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소더스> 스틸 컷

영화 <엑소더스> 스틸 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이 배우가 아역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사실은 그리 유명하지 않다. 열세살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에서 주연을 맡았다. 영국인이지만 미국인으로 의심받을 만큼 억양을 완벽히 구사하며 201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아내는 <작은 아씨들>에 함께 출연했던 위노나 라이더의 전 개인비서 시비 블라직이다. 그의 외모에는 호불호가 없다. 극단적인 체형변화나 덥수룩한 수염의 유무마저 그의 잘생김과 깊이 파인 눈에 담긴 영혼과 무게감에 영향을 줄 수 없으니. 오, 크리스찬 베일의 이야기다.
 
그를 처음 본 건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였다. 대학교 교양시간에 다른 학생들의 머리 사이로 간신히 봤던 기억이 난다.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주인공이 힘을 회복해 자신이 있을 곳으로 향한다는 서사구성은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와 닮았고 구약 성서 한 챕터의 표지를 제목으로 한 일종의 히어로물이었다. 모세스(크리스천 베일)가 역경을 이겨내고 이집트의 노예들을 이끄는 모습은 막시무스의 콜로세움 격투보다 처절했고 파도에 맞서 람세스와 격돌하는 장면은 막시무스가 코모두스와 칼을 맞대는 장면보다 치열했다. 이는 명백히 <글래디에이터>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두 영화의 감독이 모두 리들리 스콧 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하다.
 
크리스찬 베일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는 건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는 당연히 명작 아니냐며 <배트맨> 트릴로지를 눈 앞에 들이댈 수도 있고 연기를 향한 이 배우의 육체노동을 기억하라며 <머시니스트>를 내놓을 수도 있다. 모두 재밌고 좋은 작품이기에 이런 질문은 언제나 곤란하다. 하지만 그가 나온 영화들 중에서 단 한편만 지인과 같이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답은 쉬워진다. 나는 곧바로 <아웃 오브 더 퍼니스>를 고를 것이다.
 
스콧 쿠퍼 감독의 <아웃 오브 더 퍼니스>는 서사구조가 뚜렷한 영화다. 너무 뻔해서가 아니라 인물의 설정과 갈등관계, 주변인들이 태도가 뚜렷하고 장소와 조명의 배치의도가 명확해 영화의 흐름을 예측하면서 전 장면을 되감아 생각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마치 도로를 주행하다 종반부라는 빨간불 앞에 잠시 정차한 우리에게 이 영화의 결말은 예측 가능하지 않고 다소 흐릿하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생각에 잠기게 한다.
 
러셀은 공장의 용광로에서 일한다. 아버지부터 이어져 온 일종의 가업이다. 동생 로드니는 이라크 파병 군인이다. 형제의 우애는 든든하고 뜨겁다. 러셀은 아픈 아버지와 일종의 도박병에 걸린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사랑하는 애인과의 미래를 그린다. 어느 날 러셀이 교차로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후 많은 일이 발생한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 출소 이후 로드니가 길거리 맨주먹 격투판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애인의 변심을 차례로 접한다. 러셀은 무너지지 않는다. 슬픔에 잠식되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심한다. 그러던 중 일하던 공장이 문을 닫을 거라는 소식과 함께 로드니가 실종된다.
  
 영화 <아웃 오브 더 퍼니스> 스틸 컷.

영화 <아웃 오브 더 퍼니스> 스틸 컷. ⓒ (주)누리픽쳐스

 
<아웃 오브 더 퍼니스>는 장소와 조명(빛)의 밝기, 동시간을 교차편집해 긴장감을 높인다. 뚜렷하면서 영리한 전략이다. 먼저 러셀이 삼촌과 숲 속으로 사냥을 나가는 장면은 로드니가 존 페니와 산 속 맨주먹 싸움 장소에 찾아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러셀이 사슴에게 총을 겨누다가 거두는 장면은 로드니가 싸움에서 구타당하는 장면과 대조된다. 삼촌이 사냥한 사슴의 피를 빼고 해체하는 장면은 할란에게 존 페니와 로드니가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러셀과 데그로트가 존 페니의 어두운 사무실 안 붉은 조명 아래 처음 마주한 채 가벼운 시비를 나누는 장면조차 며칠 뒤 러셀이 데그로트를 사냥하는 아침과 대조된다.
 
