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할빌리의 노래> 스틸 이미지.

영화 <할빌리의 노래> 스틸 이미지.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쇠락한 공업지역인 오하이오 주 켄터키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J.D 벤스(가브리엘 바쏘)'는 예일대 로스쿨을 다니며 여자친구 '어샤(프리도 핀토)'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취업 면접에 앞서 열린 저녁 만찬 자리에 참석한 그는 누나 '린지(헤일리 베넷)'로부터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는다. 어머니 '베브(에이미 아담스)'가 헤로인에 다시 손을 댔고, 병원에 있을 자리가 없어서 급히 그녀를 모실 장소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과의 관계를 가능한 끊고 지내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향하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조우한다. 

원작이 있는, 특히나 글로 쓰인 소설이나 에세이의 영상화는 대부분의 경우 재해석의 필요가 있다. 영상은 글자와 달리 구체적인 의미를 직접 전달하기 어렵고, 영화의 경우 러닝타임이라는 제한이 있다 보니 원작의 내용을 오롯이 포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 내용을 축약, 각색하는 작업이 원작의 구체성을 없애서는 안 된다. 이는 많은 판타지 영화들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액션이나 스펙터클에 집중한 나머지 <반지의 제왕>의 아류작으로 남은 이유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힐빌리의 노래> 역시 다르지 않다. J.D. 벤스의 동명 논픽션을 미국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려는 본래 의도보다 가정사 중심으로 풀어낸 결과 이 영화는 다른 가족 드라마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힐빌리의 노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가슴 절절한 가족 드라마를 암시한다. 명절을 맞아 고향집을 찾은 J.D는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곤경에서 구해준 뒤 한 마디씩 격려를 건네는데, 이때 카메라는 J.D의 1인칭 시점으로 '할머니(글렌 클로즈)', 엄마, 누나 등 가족들을 한 명씩 돌아가며 비춘다.

이후 오프닝은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대립하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관계를 묘사하고, J.D가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렇게 5분을 살짝 넘기는 찰나에 영화는 남은 러닝타임 동안 그가 애정과 증오가 얽히고설킨 가정사를 겪고도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가족 안에서 찾는 이유와 과정을 보여줄 예정임을 알려준다.

이후 영화는 복선대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3대에 걸친 가정사를 보여준다. 급히 고향 마을로 향해 누나와 함께 어머니를 입원시킬 병원을 찾는 J.D의 모습은 엄마와 보낸 즐거운 시간부터 엄마가 약물에 빠진 후 보인 불안 증세로 인해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크게 싸웠던 일까지의 여러 과거 에피소드와 교차된다.

그 덕분에 대학 진학을 육아와 맞바꾼 엄마의 회한, 딸의 가능성을 지지하지 못하고 그녀의 일탈도 제지하지 못한 할머니의 후회, 이를 반면교사 삼아 손자에게 사회적으로 성공할 기회를 마련하려는 할머니의 각오는 생생히 전달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일생일대의 순간 다시 한번 엄마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불만 가득하던 한 남자가 애인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게 생각한 과거와 그의 가족이 자신의 현재를 만든,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자산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을 제시한다. 

이때 <힐빌리의 노래>는 소재부터 스토리텔링 방식까지 기존 관습을 그대로 따르면서 가능한 많은 이들이 공감할만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J.D 가족의 복합적인 심리와 관계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장르 중 하나인 실화 기반의 영웅주의 드라마 구조에 맞춰지면서 안정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영화들은 주인공이 엄청난 위인은 아닐지라도 제각기 위치한 사회적 지위에 알맞은 역할을 수행하고, 시련을 이겨내며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내며 그와 같은 삶을 따르도록 관객들을 고양한다. 

이때 개인의 노력에 가족과 같은 주변 인물들의 희생과 사랑이 더해질 경우 이러한 영화들은 눈물을 자아내는 데 최적화된 작품으로 탄생한다. 이 공식이 충실히 적용된 <힐빌리의 노래>도 특별히 모난 구석 없이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는 <아폴로 13>이나 <뷰티풀 마인드>처럼 할리우드적인 영화를 제작하는데 능하다고 평가받는 론 하워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대목에서 예상 가능한 선택이다.

문제는 정형화된 스토리텔링 방식이 J.D의 인생이 품은 진가를 드러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족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의 이야기를 쫓다 보면 쉽사리 설명이 되지 않는 장면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예일대 저녁 만찬 자리다. 동기들에 비해 뒷배경이 탄탄하지 않은 J.D는 최대한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어떻게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주요 인사들과 대화를 이어가려 한다.

이때 그는 시골에 대한 편견이나 정석적이지 않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어설픈 동정과 연민을 보이는 이들의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군인으로 복무하고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과거,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여자 친구에게 어머니가 약물중독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가정사와 성장 환경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만찬 자리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는 분명 부자연스럽다. 

이는 영화의 주안점이 원작의 그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서 어설프게 원작의 주제를 드러내는 장면을 삽입했기에 촉발된 문제다. <힐빌리의 노래>는 2017년이라는 출간 시점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이다. '힐빌리 hillbilly'가 단순한 촌뜨기를 넘어 쇠락한 과거 공업 중심지인 러스벨트 지역의 가난한 백인 노동 계층을 의미하는 단어인 만큼, 그들의 노래는 자연히 절망스러운 사회 현실과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에 대한 반감을 다룰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주인공 J.D 벤스의 성공담은 그와 같은 케이스가 우연 혹은 기적에 가깝다는 점에서, 또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희망을 심어주기보다는 현실의 냉혹함을 곱씹게 만든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던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의 백인들이 좌절과 절망 속에서 약과 범죄를 비롯한 일탈에 빠져들고, 불안정한 가정환경 때문에 가난이 대물림되는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수학 시간에 필요한 계산기를 살 돈조차 구하지 못하는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에 담은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 현실적인 요소를 단순히 배경으로 삼는 데 그친다. J.D의 이야기에서 그로 대표되는 러스벨트 지역 저소득층 백인들의 절망스러운 현실은 축소한 채,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어서 더욱 다루기 쉬운 그의 가족과 관련된 에피소드만 나열하는 것이다.

바삐 움직이던 공장에 차나 인적이 없고 연기도 나지 않는 모습이나 할머니가 젊을 때만 해도 활기 넘치던 도시가 예일대에서 돌아온 J.D의 눈에는 황폐화된 모습으로 보이는 장면을 제외하면 사회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한 제도권 엘리트를 향한 그의 적대감이나 반감은 전반적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고, 영화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한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으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마틴 스코세지의 가르침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표현은 <힐빌리의 노래>가 무엇을 놓쳤는지를 정확히 알려준다. 이 영화는 분명 할리우드의 드라마 영화에서 필요한 영웅 서사, 가족애, 시련, 성공 서사와 같은 모든 재료는 갖추고 있다.

이 재료를 가장 잘 다룰 줄 아는 셰프를 모셔온 것은 덤이다. 그러나 J.D의 이야기가 발 딛고 서 있는 고유한 사회와 현실을 망각해버린 결과 그의 서사는 효과적이지만 아무런 특색이 없는 평범한 감동만 남긴다. 그렇게 이야기의 깊이가 사라진 <힐빌리의 노래>는 원작의 재해석과 원작의 영상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수박 겉핥기에 머무른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힐빌리의 노래 넷플릭스 에이미 아담스 가족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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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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