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 관련 이미지.

영화 <자산어보> 관련 이미지.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이놈아! 질문하는 게 진짜 공부여! 벼슬하는 놈들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성리학만 외우다가 나라가 이 꼴이 난 겨!"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의 한 장면이다. 대역죄인으로 몰려 흑산도로 귀양 온 정약전(설경구)은 '자산어보' 집필에 도움을 주는 섬 청년 창대(변요한)에게 그렇게 호통친다. 양반인 아버지를 뒀지만 첩의 자식이기에 평생 천민 취급받으며 살아야 하는 게 서러워 성리학을 독학하던 창대의 고집 때문이다.

어류와 해조류를 정리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려 한 기성세대 약전은 눈과 귀를 열지 않고 과거 학문에 얽매이려는 창대가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대사 한 마디지만 여기에 아마도 감독이 2021년에 이 영화를 선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담겨 있지 않나 싶다.

개혁 정책을 추구하며 많은 인재를 사랑했고 그만큼 파격적인 인사를 강행한 정조가 죽은 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 또한 위기를 맞는다. 조선 역사에서 왕실의 기강을 흔들 수 있는 서학(천주교)을 믿는다는 게 표면적 이유지만, 그 이면엔 당시 기득권을 흔들 수 있는 정씨 형제의 개혁적 성향과 학문에 위기감을 느낀 관료들의 노골적인 공격이 있었다.

교과서 등에서 그리고 정약용의 실학과 그 정신이 현대에 들어 새삼 조명받아왔던 차에 이준익 감독은 다소 엉뚱하게 정약전을 들고 나왔다. 그것도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 서문과 본문에 이름 정도만 등장하고 마는 창대라는 청년을 함께 내세워서 말이다.

여러 종류의 갈등 

이준익 감독의 최근 5년의 행보를 보면 이해가 간다. 영화 <동주>가 시작점일 것이다. 한국 사람 다수가 아는 윤동주 시인을 제목으로 내세운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동주의 친구이자 일제에 목숨을 뺏긴 맑은 청년 송몽규였다. <박열>도 마찬가지다. 한국 최초의 무정부주의자이자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박열과 함께 그의 정신적 버팀목인 가네코 후미코를 집중 조명했다.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모든 역사적 사건엔 드러난 자와 상대적으로 가려진 자가 있다. 이준익 감독은 그 양쪽을 상징하는 인물을 동시에 내세워 관객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영화의 배경이 일제강점기기든 조선 시대든 감독은 그 시대를 살아온 양지와 음지의 인물을 대비시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류의 근본적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한 인물의 성과와 공적을 다루는 평면적인 전기 영화가 아닌, 대칭과 비교 분석을 통한 반성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큰 사건이나 전쟁사로 근대성을 찾는 건 오류인 것 같다. 개인에게 찾아야 한다. 시대와 불화를 겪었던 개인을 찾다 보면 근대성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 나타난 개인주의는 과거 국가주의에 묶이지 않으려 했던 개인성에 근거한다. 그 뿌리를 <자산어보>를 통해 찾아가려 했다." (이준익 감독)

18일 언론 시사회에서 이준익 감독이 한 말에 따르면 <자산어보>가 <동주>나 <박열>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조명받지 않은 또 다른 개인의 삶을 주목하고 이미 겉으로 드러나고 풍부하게 연구된 위인과 병치시킴으로써 각 개인마다 생동하고 있는 에너지를 포착한 셈이다.

<자산어보>는 겉으로 보면 정약전과 창대의 우정, 즉 신구 세대의 화합 내지는 협업을 다루고 있지만 좀 더 파고들면 다양한 층위의 갈등을 곳곳에 배치했다. 굳이 두 주인공만 부각해도 될 것을 정약전이 머물던 집 주인인 가거댁(이정은)과 창대의 죽마고우 복례(민도희)의 서사와 정약용(류승룡)과 그의 수제자(강기영), 그리고 창대의 아버지(김의성)의 서사까지 촘촘하게 넣어놨다.

약전은 동생과의 우애가 두텁지만 추구하는 학문의 방향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랐다. 이것은 개인 간 불화이자 투쟁이다. 창대는 자신의 신분을 한탄하며 성리학을 홀로 익혀오며 분을 쌓아왔다. 이것은 개인 내면의 불화이고 투쟁이다. 나아가 창대를 키우고 싶었던 약전은 끝내 자신을 거부하려 하는 창대의 고집에 절망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으려 한다. 세대와의 투쟁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투쟁이다. 

여성 역할에도 희망의 불씨를 심다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여러 층위의 갈등과 불화가 쌓여가며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어떤 에너지가 응축된다. <동주>와 달리 <자산어보>는 그 에너지를 어둡고 우울하게 다루지 않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코믹한 상황을 당의정으로 입혀놓았다. 상업영화 감독으로 할 수 있는 영리한 선택일 것이다. 

"나으리도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그라요. 씨만 강조하는 거 보니께 말이요. 씨가 아무리 좋으면 뭐해. 기르고 자라나는 밭이 좋아야지. 밭이 엉망이면 씨가 썩어 불고 싹도 안 나는디." 

극 중 이정은이 연기한 가거댁의 대사다. 두 남성 캐릭터가 전면에 섰고, 시대 배경의 한계로 여성 캐릭터가 상대적으로 수동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는데 <자산어보>엔 이처럼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 지점이 몇 군데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를 페미니즘성이 담겼다거나 성평등의 영화라고 정의할 순 없겠지만, 주어진 환경 내에서 나름 고르게 역할을 부여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그렇기에 <자산어보>가 다소 설명적이고 교조적인 면이 있을지라도 그 진실성은 훼손되지 않는다. 더욱이 창대 엄마로 등장한 방은진, 흑산도 주민으로 열연한 차순배, 흑산도 담당 목민관 조우진 등 우정 출연 배우 및 조연 배우들의 말맛이 좋다. 여러 면에서 균형 잡힌 상업영화 한 편이 2021년 상반기에 등장했다.

한줄평: 입에 달고도 몸에도 좋은 한 스푼의 약
평점: ★★★★(4/5) 

 
영화 <자산어보> 관련 정보

감독: 이준익
출연: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민도희, 차순배, 강기영
우정출연: 동방우, 정진영, 김의성, 방은진, 류승룡, 조우진, 최원영, 윤경호, 조승연 등
제작: (주)씨네월드
제공 및 배급: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러닝타임: 126분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1년 3월 31일
 



 
자산어보 설경구 변요한 이준익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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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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