러셀의 평범했던 나날은 용광로의 운명처럼 식어간다. 로드니가 애팔래치아 산맥의 맨주먹 시험에 나갔다는 사실, 동생의 출전을 계획했던 존 페니가 살해당했다는 사실, '라마포'라는 조직이 수세기 동안 해당 지역에서 악명을 떨쳤다는 사실, 그래서 지역의 주민들과 경찰들조차 그들의 동조자라는 사실, 그 중 우두머리 할란 데그로트라는 자가 존 페니를 죽인 범인이며 동생의 실종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접한다. 하지만 러셀은 슬퍼하지 않는다. 슬퍼할 겨를이 때문이다. 그는 데그로트를 사냥하기로 결심한다.
 
용광로는 단 십일만 정지되어도 재가동되는데 수개월이 걸린다. 결심이 결단으로 이어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 훗날 결심을 다시 예열하는 데 걸리는 시간처럼. 러셀은 자신의 결심이 힘을 잃도록 두지 않는다. 경찰도, 주위의 지인들도, 하물며 신조차 믿지 못하는 상황 아래 할란 데그로트를 사냥하는 데 머뭇거림은 필요없다. 이전에는 사슴에게서 총구를 내렸으나 이번에는 다르리라. 데그로트를 추적 중 폐건물 철근 사이로 아침이 왔음을 확인하고 러셀은 결단을 내린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뒤늦게 도착한 경찰은 총상을 입고 기진맥진한 데그로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고 있는 러셀을 만류한다. 경찰이 처리할 테니 제발 그 총 내리라고 한다. 이미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살인 전과가 있는 러셀이다. 교차로에서 차량이 갑자기 튀어나왔지만 그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러셀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책임졌기에 교도소에 다녀왔다. 만약 러셀이 데그로트를 살해한다면 그의 앞날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러셀도, 러셀의 지인인 경찰도 그것을 안다. 러셀은 잠시 숨을 고른다. 하늘을 보니 낮이 지나고 저녁이 오고 있다. 러셀은 곧바로 데그로트를 총으로 쏴 죽여버린다.
  
 영화 <아웃 오브 더 퍼니스> 스틸 컷.

영화 <아웃 오브 더 퍼니스> 스틸 컷. ⓒ (주)누리픽쳐스

 
누군가는 러셀이 앞으로 불행해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인 아버지와 동생은 죽었고 애인마저 다른 남자의 아이를 품었다. 일하던 공장은 폐쇄를 앞두고 있다. 그렇기에 또 다시 사람을 죽인 러셀의 선택을 어리석다고 여기거나 이제 그의 인생은 끝났다며 혀를 찰 수도 있다. 혹은 차라리 경찰에 넘기고 남은 자신의 삶을 최대한 행복하게 누릴 순 없었겠냐고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출소 이후 자신이 사고를 낸 장소에 꽃을 들고 간 러셀처럼,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할 줄 알고 인간으로써 양심의 온도가 식지 않은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기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깜냥을 책임지려 한다. 그것이 다섯 시간이나 다섯 시간 반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요구하더라도 말이다. 난 러셀이 용광로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복수와 책임의 결단을 내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앞날이 흐리거나 차가워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책임질 건 책임지고 반성하며 결단력 있는 그의 태도에 안심했다. 난 이 캐릭터를 언제나 응원할 것이다.
영화리뷰 아웃오브더퍼니스 크리스찬베일 케이시애플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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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합니다.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잘 쓰진 못합니다. 대신 잘 쓰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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