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아카데미 시상식'이 오는 24일(한국시각) 열린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영화 잔치지만, 전세계 영화 산업의 대표작을 총망라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자리인 만큼 그 귀추가 주목된다. 특히 올해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보헤미안 랩소디>가 각 부분 후보에 올라 더욱 관심이 뜨겁다. 하지만 <보헤미안 랩소디>만이 아니다. 2월 21일 개봉한 <더 페리버릿 : 여왕의 여자(이하 더 페이버릿)>은 작품상과 여주 주, 조연상에 후보를 지명받으며 주목을 받고 있다. 

요즘 TV조선에서 방영 중인 <바벨>은 '격정 멜로'를 표방하며 기존의 멜로와 차별성을 어필한다. 드라마가 주장하는 '격정'은 재벌가 거산을 대항하여 싸우는 검사가 '격정'에 휘말려 거산가 아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겪는 딜레마다. 하지만 이미 '검사'의 사랑은 드러났지만, 재벌가를 향한 그의 도전적 욕망은 모호하다. 드라마로 와서  자충수가 되어버린 '격정', 그 표본이 바로 영화 <더 페이버릿> 아닐까? 

영화 속 배경은 18세기 영국이다. 앤 여왕과 사라 처칠, 애비게일 매셤 등 당시 실존했던 인물을 기반으로 각본가 데보라 데이비스가 무려 20여년 전 쓴 초고가 바탕이 됐다. 이를 <더 랍스터>로 2015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작가 토니 맥나마라가 4년여에 걸쳐 각색한 끝에 <더 페이버릿>을 탄생시켰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의 시대를 열었던 여왕 앤(올리비아 콜먼 분), 하지만 그녀의 삶, 그녀의 통치 시대는 격동 그 자체였다. 명예 혁명으로 왕좌를 잃은 제임스 2세를 아버지로 둔 그녀는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다. 형부였던 윌리엄에 이어 왕좌를 이어받아 여왕이 된 앤, 덴마크 왕자였던 남편과의 사이에서 19명의 아이를 가졌지만 모두 사산되거나, 어린 나이에 병사하고 말았다. 거기에 영화 속에서 등장하듯이 통풍을 비롯하여 각종 병으로 고생하던 그녀는 겉으론 '여왕'이었지만 개인적인 삶은 신산스러웠다. 

명예 혁명 이후 정가에선 본격적으로 의회 정치가 시작됐다. 당시는 지주들을 대변하는 보수당의 전신 토리당과 귀족들을 대변하는 휘그당의 대결이 치열하던 때였다. 앤 여왕은 재위 기간 내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치르는 등 안팍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여생을 보내야 했다. 

영화는 바로 이렇게 개인적으로는 행복하지 않았던, 그리고 왕으로써는 끊임없이 통치력을 시험받아야 했던 여왕 앤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그런 여왕의 삶에 동반자였던 한 여인이 있다. 18세기의 '철의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리는 사람, 사라 처칠.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고 유약했던 앤 여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녀는 앤의 의지처이자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었던 여인이었다. 말버러 장군과 결혼하여 말버러 부인이 돼 영국 정계의 실력자가 된 그녀에게 여왕은 '궁전'을 지어 선물할 정도였다. 

이렇게 외관상으로는 앤 여왕이, 하지만 실질적 결정권은 사라 처칠(레이첼 와이즈 분)이 가진 듯한 영국이 <더 페이버릿>의 역사적 배경이다. 사라는 말러버 장군이 참전한 전쟁에서 당연히 남편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지주들의 토지세 등을 더 올려 전쟁 자금을 늘리려 한다. 거기에 토리당, 특히 로버트 할리는 반발하지만, 그런 그와 토리 당의 반발이 여왕에게 전해지기에는 사라가 쳐놓은 벽이 높다. 그런데 그 벽에 틈을 만들어 줄 한 인물이 등장한다. 

앤 여왕을 둘러싼 두 여인의 격정 멜로

   
영화의 시작은 여왕을 등에 업고 정가를 좌지우지하는 사라의 활약을 뒤로 하고 마차를 타고 사라의 저택에 등장한 애비게일(엠마 스톤 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귀족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그 아버지의 노름 빚에 팔려가는 수모를 겪었던 파산한 귀족 가문의 딸. 이제 그녀는 '하녀' 자리라도 마다하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애비게일은 부엌에서 하녀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양잿물에 손을 넣는 시련을 겪는다.

다친 손을 치료하기 위해 들에 약초를 캐러 갔던 애비게일은 통풍으로 고생하는 앤 여왕을 위해 약초를 따오고, 거짓말도 서슴지 않으며 여왕에게 접근한다. 우연히 사라와 여왕의 '밀애'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때론 심하다 싶을 만큼 직설을 퍼부으며 앤 여왕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라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선택한다. 애비게일은 달콘한 감언이설은 물론 당돌한 밀애에까지 도전하며 여왕을 사로잡기 위해 저돌적으로 앞으로 향한다.

여왕을 등에 업고 권력마저 좌지우지 하는 한 여성, 거기에 그 여성을 반면교사로 삼아 또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여성, 그리고 그 두 여성의 구애와 욕망을 즐기며 이용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여왕까지. 이들의 권력을 둘러싼 궁전 '격정 멜로'는 우리가 궁중 사극에서 종종 만났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거기에 전쟁 자금을 둘러싼 토리당과 휘그당의 의회 격돌과 이들과 맞물린 사라와 애비게일의 다른 이해 관계, 그리고 그저 여왕의 총애가 아니라 사랑 그 이상의 권력을 원하는 두 여성의 모습은 <더 페이버릿>을 그저 그런 궁중비사와 비교할 수 없게 만든다. 영화는 치열한 권력과 욕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적나라하고 치밀하게 그려낸다. 탁월한 배우들의 연기와 내용은 작품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려놓았다. 
    
독재에 대한 통렬한 우화를 통해 그리스 상황을 비판한 작품 <송곳니>로 2009년 스톡홀름 국제 영화상을 받은 이후 <랍스터>, <킬링 디어>로 인간 사회와 욕망의 이중주를 잘 그려낸 요르고스 란티고스 감독은 '격정'의 세 사람의 관계를 적나라하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그려냈다. 인간의 욕망을 사랑 그 이상의 것으로 표출해 냄으로써 '궁중 비사', 특히 역사 속 여성에 대한 해석에서 확장된 시선을 보여준다. 

특히 유약하지만 결코 무력하지 않았던, 그러나 행복하지도 않았던 앤 여왕의 올리비아 콜먼, 여장부로서의 당당함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드러낸 레이첼 와이즈, 그리고 <라라랜드> 속 사랑스러운 푸른 눈을 벗어나, 욕망을 제대로 드러내 준 엠마 스톤의 연기야 말로 <더 페이버릿>을 가능케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