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소마> 관련 이미지.

영화 <미드소마> 관련 이미지. ⓒ (주)팝엔터테인먼트

 
아리 애스터 감독이 연출한 <미드소마>의 '호르가'는 모호한 기호들과 의식으로 신성한 백(白)의 세계를 가장한다. 9일간 밤이 찾아오지 않는 신비로운 현상 속 동화책 에서 꺼내온 듯한 '호르가'의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그 내면은 참담하게 뒤틀려있다. 마을에서 행해지는 인신공양과 각종 비정상적인 의식들을 보고 있자면 정신이 아찔해 질 지경이지만 '호르가' 주민들에게 이는 전통의 일부일 뿐 희생자들에게 악의도 원한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 영화는 호러무비에서 힐링물, 목가적 종교 영화까지 어떠한 인물에게 이입하냐에 따라 장르가 새롭게 규정된다. 보편적인 시각에서 끔찍한 하나의 사건을 이 같이 다채롭게 해석가능 했던 이유는 등장인물 간 뒤 얽혀 있는 가치관과 서로의 이해관계를 표현하는데 영화는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르의 결합 차원을 넘어 영화 내 과한 인물 간 갈등은 자칫 영화를 표류하게 만들 수 있으나 <미드소마>는 산산이 부서지는 관계를 통해 체험적 공포라는 방향성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
 
특이한 건 배경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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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드소마> 관련 이미지 ⓒ (주)팝엔터테인먼트

 
<미드소마>의 공포는 기지의 공포다. 호러물인 주제에 지나치게 밝고 화사함을 강조한 공간의 표면적 특징을 제외하고도 본 작품은 기존 영화의 문법을 상당 수 뒤엎는다. 말하자면 기존 공포영화의 경우는 흔히 사람의 이해 불가한 영역의 초자연적 존재를 중심으로 사건이 발발한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개를 보는 이로 하여금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정석으로 대부분 여긴다. 이것은 어쩌면 신선한 스토리의 구성이라는 측면을 넘어 적재적소에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여야 하는 공포장르에 있어서 필수적인 미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드소마>에서는 누가 희생자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애초 영화 자체에 깔아둔 복선을 예상하기 쉽고 이야기는 평면적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호르가'에서 미드소마 기간에는 몇 가지 따라야 할 규칙들이 있는데 이를 어긴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희생당한다. 주민들이 신성이 여기는 나무에 마크(윌 포터)는 소변을 눴다는 점과 조쉬(윌리엄 잭슨 하퍼)는 예언서를 연구 목적으로 몰래 훔치려했다는 점으로 복선이 완성되었고 크리스티안(잭 레이너)은 종마 역할을 수행 후 버려질 것임이 연속해서 암시됐다. 더욱이 영화의 가장 처음 등장하는 그림에는 대략적인 영화 줄거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암시하는 내용을 담아 보여주니 영화의 이러한 특징은 노골적이라고 볼 수 있다.
 
상황이 주는 공포
 
 영화 <미드소마> 관련 이미지.

영화 <미드소마> 관련 이미지. ⓒ (주)팝엔터테인먼트

 
그렇다면 영화는 무섭지 않은가? 기존 공포영화를 염두 해 두고 관람한다면 실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듯한 점프스케어가 등장하는 부분은 총 2번뿐이며 초반 몇 몇 지점에는 개그 요소마저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드소마>는 일반적인 공포영화가 줄 수 없는 극도의 불쾌감을 선사한다. 부모님이 잠든 사이 우울증에 빠진 동생이 가스로 집단 자살에 성공해 졸지에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대니(플로렌스 뷰)의 상황은 그 전제부터 충격적이다.

게다가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은 어떻게 적절히 그녀에게 이별을 고해야할지 고민 중인 상황이며 친구인 조쉬와 마크는 대니가 예민하다며 헐뜯는다. 대니 또한 자신과 남자친구 그리고 주변사람들과의 유대감은 이미 예전에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런 관계라도 절실하다. 옆에서 누군가 위로가 되어줄 사람이 대니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 호르가의 의식에 한 명 한 명 동료들이 희생당하더라도 대니는 적극적인 반항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호르가 주민들이 대니를 위로해주고 이해한다는 태도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대니일행을 마을로 초대한 친구 중 한 명인 펠레(빌헬름 브롬그램)는 자신의 부모님이 죽었을 때 호르가 주민들이 자신의 가족이 되어줬다며 그녀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며 미드소마를 끝마치길 권장한다. 매우 예민한 부분을 섣부르게 위로한 좋지 못한 방법이나 동질감을 가진 이의 부탁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니는 쉽게 마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외에도 호르가의 주민들은 대니의 진정한 가족행세를 하고 그녀의 아픔을 보듬는 듯 보이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유대감은 모두 허울이다. 이는 마지막 희생자들과 더불어 제물로 산채로 태워질 호르가의 젊은 남성 두 명이 불 속에서 고통스러워 할 때 이도 축제의 일부인양 즐겁게 따라하는 주민들을 통해 폭로된다.

사실은 마을 주민조차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니는 마지막 미소를 짓는다. 허울뿐이라도 새로운 가족들이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말이다. 비이성적 광기로 점철되어 있는 집단에 서서히 동화되어 갈 수밖에 없는 대니를 관객들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대니가 '호르가'를 뛰쳐나가더라도 그녀의 상실과 아픔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사실을 관객 또한 알고 있으니 영화의 개연성을 탓할 수도 없다. 이러한 영리한 설정 덕에 영화는 천천히 그리고 세밀하게 끔찍하고 기괴한 의식들을 나열한다. 관객들은 상황에 대한 불쾌함을 호소하면서도 영화의 완성도를 비난할 수 없다. <미드소마>의 공포는 그 전제로부터 비롯돼 관객을 죄여오기 때문이다.
아리 애스터 미드소마 공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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