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다쳐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외국인 선수에게 작전타임을 부른 감독이 하는 말은 고작 힘 빼서 치라는 말뿐이었다. 선수는 어떻게든 고통을 참고 계속 뛰어보려고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자 끝내 벤치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제서야 선수는 겨우 교체됐고 에이스가 빠진 팀은 고비를 넘지 못하고 아쉬운 역전패를 당했다. 여자배구 IBK기업은행과 외국인 선수 안나 라자레바의 이야기다.

27일 경북 김천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도드람 2020-2021 V리그 여자부 홈 경기에서 한국도로공사가 IBK기업은행과 접전 끝에 세트 스코어 3-2(23-25 20-25 25-21 25-20 15-13)로 짜릿한 뒤집기 승리를 따냈다. 정규리그 3경기를 남기고 도로공사는 12승 15패, 승점 39를 쌓아 한 경기를 더 치른 3위 기업은행(승점 40.13승 15패)을 추격하며 포스트시즌 막차 탑승권이 걸린 3위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라자레바의 눈물이었다. 라자레바는 이날 경기 최다인 무려 43점을 터뜨렸는데도 패배를 막지 못했다. 2세트까지 라자레바의 원맨쇼를 앞세워 기업은행이 쉽게 경기를 가져가는 듯 했다. 하지만 전반에만 27점을 쏟아부었던 라자레바가 3세트 들어 과부하가 걸린 듯 주춤하기 시작했고 허리 통증까지 호소했다. 라자레바는 경기 중간 계속해서 허리를 만지며 얼굴을 찡그렸고 스파이크나 블로킹을 할 때도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우재 기업은행 감독은 라자레바를 무려 5세트 초반까지 빼지 않았다. 경기 중반까지 세트스코어가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3-4세트에 라자레바가 체력을 안배할 시간을 줬거나 경기 출전이 가능한 몸상태인지 확인하려는 모습만 보였어도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김우재 감독은 라자레바의 몸상태를 보고도 아프면 힘빼고 공을 때리라는 지시만 반복했다. 결국 경기는 풀세트에 이르렀고 양팀이 6-6으로 맞서고 있는 가운데 몸상태가 한계에 도달한 라자레바가 끝내 눈물을 흘리자 그제서야 교체됐다. 이날 경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감독으로서 성적보다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선수보호의 기본을 무시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업은행은 5세트 라자레바가 빠진 상황에서도 국내 선수들이 분전했으나 도로공사 외국인 선수 켈시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역전패를 당했다. 결국 성적에 대한 욕심으로 선수는 선수대로 혹사시키다가 몸과 마음에 모두 상처를 입혔고, 그럼에도 경기는 경기대로 내줬다. 덩달아 감독의 리더십마저 신뢰를 잃었으니 기업은행으로서는 한 경기에 너무 많은 것을 잃은 꼴이 됐다.

김우재 감독은 2019-20시즌부터 기업은행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첫해 5위에 그친데 이어 올시즌도 봄배구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라자레바에게 공을 몰아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전술이나 대안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 사면초가에 몰려있다.

사실 라자레바를 둘러싼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내 프로배구의 특성상 외국인 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은 어느 팀이나 비슷하지만, 특히 기업은행은 지나칠 정도로 라자레바만 바라보는 전술로 '몰방 배구'라는 비판이 많았다. 라자레바의 커리어에서 이 정도로 과도한 공격부담을 짊어진 경우가 없었던 데다, 역동적인 플레이스타일상 다른 선수보다 체력소모가 더 빠를 수밖에 없다.

라자레바는 지난 9월 KOVO컵에서는 첫 경기부터 엄청난 몰방을 감당하다가 복근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한 바 있다.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을 호소했지만 감독에게 여러 번 휴식을 요청했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고백한 일도 있다.

급기야 지난해 12월 30일 GS칼텍스전에서는 태업 논란까지 나오기도 했다. 라자레바는 이날 단 2득점, 공격 성공률 11.8%에 그쳤는데, 단순히 부진한 걸 떠나 무성의하게 스파이크를 때리거나 수비에 제대로 가담하지 않는 등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주전 세터였던 조송화가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백업 선수들과의 호흡이 잘 맞지않자 평정심을 잃은 게 원인이었다. 물론 라자레바의 프로의식과 멘탈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특정 선수에게만 지나친 과부하를 강요하는 잘못된 구조에 있었다.

라자레바는 지난 20일 현대건설 전에서 풀세트 접전 끝에 패배했을 때도 역시 눈물을 흘린 바 있다. 물론 프로선수가 너무 감정적으로 자주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은 장면은 아니다. 그러나 본인이 아무리 뛰어도 성적이 나오지 않아 스트레스 또한 컸을 것으로 예상된다. 설상가상 선수를 보호하고 관리해줘야 할 감독은 최소한의 의무마저 외면했다.

프로스포츠는 결국 팬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라자레바는 올 시즌을 끝으로 한국을 떠나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훗날 라자레바에게 한국배구에서의 경험은 과연 어떤 추억으로 남게 될까. 아직도 성적에 대한 욕심에 선수 혹사나 몰방을 합리화하는 구시대적인 배구 문화가 통한다는 게 부끄럽게 여겨지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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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라자레바 여자배구 김우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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