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가 한창 꽃피우기 시작하던 1990년대에 나는 20대를 보냈다. 20대가 되기 전에는 영화라고는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보았던 몇 편이 전부였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서 TV조차도 별로 볼 일이 없었는데, 아주 어렸을 때는 TV가 없어서 그랬고, 좀 자라서는 TV보다는 혼자서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했다. 여고생 때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제주시 중앙로에 있던 극장에서 봤던 <작은 신의 아이들> 같은 몇 편의 영화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1991년에 대학생이 되어, 나에게 호감을 품었던 선배와 같이 대한극장에서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봤다. "손을 잡아도 되니?"라고 망설이며 묻던 선배에게 "아뇨"라고 대답해서, 영화가 끝나고 어색하게 헤어진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혼자 극장을 다니는 것이 편하고 좋아지게 되었다. 좋은 영화를 만나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1990년대 들어 영화 산업의 붐과 함께 태동한 예술영화 전용 극장들 덕분이었다.

'독립영화는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편견 깨주는 작품

혜화동에 있던 하이퍼텍 나다와 종로1가에 있던 코아아트홀을 다니던 내게, 세월이 더 흐르며 갈 수 있는 예술영화관도 변천해 왔다. 지금은 종로 3가의 서울아트시네마, 광화문의 씨네큐브, 이수역 아트나인, 또 이대의 아트하우스 모모를 즐겨 다닌다. 이런 극장에서 나는 온전히 영화 속으로 빠져든다.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울고 웃는다. 영화산업에서 자본의 논리가 더욱 중요해진 시대에, 이런 극장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런 극장들이 있기에, 독립영화들이 관객을 만날 기회를 얻고, 작품성이 뛰어난 해외 영화들을 만날 수 있으며, 수많은 씨네 키드들이 영화를 향한 꿈을 키워 왔다. 그렇게 1990년대에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 중에는 영화를 업으로 삼겠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지금도 가까운 친구들이 더러 몸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국 영화산업에 예술영화전용관이 해준 기여가 아주 크다고 믿는다.

<너와 극장에서> 포스터 <너와 극장에서> 영화 포스터

▲ <너와 극장에서> 포스터 <너와 극장에서> 영화 포스터 ⓒ 서울독립영화제


바로 그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독립영화 <너와 극장에서> 시사회를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첫 선을 보였다. 세 편의 영화가 극장을 매개로 옴니버스로 구성된 영화로 아주 재기발랄 하기 그지없다. 극장이라는 소재만 같은데, 다루는 주제와 내용은 다양하고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구사하기에 흥미롭다.

독립영화들은 난해하거나 지루할 거란 선입견을 어느 정도 갖게 된다. 상업영화의 반대편에 있으니, 관객의 재미와 만족보다는 감독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풀어가는 것이 아니겠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선입견을 여지 없이 깼다. 세 편 모두 관통하는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코믹한 상황, 또 재치 있는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계의 주목 받는 감독들의 콜라보레이션이다. 서울독립영화제는 2009년부터 재능 있는 신인 감독 발굴을 위해 '독립영화 차기작 프로젝트: 인디트라이앵글'이라는 지원 프로젝트를 해왔다. <너와 극장에서>는 이 프로젝트의 다섯 번째 결실이다. 극장이라는 공통의 소재를 가지고 각기 다른 스타일과 매력을 뽐내는 이 영화는 각 감독들의 재능이 잘 드러난다.

유쾌한 웃음 주는 <너와 극장에서>, 예술영화전용관들에 바치는 헌사

극장 쪽으로  episode 1 <극장 쪽으로> 속 장면. 극장에 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

▲ 극장 쪽으로 episode 1 <극장 쪽으로> 속 장면. 극장에 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 ⓒ 서울독립영화제


에피소드1 '극장 쪽으로'(연출 유지영)는 직장 때문에 지방도시로 이사한 파견직 여성의 지루한 일상에서 시작된다. 기업체 리셉셔니스트로 일하는 주인공이 어느 날 극장에서 만나자는 익명의 쪽지를 받게 된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극장을 찾아간 그녀.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에피소드1을 보면서,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사는 여자에게 십분 공감이 갔다. 나는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역시 지방도시에 있는 기업에 취업한 적이 있다. 방을 하나 얻고 산업단지 내에 있는 회사로 출퇴근을 했다. 막 조성된 산업단지 내에는 회사 건물들만 덩그러이 있었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늘 혼자였다.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서울로 내쳐 올라왔다. 참 젊은 나이임에도 일상이 그렇게 무료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극장에서 한 생각 episode 1 <극장에서 한 생각>의 한 장면. GV 진행 중인 감독과 사회자

▲ 극장에서 한 생각 episode 1 <극장에서 한 생각>의 한 장면. GV 진행 중인 감독과 사회자 ⓒ 서울독립영화제


에피소드2 '극장에서 한 생각'(연출 정가영)을 보면, 극장을 들락거린 영화 애호가들은 많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 영화 상영 후 GV(관객과의 대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나도 종종 GV에 참석한 적이 있어서 그 분위기를 아는데, 실감나게 잘 만들었다. 현실의 GV와 영화 속 GV는 달라야 하는 법. 감독의 연출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별히 도드라진 테크닉을 쓰는 것이 아닌데도, 탄탄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영화를 끌어가는 힘이 대단하다.

에피소드3 '우리들의 낙원'(연출 김태진)은 출납리스트와 함께 사라져버린 팀원 민철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은정의 스토리가 로드무비처럼 펼쳐진다. 그녀가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곳은 바로 서울아트시네마. 잠적한 직원 민철은 그곳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이 에피소드도 연출이 매력적이다. 로드 무비 형식이라, 은정이 동료를 찾는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엮이는 과정도 흥미롭다(우리 인생이 결국 다 로드 무비 같지 않던가).

우리들의 낙원 episode 1 <우리들의 낙원> 한 장면

▲ 우리들의 낙원 episode 1 <우리들의 낙원> 한 장면 ⓒ 서울독립영화제


세 작품 모두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 거기에 조연들의 때로 능청스럽고 때로 익살스러운 연기에 웃음이 툭툭 터진다. 거기에다 우리에게 익숙한 극장들이 나오니 반가울 수밖에. 대구의 예술영화전용관인 오오극장부터, 가로수길의 이봄씨어터, 종로의 서울아트씨네마까지 씨네 키드들의 아지트 같은 공간들이 배경이 된다.

<너와 극장에서>는 우리들에게 극장에서의 추억을 환기시켜주며 유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또한 거대 자본이 힘을 쓰는 영화 산업계에서도, 관객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만들어주는 예술영화전용관들에게 바치는 헌사 혹은 찬사이기도 하다(이 글을 빌어 나 역시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다). 이제 슬슬 무더위가 시작될 기세다. 여름 밤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만나보시라. 시원한 바람 한 줄기 같은 유쾌함을 얻게 될 것이다. 영화 <너와 극장에서>는 오는 6월 28일 개봉한다.

너와극장에서 서울독립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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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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