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생화를 활용한 설치 디자인 전시회에 다녀왔다. 커튼까지 쳐진 전시관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 있길래?' 하고 첫발을 들여놓은 순간, 숲의 내음과 꽃의 향기가 흠뻑 다가왔다. 마치 영화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가 향기를 채집하는 것처럼, 자연의 냄새를 채집하여 가둬 둔 전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비로소 자연에서 '냄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았다.

우리는 살아가며 미처 의식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냄새로 인해 희로애락을 겪는다. 미세먼지로 가득한 도시가 뿜어내는 매캐한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다가도, 공기를 타고 오는 향긋한 커피 볶는 냄새에 어느새 마음이 풀리곤 한다. 허기진 배를 달래며 집에 들어섰을 때 반겨주는 푸근한 김치찌개 냄새만큼 안온한 행복의 내음이 있을까. 우리가 경험하는 맛은 언제나 '향'과 함께 머릿속에 기억된다.

그런데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21세기의 문명이 만들어내는 향과 맛에 기만당하고 있다면 어떨까? 지난 5월 21일~22일, 2회에 걸쳐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은 바로 우리를 배신한 '문명의 맛과 향'을 고발한다.

연구를 통해 보여주는 '음식 중독'의 개념, 주범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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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맛의 배신' 편. 키만 190cm가 넘는 박영재씨는 아마도 개그맨들 중 가장 덩치가 큰 사람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덩치만큼이나 '대식'을 하는 그의 식성이다. 단번에 라면을 3개는 끓여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가 하면, 라면 먹고 뒤돌아 서기가 무섭게 초코바 두 개를 먹어치운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던지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한 통을 퍼먹는다. 그가 하루 동안 먹는 음식의 열량은 대략 6000kcal, 성인 한 사람이 하루 동안 섭취할 칼로리를 한 끼마다 섭취하는 셈이다.

박씨만이 아니다. 보기에는 날씬한 민보라씨는 거의 매 끼니를 햄버거로 때운다. 그런데 한 개가 아니다. 한 번에 무려 서너 개씩. 그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들지 않아 콜라 등으로 허기를 달랜다. 늦은 밤 귀가한 윤현섭씨는 피자를 주문해 우선 콜라부터 한 잔 벌컥벌컥 마신다. 민씨나 윤씨의 경우 햄버거나 콜라를 끊어보려 했지만 식은땀이 나거나 울렁증이 생기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등 부작용을 겪는다.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셔야 비로소 스트레스가 풀리는 상태, 즉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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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이 특수한 경우인 건 아니다. 음식을 접했을 때 중독과 쾌락을 담당하는 뇌의 중추 신경에 혈류량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을 중독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독인 줄 인지하지 못하지만, 전 세계인의 19.9%가 이 '음식 중독'에 해당된다고 한다.

예일대에서 만든 음식 중독 문진표를 작성한 대학생 103명 중 무려 1/4에 해당하는 26명이 중독 증상을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아, 맛있어' 하다가 '다 먹어치워야지'를 넘어, '먹어야 스트레스가 풀려'를 지나 폭식의 경지에 이르는 '음식 중독'. 그런데 대부분 음식 중독을 일으키는 건 가공식품이라고 방송은 지적한다.

영양 전문가 헐먼 박사는 중독성이 강한 패스트푸드를 두고 '담배나 약물과 다를 바 없다'고 경고한다. 식품의 영양소에 등급을 매겨서 만든 ANDI 지수(Aggregate Nutrient Density Index)라는 게 있다. 그중 칼로리당 미량의 영양소인 '파이토 케미컬'의 분포가 낮은 콜라, 흰 빵 등은 '과식'을 부르고, 식욕 통제를 어렵게 만든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음식 중독'의 주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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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자원학 전문가인 프래드 프로벤자 교수에 따르면, 인간을 비롯한 동물에게는 먹이의 향을 통해 필요한 것을 찾아내, 자신이 먹을 만한 것을 골라 먹는 능력을 발달시켜온 '영양 지혜'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의 과식과 비만은 어떻게 된 일일까?

다큐에 따르면 이는 바로 '향의 기만'에 의한 것이다. 발달한 현대의 음식 산업이 향을 통해 음식을 택하는 인간의 기호를 속인다는 얘기다. 과일이 아닌데 과일 향을 품은 음료수들처럼, 합성향들은 인간의 '영양 지혜'를 뭉개버린다. 사람들이 가짜 향과 가짜 맛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가공식품의 향은 인간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버린다. 콜라·아이스크림·햄버거 등 인공적으로 합성한 식품이나 도정 및 정제를 거친 곡류로 만든 설탕·흰 밀가루·백미 등의 정제 탄수화물은 영양 없는 향과 결합돼 인간의 코와 입을 교란한다.

맛과 향이 왜 중요한가

그렇다면 고유의 향은 어떤 것일까? 이를 찾기 위해 다큐가 찾아간 곳은 '토종 씨앗'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지난 10여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600여 종의 토종 씨앗을 모은 변현단씨. 그가 토종 씨앗과 토종의 퇴비를 써서 키운 작물들은 비롯 모양이나 수확량은 적지만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맛이 좋다.

