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나이트> 포스터.

영화 <그린나이트> 포스터. ⓒ (주)팝엔터테인먼트

 
반지의 제왕의 저자로 잘 알려진 j.r.r 톨킨의 작품 <가웨인경과 녹색의 기사>가 영화로 재탄생했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는 장면과 장면의 긴밀한 예술적 전환, 시비로운 배경, 빼곡한 상징들로 수 놓은 장인의 수공예품 같은 작품이다. 감독의 전작과 같이 상업적 영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본 영화는 일반적인 판타지 블록버스터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들은 실망할 수도 있지만, 관람의 시각을 달리하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이다.

그림형제의 동화나 이솝우화 같은 옛 동화들이 그 큰 틀을 두고 재해석을 거쳐 현대적인 작품이 되는 것처럼 <그린 나이트> 또한 그 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범람하는 거대 프랜차이즈의 입김은 전혀 닿지 않은 본 영화의 모습은 장르의 볼거리와 쾌감을 뒤로하더라도 그 분위기만으로 압도적이다. 단순한 동화를 넘어 기사의 명예, 자연의 신비, 인간 존재의 이유 같은 근간을 뒤흔드는 메시지는 도발적이고 황홀하기 그지없다.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녹기사
 
영화를 보기 전, 일단 원작에 대한 배경지식의 유무의 차이가 클 것이라고 본다. 영화는 얼핏 원작을 존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방향과 해석으로 관객을 몰고 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 모든 장면마다 그 의미를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고 모호하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장면 하나하나가 소모적으로 사용되는 특정한 장면으로의 귀결을 위한 과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이 영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든다. 환상적인 연출과 기교가 뒤섞인 장면의 전환, 으스스하고 불안한 배경, 서사시를 읊는 듯한 인물의 대사를 받아들여 영화 속으로 뛰어들 때 비로소 감상이 가능해질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가웨인(데브 파텔)은 아서왕의 조카로 가시의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무용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아서왕은 자신의 조카를 옆에 앉히며 그의 이야기를 듣길 원했지만 가웨인은 방탕하고 철부지 같은 생활을 하기에 이렇다 할 얘깃거리를 들려주지 못한다. 그렇게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성내가 어두워지더니 거대한 도끼를 든 녹색의 기사가 나타나 서로의 일격을 주고받을 크리스마스 게임을 제안한다. 녹색의 기사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기사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자 가웨인은 용감히 녹기사의 게임에 응하고 그의 머리를 단칼에 잘라낸다. 그러나 녹기사는 초연히 잘린 그의 머리를 들고 일 년 뒤 녹색의 예배당에서 가웨인에게 자신의 일격을 받으러 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 이후 약속을 지킬지 고뇌하던 가웨인은 기사의 명예를 위해 여행길에 오르기로 마음 먹는다.
 
가웨인은 무엇을 얻어냈는가?
 
 영화 <그린나이트> 스틸이미지.

영화 <그린나이트> 스틸이미지. ⓒ (주)팝엔터테인먼트

 
초인적인 인물이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의 죽음을 미리 상정한 본 이야기는 역경을 다소 건조하게 제시하며 가웨인의 실패를 연속해서 보여준다. 그 속에서 묘사된 가웨인의 내적인 변화와 심경묘사는 14세기 말 뭉뚱그려져 있는 서사시의 공란을 채우며 가웨인에 관객이 이입하도록 만들어준다.

연정과 욕심, 생존 욕구와 책임감 같은 다분히 평범한 인간이 느끼는 갈등 속에서 고민하는 가웨인의 모습은 나약하기 그지없다. 영화는 헛간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한심한 인간에서, 새롭게 변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을 겪으면서 마음이 수시로 꺾이는 가웨인의 모습을 섬세하며 강렬한 몸짓과 표정으로 표현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시공간의 전환이 잦고 빠른 만큼 영화는 가웨인 이외에 인물을 집중적으로 담아내지는 못한다.

이는 원작에 명시되어 있는 아서왕 같은 유명 인물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와도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작품 바깥의 정보로 인해 영화의 몰입도가 깨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 영화는 온전히 가웨인이 녹색 예배당으로 가는 여정에 집중할 수 있다, 마녀 모건 르 페이 이름을 지우고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와 멀찍이 떨어졌을 때 비로소 영화는 원작과 분리되어 본연의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영화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삶과 죽음의 기로에선 한 인간의 고뇌를 그리는 것처럼도 보이고 어찌 보면 원작처럼 기사도의 명예란 사실 허울뿐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가웨인의 성찰과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벗어나 영화의 수수께끼 같은 대사와 의미심장한 녹기사의 정체에 집중해 본다면 데이빗 로워리 감독이 이 14세기 서사극을 재해석하며 전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난다.

버틸락 부인은 왜 녹기사가 하필이면 녹색인지에 대해 가웨인에게 물었고 가웨인은 분명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크리스마스 게임에서 녹기사의 목을 벤 것은 자신의 의지였고 지금 그 대가를 위한 여정도 자신의 의지임에도 녹기사가 부당한 듯이 말한다. 가웨인은 필멸과 문명의 대표이자 욕망을 추구하며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류의 표상이다. 초인적인 긍지나 능력을 지니지 않았기에 선택과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에 망설이며 때로는 비겁해지기도 선함을 베풀기도 한다.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녹기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녹기사는 이와는 반대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이자 재생, 자연 그 자체이다. 죽지 않는 자연의 존재이므로 가웨인은 강대한 힘을 가진 녹기사에게 부당함을 느끼고 험담을 하면서도 경외하며 또 두려워 한다. 마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 듯 굴지만 막상 그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가웨인이 녹기사와의 재회에서 그 칼날을 피하고 승리하는 영웅담이 아니다. 죽음을 속이기 위해 차고 있던 허리띠도 약속을 어기고 다시금 집으로 향하라는 여우의 속삭임도 결국 한낱 눈속임에 불과할 뿐 그를 진정한 기사로 만들어줄 수 없다.

가웨인의 마지막 선택은 그렇기에 큰 의미를 지닌다. 영화에서 가웨인과 버틸락의 성주는 녹색의 예배당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갑자기 기사로 변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이 행동은 옳은 답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태동 없이 끌려다니듯 선택하던 가웨인은 스스로 처음 용기 내 내린 결단으로 불멸의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었다. 가웨인을 죽이기 직전 녹기사의 모습이 그토록 인자해 보이던 이유와 그 긴 시간 가웨인의 실패의 여정이 온갖 몽환적인 환상과 초자연적인 사건들로 치장된 이유는 그 한 발자국 나아감이 어렵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취업 포트폴리오를 위해 영화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린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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