌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날 오후 3시 40분경부터 명지대 운동장에서 학생 4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의 구호는 "총학생회장 석방하라" "학원자주 완전승리와 노태우 정권 퇴진"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였다. 경찰은 쇠파이프와 직격최루탄, 페퍼포그로 중무장한 전경과 백골단을 투입해 강제해산과 체포작전에 나섰다.

백골단을 보자 학생들은 담을 넘어 몸을 급히 피했고, 시위대 선두와 본대를 연결해주는 연락책이었던 경대도 쫓아오는 백골단들을 발견하고 담을 넘어 피하려고 학교 담장에 올라섰다. 이때 서울시 경찰국 소속 제4기동대 94중대 백골단 5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어 경대를 끌어내려 담장 벽에 세워놓고 그중 한 명이 경대를 붙잡고 나머지 네 명은 115센티미터의 쇠파이프와 130센티미터 나무 몽둥이, 진압봉 등으로 경대의 가슴과 어깨를 마구 내리쳤다. 또 각목으로 왼쪽 머리를 가격하고 발로 배를 계속 차면서 경대의 머리를 잡은 채 진압봉으로 머리와 팔, 상체를 무차별적으로 가격했다.

경대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학생들이 경대가 맞고 있는 것을 보고 달려오자, 백골단은 경대를 2미터 정도 끌고 가다 길 위에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경대는 이미 온몸이 축 늘어져 손가락 하나 가누지 못했다. 경대는 병원으로 옮기던 중 오후 5시 30분경 피워보지도 못한 짧은 19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사인은 외부가격에 의한 심낭 내 출혈이었다. 그날 새벽 부모님께 남긴 짧은 쪽지가 마지막 유언이 된 채 경대는 이제는 오지 못할 세상으로 갔다.

"내 아들 죽인 놈 얼굴 한 번 보자"
 
강경대 열사의 노제 광경.
 강경대 열사의 노제 광경.
ⓒ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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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의 사망은 백골단 몇몇에 의한 우발적 타살이 아니라 공안통치의 결과이다. 열사의 사망 이후 노태우 정권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숨졌다"라는 거짓발표를 했으나 4천만 민중의 항의와 규탄에 4월 27일 서울시경은 사복체포조의 폭력에 의한 사망임을 공식 발표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노태우 정권은 강경대 타살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시위진압에 나섰던 일부 전경과 백골단이 감정을 자제하지 못해 격렬해지는 시위과정에서 일어났던 우발적 사고였다"고 주장했다. 즉 노태우 정권과 지배세력은 강경대 '사건'이 궁극적으로 불법폭력시위에서 비롯된 것이며, 불법폭력시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부 전경들의 감정적인 과잉진압에 의해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사건을 축소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우발적' 사고라는 의도적 시각은 '강경대 치사사건' 가해 전경들에 대한 재판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재판 내내 피고 전경들의 변호인은 물론 검사와 판사까지 시종일관 불법폭력시위에 대해 '인내진압'을 해야 했고, 동료 전경들이 상해를 입는 상황과 자신이 시위대의 화염병으로 다칠 위험과 생명의 위협 때문에 불가피하게 과잉진압을 할 수밖에 없었지 않았느냐는 요지의 유도 질문을 계속했으며, 강경대가 화염병을 던진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경대가 맨 마지막으로 화염병을 던지고 돌아서는 순간" 경대를 검거하려 했다고 사실을 조작했다.

재판에서 강경대 타살의 진상이 축소되고 왜곡되자, 경대 아버지와 유가협 회원들은 왜곡재판을 강력하게 규탄했고, 아들을 무참히 잃은 지 두 달여 만에 아버지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1991년 7월 4일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113호 법정에서 '강경대 상해치사' 사건 피고인 5명에 대한 재판 중, 경대 아버지는 민가협회원 등 20여 명과 합세하여 "내 아들 죽인 놈 얼굴 한번 보자, 살인마 노태우 정권 시녀들이 무슨 재판이냐", "검사 조사가 조작이다" 등 고함을 질렀다. 또 방청석을 향해 "재판을 못 하게 하고 앞으로 이런 사건은 합심해서 돕기로 합시다"라고 외친 후 변호인을 밀치는 등 위 법정에서 소동한 사실로 수배됐다. 결국 아버지는 7월 11일 구속되어 징역 8월을 선고받고 1992년 3월 10일 출소했다.

