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용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의 새로운 행선지는 인도네시아였다. 신 감독은 최근 인도네시아 축구협회와의 4년 계약을 맺었다. '신태용 사단'으로 알려진 김해운 골키퍼 코치와 이재홍 피지컬 코치도 동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신 감독은 한국축구와 K리그에 큰 족적을 남긴 살아있는 전설이다. 현역 시절 성남 일화 천마(현 성남FC)의 레전드로 K리그 최초의 60-60(득점-도움) 클럽에 가입했으며, 통산 401경기 99득점 68도움으로 공격수를 제외한 미드필더로는 K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이기도 하다.

지도자로서도 눈부신 성과를 냈다. 친정팀 성남의 지휘봉을 잡아 2010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 2011년 FA컵 우승을 이뤄냈다. 2014년부터는 대표팀으로 자리를 옮겨 2016 리우올림픽 8강, 2017 U20 월드컵 16강 등의 성과를 냈으며, A대표팀 지휘봉을 잡고서 2018 러시아월드컵 9회연속 본선진출과 '카잔의 기적'(월드컵 본선 독일전 첫 승)을 이뤄내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아시아의 지도자를 통틀어서도 클럽과 대표팀에서 동시에 신 감독만큼의 성과를 낸 인물은 드물다.

 
러시아월드컵 소감 밝히는 신태용 감독 러시아월드컵에서 세계 1위 독일팀을 2대 0으로 이겼으나, 16강 진출에는 실패한 축구대표팀이 2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해 해단식을 가졌다. 신태용 감독이 소감을 밝히고 있다.

러시아월드컵에서 세계 1위 독일팀을 2대 0으로 이겼으나, 16강 진출에는 실패한 이후 기자회견을 가진 신태용 당시 국가대표 감독. ⓒ 권우성

 
하지만 대표팀 지도자 시절은 신 감독에게는 '짧은 영광과 긴 상처'로 요약된다. 신 감독은 연령대별 대표팀(U23, U20)에서 A팀까지 '3연속 소방수' 투입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만큼 한국축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원투수로 투입되어 단기간에 팀을 재건하려 했고 나름의 성과도 남겼지만 평가는 늘 박했다. 일부 팬들은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신 감독을 손가락질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급할 때마다 신태용을 불러들여 돌려막기에 급급했던 축구협회는 정작 월드컵이 끝난 후에는 신 감독과 재계약은 커녕, 외국인 감독 영입 실패를 대비한 보험용으로 방치하다가 파울루 벤투 감독의 영입이 확정되면서 사실상 토사구팽했다.

신 감독은 퇴임 기자회견을 열었던 홍명보(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처럼 작별인사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쓸쓸하게 밀려나야 했다. 벤투호가 지난 2019 아시안컵에서 8강이라는 초라한 성적에 그치며 만일 신태용 체제를 계속 이어갔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운 상상을 하는 팬들도 많았다.

신 감독은 대표팀에서 물러난 직후 약 1년여간 강제 휴식을 가졌다. 그간 클럽과 대표팀에서 보여준 각종 성과와 능력을 감안할 때 빨리 현장으로 돌아올 듯했지만 의외로 재야에 머문 기간이 길어졌다. 신 감독은 2020년 현장 복귀를 목표로 클럽과 대표팀 중 여러 곳 제의를 신중하게 검토한 끝에 결국 인도네시아행을 선택했다.

냉정히 말하면 희망과 우려가 교차하는 선택이다. 동남아는 세계축구의 변방인데다 인도네시아는 2019년 12월 기준 피파랭킹이 173위에 불과한 약체팀이다. 신 감독의 선례로 비교대상이 되고 있는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축구대표팀을 처음 맡았을 때의 피파랭킹(112위, 현 94위)보다도 더 낮다.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명장으로서 ACL과 올림픽, 월드컵같은 큰 무대를 두루 경험한 감독의 차기 행선지로는 조금 격이 맞지않는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박항서 감독과는 상황이 분명히 다르다. 박 감독은 베트남을 맡기 전까지 국내무대에서 '한물간 지도자'로 여겨지며 커리어의 하향세를 겪고있었다. 만일 베트남에 가지 않았다면 평범한 지도자로서 잊혀졌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베트남행은 박 감독에게도 베트남 축구협회에게도 일종의 도박이었지만,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인생역전'에 가까운 대성공을 일궈내며 지도자 인생의 뒤늦은 전성기를 열었다.

반면 신 감독은 K리그 복귀나 중국리그 진출같은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특히 중국 갑급리그 선전FC가 신 감독 영입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감독이 몸값을 우선순위로 생각했다면 당연히 중국을 선택했을 것이다. 몸값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올겨울 K리그에도 감독직이 공석이 된 구단은 여럿 있었다.

장기적인 지도자 커리어를 생각할 때 아직 나이로 50세로 젊은 편인데다, 지금 시점에서 아시아 축구의 주류를 떠나 굳이 변방까지 가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물론 신 감독이 인도네시아에서 '제2의 박항서'로 거듭나는 장및빛 시나리오도 있다. 지도자로서 신 감독의 최대 장점은 주어진 자원과 조건 안에서 어떻게든 대안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성남에서의 우승도 지휘봉을 잡은 초창기에 이뤄낸 성과였고, 월드컵에서는 김민재, 이근호, 권창훈 등 핵심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을 당하며 플랜A가 붕괴된 상황에서도 빠르게 팀을 정비해내는 대처능력을 보여줬다. 적어도 충분한 시간과 기회만 주어진다면 결과로서 증명해내는 지도자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박항서 감독이 이끌고 있는 베트남과는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G조에 함께 속해 있어서 신 감독과 내년 6월 4일 베트남 원정에서 맞대결을 펼칠 수 있다. 5경기를 치른 현재 베트남(3승2무·승점 11)은 무패 행진을 달리며 조 선두에 올라 있는 반면, 인도네시아(5패)는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최하위다. K리그에서는 신감독이 성남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때 전남과 상주 사령탑으로 자주 만났고, 상대 전적은 8승1무1패로 신 감독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서 성공신화를 개척한 이후, 많은 축구팬들이 왜 박 감독같은 인재를 정작 한국에 있을때는 알아보지 못했냐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국내에도 충분히 능력은 있지만 박 감독 같이 과소평가 받거나 잊힌 지도자들은 적지않을 것이다.

신 감독 역시 한국축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한국축구에 헌신하고도 그에 걸맞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결국 해외에 떠나보낸 현실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신 감독이 A대표팀에서 머문 시간은 1년 남짓에 불과했지만 코치와 연령대별 대표팀 감독 시절까지 포함하면 신 감독이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는 언젠가 한국축구를 위하여 다시 귀하게 쓰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박항서 감독처럼 신태용 감독에게도 인도네시아행이 지도자로서의 재도약 발판이 되기를 많은 축구팬들이 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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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인도네시아 박항서 인니피파랭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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