토종과 다품종 개량종은 마치 50% 오렌지 주스와도 같다. 오렌지 주스 원액에 물을 섞어 희석한 50% 주스 말이다. 우리는 이것도 흔히 오렌지 주스라 부른다. 하지만 오렌지 100%의 맛과 향에 비교할 수 있을까. 결국 '더 많이, 더 크게'를 지향하는 농업의 발전이 낳은 건, 맛과 향이 떨어져 '본연의 향미'를 잃은 음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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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맛과 향이 뭐길래? 플로리다 주립대학은 토마토 278종을 실험했다. 토마토에는 수백 가지의 맛과 향을 지닌 화학 물질이 있고 그 중에서 향을 내는 건 30여 종의 화학 물질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바로 이 향이 필수 영양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암을 예방하고 식욕을 억제하며 건강에 도움을 주는 생리 활성을 가지고 있는 식물성 화학 물질, 파이토 케미컬 성분이 '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향이 좋다는 건 곧 '몸에 좋다'는 신호로, 향이 좋을수록 많은 영양분을 품은 건강한 열매라는 것을 연구 결과는 밝힌다.

그런데 대량 생산을 위한 품종 개량은 이처럼 영양소를 지닌 향을 희석한다. 희석된 오렌지 주스처럼 부피는 늘고 생산량은 증가하지만, 파이토 케미컬과 미네랄이 부족해진다. 그 자리를 수분과 탄수화물이 채워 영양의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다.

다큐는 이에 관해 실험을 해본다. 농약을 사용해 하우스에서 한 달 동안 속성으로 재배한 것과 노지에서 겨울을 이겨낸 같은 종자의 포항초(시금치)를 이용한 실험이다. 다들 생각하는 것처럼 겨울 바람을 이겨낸 포항초가 당도도 높고 향과 맛이 좋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파이토 케미컬 성분의 페놀리그난과 플라노보이드 성분이 노지의 포항초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결국 햄버거와 콜라, 피자, 라면 등을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을 채울 수 없는 건 바로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 몸이 진짜 원하는 맛과 향... '영양지혜'를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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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식품 본연의 향기와 맛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소를 알리는 '신호등'과도 같다. 다큐는 1부 <건강을 부르는 향>에 이어, 2부 <중독을 부르는 향>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영양 지혜'를 다룬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굶주리지 않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영양소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이 다큐의 주장인데, '먹방'을 넘어 '대식 전성 시대'에 대한 도전처럼 들리기도 한다.

EBS <다큐프라임>은 이어 9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20여 명이나 되는 제주시 한경면 조수 1리의 장수 마을을 비춘다. 이곳의 노인들은 집 한 켠 텃밭에서 자라나는 채소와 감자, 고구마 등으로 밥상을 꾸린다. 쌀이 귀한 옛날부터 어르신들의 밥에는 보리 등의 잡곡과 검은 콩이 빠지지 않았다. 결국 자연에서 길러낸 신선한 먹거리가 인간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감은사 우관 스님은 '자연은 인간의 공생 파트너'라 정의한다. 사찰 마당에서 제철 풀이 마구 자라는데, 그래서 마당은 자연식 전문가인 스님의 보물 창고라고 한다. 유명 셰프라고 해서 다를까. 일식 요리사 유희영 셰프는 말한다. "좋은 재료에서 훌륭한 요리가 나온다"고.

텃밭을 만들고 야생 풀이 자라는 자연으로 떠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중독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른 무렵 결혼 당시 '당신의 자녀들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암울한 선고를 들었던 체중 160kg의 안소니 마시엘로는 식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 20년이 지난 현재 아이들과 함께 농구 게임을 즐기는 삶을 누린다.

대사 증후군에 당뇨, 고혈압 진단을 받은 개그맨 박영재씨는 한 달 정도 '재습관화'의 과정을 통해 음식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우선 샐러드 등으로 배를 채우고, 외식을 하더라도 콩비지 등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가급적 맛이 진하지 않은 음식'으로 끼니를 꾸려간다. 한 달이 지난 후 박영재씨는 놀랍게도 50대였던 '생체 나이'를 본인의 실제 나이에 맞게 돌려놓았다. 몸무게도 줄었다. 무엇보다 채소라면 질색하던 그는 이제 토마토의 다양한 맛에 눈을 떴다.

영화 <슈퍼 차지 미(SuperCharge Me)>의 주인공인 제나 노우드는 자연 생식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결국 '채식이냐 육식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가공 식품 때문에 무뎌진 내 몸의 감각을 되살려 온 몸의 세포에 영양이 퍼져나가는 그 느낌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나는 주장한다. '가짜 향'으로는 만들 수 없는 느낌 말이다. 가짜 맛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 내 몸이 원하는 진짜 맛과 향을 찾아내는 '영양 지혜'를 회복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짜 다이어트'의 비결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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