"내 동생은 비겁을 몰랐습니다"
 
강경대 열사 노제 광경.
 강경대 열사 노제 광경.
ⓒ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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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의 사망을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가 선배의 조종에 이끌려 시위에 참여했다가 당한 불행한 피해자로 보는 시각이 있다. 연세대학교 김동길 교수는 서양문화사 교양 강의 중에 강경대를 직접적으로 폄하했다. 구타치사 사건에 대해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아라. 입학한 지 2개월 된 신입생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얼마나 느끼고 행동했길래 그를 열사라고 부르는가, 그는 배후조종한 선배들에 이끌려 시위 도중 도망가다가 맞아 죽은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폄하했고, 이것을 학생들이 교내 대자보로 비판하자 결국 1991년 5월 8일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러나 경대는 비록 대학 1학년으로서 더 나이가 들어 가지게 될 성숙하고 체계적인 신념체계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모순과 학원자주화와 사회민주화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자기확신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경대는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했고 책을 끼고 살다시피 책읽기를 좋아했고 사회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였다. 경대는 아버지를 통하여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들었고, 고등학교 때는 전교조 선생님을 믿고 따르며 일찍부터 사회문제와 불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머니의 증언이다.

"경대가 고등학교 때 전교조가 생겨 일요일이면 명동성당으로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가곤 했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전교조에 대해서도, 전교조에 대한 탄압이 올바르게 가르치고자 하는 선생님을 해직시키는 것인지도 몰랐어요. 경대는 전교조 선생님을 보면서 사회를 보는 눈을 뜬 것 같아요."

경대는 옳다고 생각하여 결정한 일에는 몸을 던져 행동했다. 누나의 증언이다.

"혹자는 1학년이 무엇을 안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내 동생은 비겁을 몰랐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느끼며 옳으면 어떤 식으로 옳은가를 몸으로, 가슴으로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강경대의 죽음은 우발적 타살이 아니다
  
1991년 5월 당시 살인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시위에 나선 대학생들.
 1991년 5월 당시 살인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시위에 나선 대학생들.
ⓒ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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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는 1991년 3월 22일 명지대 총학생회 진군식에 참석하여 시위 도중 학내 진입한 전투경찰의 직격 최루탄에 의해 안면에 큰 부상을 입었다. 눈이 퉁퉁 붓고 8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해야 했다. 경대가 집에 와서,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묻자 경대는 어머니가 걱정하실 것이 염려되어 그냥 넘어졌다고 했고, 어머니가 직감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느껴 재차 묻자 경대는 사실을 실토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대는 1991년 4월 26일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완전승리,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서부경찰서 진격투쟁'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동기들에게 함께 참여하자며 설득하기도 했다. 

따라서 4월 26일 학원자주화와 노태우정권 타도 집회에 참석한 경대는 자신의 의지와 신념이 아닌 선배의 조종에 의해서 우연히 참가했다가 죽음에 이른 불행한 피해자가 아니다. 경대는 자신의 신념과 의지로 참석했으며, 자신의 그 행동으로 학원과 사회와 나라가 변화되길 열망했고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너무도 상식적이어서, 때로는 그래서 도전적이고 성찰적이기도 한, 거의 던져지지 않은 물음을 던지려고 한다.

즉 시위에 나섰다가 폭력진압에 의해 쇠파이프에 맞아 죽거나 압사당해 죽은 강경대나 김귀정을 '열사'(烈士)라고 부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다. '열사'(烈士)는 절의를 굳게 지킨 사람을 말한다. 즉 열사는 옳은 것 - 이타적이거나 공공적인 가치를 위해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나, 불의에 대한 저항이나 대의를 위해 투신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강경대나 김귀정은 노태우정권에 대한 저항이나 학원자주화,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투신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으로서 '열사' 또는 '민주열사'로 정당하게 호명되어야 할 것이다. 강경대의 죽음은 우연이나 우발적 타살이 아니다. 경대는 4월 26일 학원민주화 투쟁과 노태우정권 타도를 위하여 순수한 열정과 분노로 저항하고자 했다. 이러한 젊은 청년의 순수와 열망을 야만적 공권력이 살해한 것이다.
 
범국민대책위 규탄대회에 참가한 강경대 열사 부모님. 사진 앞쪽에 고 문익환 목사님이 보인다.
 범국민대책위 규탄대회에 참가한 강경대 열사 부모님. 사진 앞쪽에 고 문익환 목사님이 보인다.
ⓒ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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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이 글을 쓴 송병헌 박사(서강대 정치학)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고, 현재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태그:#강경대, #1991년 5월 투쟁, #명지대, #노태우 정권,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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