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로 시작된 학폭 미투 논란이 12년 전 박철우-이상열 감독 사건으로 불똥이 옮겨붙는 모양새다. 한국전력 박철우는 최근 자신의 SNS에 이상열 KB손해보험 감독을 겨냥하여 "정말 피꺼솟이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이 이런것인가"라는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18일 안산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OK금융그룹과의 경기를 마친 후에는 인터뷰에서 좀더 적설적인 어조로 작심 비판을 남겼다. 박철우는 "이상열 감독님의 최근 기사를 보고 많이 힘들었다. KB손해보험 감독이 되어서 현장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도 힘들었는데, 그런 기사를 보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불쾌한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이상열 감독과 박철우의 악연은 2009년 9월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대표팀 코치와 선수 신분이었던 두 사람은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던 중 박철우가 이상열 코치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박철우의 얼굴은 피멍으로 가득했고 복부에도 상처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이상열 코치는 2년간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2011년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 운영위원으로 배구계에 돌아왔고, 이후 경기대학교 감독-SBS 해설위원을 거쳐 지난해 KB손해보험 사령탑에 오르면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박철우와 현장에서 재회하게 됐다. 선임 당시에도 일부 배구팬들 사이에서는 자격 논란이 있었지만 크게 이슈가 되지는 못했다. 이상열 감독과 박철우도 당시 사건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한동안 잊혀진 듯했던 두 사람간의 폭행 사건이 12년 만에 다시 재조명받게 된 것은 최근 배구계에 발생한 학폭 논란과 관련된 이상열 감독의 인터뷰가 도화선이 됐다. 이 감독은 지난 17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학폭논란에 대한 입장을 묻자 "어떤 일이든 대가가 있다. 인과응보가 있더라. 저는 그래서 선수들에게 사죄하는 느낌으로 한다. 조금 더 배구계 선배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다"라고 밝혔다. 

좋게 해석하면 자신도 과거에 폭행 전력이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는 배구계에 이런 일이 더 이상 발생하면 안 된다는 자성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였던 박철우의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지난날의 아픈 상처를 헤집은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박철우는 SNS를 통해 "이상열 감독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하신 분이었다. 지고 있을 때면 얼굴이 붉어져 돌아오는 선수가 허다했다. 그게 과연 한 번의 실수인가?"라고 일갈했다. 이어 "우리 어릴 때는 운동선수가 맞는 것이 당연했다. 사랑의 매도 있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 인터뷰에서 내가 한 번 해봤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말이 안 된다"라고 이 감독이 과거와 변한 게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박철우는 "(폭행사건 이후에도) 일대일로 만나서 사과를 받은 적은 전혀 없다. 사과 받고 싶어서 폭로를 한 게 아니고 앞으로 사과 안 하셔도 된다"라고 못을 박았다. 이어 "바라는 건 전혀 없다. 하지만 자신을 정당화 해 포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진정으로 그 분이 변하셨고 좋은 지도자가 됐다면 이런 감정이 남아있을까"라며 "언론에 프로배구가 나쁘게 나오는 건 싫지만, 이번에 (폭력문화는) 뿌리 뽑아야 한다"라고 자신의 작심 발언이 절대 개인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님을 강조했다.

박철우의 발언은 배구계에 또 한 번의 풍파를 예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상열 감독의 발언도 경솔했지만 박철우가 너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가뜩이나 학폭논란으로 배구계 분위기가 뒤숭숭한 상황에서 굳이 12년 전 사건까지 다시 들춰내서 논란을 키울 필요가 있었냐는 아쉬움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박철우와 이상열 감독의 개인적인 갈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바로 배구계는 물론이고 우리 체육계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지도자와 선수간의 수직적 갑을관계'야말로 폭력 문화가 만연할 수밖에 없었던 관행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서 벌어진 이재영-다영 자매나 송명근-심경섭의 학폭논란이 선수들간의 문제였다면, 박철우와 이상열 감독은 선수와 지도자간의 관계에서 벌어진 폭력이다. 박철우도 지적했듯이 현역 프로 운동선수들 세대에서는 이른바 '맞으면서 운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성장한 경우가 많고, 지도자의 폭력은 '체벌' '사랑의 매'라는 명분으로 미화되기 일쑤였다. 이는 결국 선수들도 단채생활에서 필요에 따라 폭력이라는 수단을 쓰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문제인식이 결핍되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해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던 고 최숙현 트라이애슬론 선수의 자살을 둘러싼 비극도 소속팀의 지도자와 스태프, 선배 등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악용하여 한 개인의 인권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사건이었다. 자신들이 과거 폭력의 가해자였거나 폭력 문화에 대한 문제인식이 부족한 이들이 세월이 흘러 각 체육계에서 감독이나 행정가 등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고 했을 때, 올바른 혁신을 기대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학폭 논란에서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일부 가해자의 인성적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다.

2009년 박철우가 이 감독의 폭행을 폭로했을 당시에도 여론은 들끓었지만 정작 변한 것은 없었다. 대한체육회는 폭행 지도자는 영구 퇴출시켜야한다는 권고를 배구계에 내렸지만, 정작 배구협회는 무기한 자격정지 처분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협회는 당시에 중징계를 내렸다고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시간이 흐로고 여론이 잠잠해질 만하자 슬그머니 자격정지는 해제됐고 이상열 감독은 지도자 생활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배구대표팀 감독으로서 이상열 코치의 폭행을 묵인하거나 방관했다는 지적을 받았던 김호철 감독 역시 폭행 사태 직후 경질되었지만, 훗날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했고 프로팀에서도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가해자들'과 상대팀 감독과 선수로서 코트 위에서 끊임없이 마주쳐야만 했던 '피해자' 박철우의 심경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공교롭게도 최근 학폭논란에 휩싸인 이재영-다영 자매에 내려진 징계 역시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끝날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무기한'이라는 표현 때문에 얼핏 무거운 징계처럼 보이지만, 바꿔말하면 언제든 풀릴 수 있는 솜방망이 징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논란은 결국 배구계가 스스로 자초한 업보나 다름없다. 배구계가 진정으로 학폭논란을 뿌리뽑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먼저 지난 과거부터 깨끗하게 정리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야한다. 유명한 스타 선수건 지도자건 예외가 될 수는 없고, 옛날에는 다 그랬다는 관행으로 적당히 모면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도 배구계을 둘러싼 제2, 제3의 폭로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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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열감독 박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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