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의 정치인 존 달버그 액턴은 "권력이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라는 명언을 남겼다. 여기서 권력이라는 게 정치 권력이나 자본 권력처럼 꼭 거창한 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회, 어느 집단이든 기득권을 움켜쥔 소수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제로 침해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권력 남용이다. 그 '권력자'는 바로 대학교수일 수도, 영화감독이나 스포츠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공적인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 사유화된 권력은 십중팔구 '괴물'이 된다.

마피아 같았던 '전명규 라인'의 횡포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 SBS


지난 7일 방송된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드러난 한국 빙상계의 실태를 둘러싼 후폭풍이 거세다. 방송에서는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이라는 주제로 평창동계올림픽 대표팀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들을 조명했다. 당시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경기에서 발생한 노선영 왕따 논란, 매스스타트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이승훈 몰아주기 의혹, 골육종으로 사망한 고(故) 노진규 선수를 둘러싼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공개됐다.

이날 방송에서 드러난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노선영은 빙상연맹의 행정착오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될 뻔했다가 러시아 측에서 선수 등록을 포기하면서 극적으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하지만 노선영은 대표팀에 복귀한 이후에도 사실상 팀 동료와 지도자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올림픽 팀추월 경기에서 논란이 된 장면에 대해서도 당시 기자회견에서 백철기 감독이 "사전에 노선영과 합의된 작전이었다"고 주장한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당시 기자회견 직전에 불참한 이유는 백철기 감독의 언론 인터뷰 기사를 보고 "격차가 벌어진 책임을 내게 떠넘기려고 하는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방송에서는 '한국 빙상의 대부' 전명규 빙상연맹 부회장 겸 한국체대 교수에 대한 내용도 심도있게 다뤘다. 빙상계의 거물로 꼽히는 전명규는 최근 수년간 빙상연맹을 둘러싼 각종 사건사고의 중심에 있었다.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 SBS


제보자들은 전명규가 빙상계에서 누리는 절대적인 지위를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폭로했다. 빙상연맹 내부나 이사회 역시 '전명규 라인'이 장악하고 있으며 그의 전횡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는 증언도 나왔다. 한국에서 전명규와 갈등을 빚다가 경질된 것으로 알려진 에릭 바우만 전 스피드스케이팅 감독은 빙상연맹이 전명규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며 "마치 마피아 같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금메달 지상주의를 위해 희생 당한 많은 이들

'이승훈 몰아주기' 의혹과 노진규의 사망에도 전명규의 영향이 있었다. '전명규 라인'으로 꼽히는 이승훈을 올림픽 4관왕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선수들에게 이승훈을 도와주는 '페이스 메이커'로 희생하는 역할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이승훈보다 더 성적이 좋은 선수도 있었다.

쇼트트랙 선수였던 노진규는 지난 2016년 4월 골육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방송에 따르면, 노진규는 당초 대학병원 조직검사에서 거대세포종 진단을 받았으나 전명규는 '양성종양이고 암일 확률은 낮다'는 이유로 계속 훈련할 것을 강요했다. 노진규는 진통제를 먹어가며 훈련에 임했으나 치료시기를 놓쳐 골육종이 악화됐고 이후 폐로 전이되며 2년에 걸친 투병 끝에 결국 사망했다.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선수의 건강을 소모품처럼 취급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 SBS


이날 방송에서 나온 내용은 엄밀히 말하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빙상경기에 관심 있는 팬들이나 관계자라면 대부분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제대로 된 '공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전명규만 하더라도 과거에도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여전히 살아남아 빙상계의 막후 실세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폐쇄적이고 집요한 빙상계의 파벌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안방에서 평창올림픽을 전후해 한국 빙상계의 실태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높아지면서 해묵은 폐단들이 이제야 하나둘씩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방송 이후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전명규와 빙상연맹을 조사하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다수의 누리꾼들이 지지를 보낼 정도로 여론의 반응이 뜨겁다. 빙상계 '만악의 근원'이 된 전명규에 대한 처벌은 물론, 이승훈의 금메달을 박탈하고 백철기 감독-김보름-박지우 등과 함께 빙상계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현실성 여부를 떠나서 그만큼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 여론이 엄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사태가 하나의 시발점으로 빙상계는 물론이고 체육계까지 확산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빙상연맹 논란을 바라보는 언론들의 미묘한 논조 차이도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노선영은 팀추월 논란 이후 공식 기자회견이나 타 매체와의 인터뷰는 일절 응하지 않았지만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그것이 알고싶다> 등 유독 SBS에만 출연하여 자신의 입장을 피력해왔다. 이를 두고 노선영과 SBS 간의 관계에 의혹을 제기하거나 노선영의 처신을 비판하는 보도도 나온 바 있다. 일부 매체에서는 파벌 논란이 부각되면서 가해자로 지목된 김보름이나 이승훈을 오히려 옹호하고 노선영을 깎아내리는 시각의 기사들이 나오며 진실 공방 양상을 띠기도 했다. 사실 빙상계 적폐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거나 공론화 되지 못한 데는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많은 팬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빙상연맹뿐만 아니라 언론의 역할과 공정성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사람의 제왕적 권력에 의존해온 빙상연맹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 SBS


현시점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역시 전명규 부회장의 거취다. 한국 빙상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팬들에게 전명규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다. 동계스포츠 불모지였던 한국이 일약 빙상강국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전명규의 공로와 영향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전명규 사단이 세계 무대에서 쓸어 담은 메달만 대략 800여 개가 넘는다.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아니면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거나(You either die a hero, or you live long enough to see yourself become the villain)" 전명규의 두 얼굴은 바로 영화 <다크나이트>의 명대사를 연상시킨다. 전명규가 빙상계의 실세로 자리매김한 30여 년 동안 그는 '한국 빙상의 개척자'에서 어느덧 '제왕적 권력의 상징'으로 변질됐다. 철저한 성적 지상주의의 이면에 가려진 파벌과 폐쇄주의, 승부 조작, 담합, 선수 폭행 등 힌국 빙상계의 부조리한 관행을 심은 원흉으로도 거론된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은 결국 한국 빙상계가 정상적인 시스템 없이 전명규 특정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해 왔고 그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 폐단이다.

돌이켜보면 어디 빙상계뿐일까. 현대사에서 우리 사회가 짧은 시간에 압축 성장을 거듭하며 권력자들의 논리에 따라 다수의 희생과 고통을 외면하던 과정도 비슷했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성과 지상주의를 합리화하는 논리는, 한국 빙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금메달이 곧 국위선양'이고 그래서 '될 사람만 밀어주자'는 발상이 빙상계를 둘러싼 각종 파벌과 갈등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다.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지난 7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겨울왕국의 그늘-논란의 빙상연맹' 편 캡처. ⓒ SBS


하지만 그것은 결코 국위선양도 한국 빙상계를 위한 것도 아닌, 그저 빙상 권력을 통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오래 유지하고 싶은 소수의 '권력자'들만을 위한 합리화였다. 기득권자들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부심이 '나만 되고 너는 안 된다'는 이기주의로 변질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고 대중의 인식도 변했다. 오늘날 대중은 누가 게임의 승자가 되느냐는 결과만을 보기보다 누구에게나 게임의 룰이 공정하게 적용되었는지 과정을 더 중시한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뒤흔든 국정농단 사태나 미투 운동 모두 공정하지 못한 기득권에 저항하고 목소리를 내면 세상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교훈을 안겨줬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빙상연맹과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부정한 행위와 비리가 적발된 이들은 엄중하게 처벌하고 빙상계에서 추방하는 조치도 필요하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단지 몇몇 특정인을 향한 분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빙상계 내부의 시스템을 혁신하는 것이다. 전명규나 이승훈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자리에 제2의 전명규 같은 인물이 또 등장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 이상 한국 빙상이 소수 기득권자들만의 놀이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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