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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위한 의미있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계간지 <딴짓>의 발행인인 프로딴짓러가 소소하고 쓸데없는 딴짓의 세계를 보여드립니다. "쫄지 말고 딴짓해!" 밥벌이에 지친 당신을 응원합니다. [편집자말]
어릴 때 놀러 갔던 친구 집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라는 가훈을 봤다. 친구 아버지가 붓글씨로 직접 쓰신 글이었다. 친구 아버지는 가훈을 표구까지 해서 거실 중앙에 걸어두셨다. 그때는 집집마다 가훈 같은 것들을 정하고 표구집 같은 데다 맡겨 집 거실에다 걸어두는 것이 중산층의 상징처럼 여겨질 때였다.

가훈들은 대부분 '가화만사성'이니 '고진감래'니 하는 뻔한 한자들이었는데 읽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집가家'자나 '올 래来'자 정도라 어려워 보이는 먹물 밑에서 항상 조금은 위축되곤 했다. 그 와중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라는 가훈은 뭐랄까, 너무 당연하고 일상적인 한글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좀 없어 보였다. '쓸모 있는 인간'이라니. 뭐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야 '당연히'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쓸모 있는 인간은 별로 없고 쓸모가 없는 인간은 많았고 쓸모가 없다 못해 그냥 지구에 없는 게 더 나아 보이는 인간들은 더 많아 보였다. 슬픈 것은 내가 그 '쓸모가 없는 인간' 부류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러분이 아니더라도 일할 사람은 많습니다"

 쓸모란 무엇일까
 쓸모란 무엇일까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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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바로 회사에 취업했다. 쓸모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어른들이 보기에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해서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회사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쓸모 있는 인간이었겠지만, 나는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앉아도 회사에서의 내 '쓸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신입이 하는 일이 거기서 거기인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일 자체였다. 내가 들어간 회사는 안정적인 사업군에서 과점에 가까운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뛰어난 개인보다는 평범한 조직원이 필요한 회사였다. 능력보다 정치가 중요했고 야근보다 회식이 중요했다.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이 커다란 기계의 부품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니더라도 나를 대체할 사람은 많아보였고, 가끔 리더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오기도 했다.

"여러분이 아니더라도 이 일을 할 사람은 많습니다. 회사에 감사하며 열심히 일하세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정말 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일까? 내가 이 회사에 계속 남아있으면 언젠가 필요한 사람이 될까? 혹여나 회사가 나를 내쳤을 때, 나는 사회에서 쓸모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안정적인 업무는 자기계발을 게을리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나'라는 개인은 점점 도태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회사라는 갑옷을 벗으면 겨울바람에도 픽 하고 쓰러지는 여린 잎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 비웃던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았다. 부모님은 이런 내 고민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도 회사를 다녀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내가 이야기하는 '쓸모'와 부모님의 '쓸모'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거대한 수레의 톱니바퀴 역할이야 크든 작든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쓸모'이기는 했으나 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수레가 '쓸모없음'을 넘어서 '지구에 없는 게 더 나아 보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에게 '쓸모'란 이다지도 다른 단어였다.

퇴사 후 발견한 나의 쓸모

 회사에서 내 쓸모는 무엇일까
 회사에서 내 쓸모는 무엇일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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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꽤 이성적이고 조금은 이상적인 문제로 나는 수레바퀴에서 튕겨져 나왔다. 나의 결정은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는 가훈을 가진 내 친구를 제외하고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그 친구는 제 일처럼 나의 퇴사를 기뻐했다.

그는 나를 쓸모 있는 인간이라 생각했던 그의 아버지에게 당신이 늘 제 자식과 비교했던 그 엄친딸이 드디어 자기와 같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그러니 실은 모두를 안타깝게 한 것이라 봐야 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쓸모 있기 위해 나왔는데 모두들 이제 네 쓸모가 없어졌구나 했다.

건실한 청년 역할을 그만두고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에서 딴짓을 하면서 나는 이 '쓸모에 대한 오해'가 비단 돈벌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구나 싶었다. 취미나 여행이나 짬시간, 가끔은 연애까지 이 '쓸모'의 손바닥 안이었다. 뜨개질을 하면 그걸로 뭘 할거니, 가져다 팔거니 했고 자전거를 타면 여자애가 다리 굵어진다느니 차라리 몸매를 위해서 요가가 낫지 않겠냐느니 했다. 무엇보다 글을 쓰면 신춘문예에 낼 거냐느니 잡지 만들면 돈은 좀 벌리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다만 뜨개질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잡지를 만드는 것이 좋았을 뿐 그것으로 무슨 대업을 이루겠다거나 왕창 돈을 벌겠다는 마음은 없다. 그건 레고로 마을을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것과 비슷하다. 레고를 조립하는 과정이 즐거울 뿐이다. 내게 그것이 딴짓의 '쓸모'다.

존재 자체가 쓸모다

 <딴짓> 창간파티
 <딴짓> 창간파티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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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쓸모'에 대한 오해 때문에 나의 쓸모 있는 딴짓에 대한 응원이 곡해되어 들릴 수도 있겠다. 그 쓸모는 쌀 나오고 밥 나오는 쓸모는 아니다. 건강해지거나 유명해지는 쓸모도 아니고. 그러면 좋겠지만 그건 뭐랄까 건물 세우려고 땅 팠는데 기름 나오는 격이다. 땅 파는 것 자체가 목적이면 그냥 땅 파는 것에 그 쓸모가 있다. 하는 동안 재밌으면 쓸모 있다. 그동안 웃었으면 쓸모 있다. 기분이 좋아졌으면 쓸모 있다. 그게 딴짓의 쓸모다.

딴짓으로 내가 가장 많이 한 것은 <딴짓>이라는 계간지를 만든 일이다. 사람들에게 '딴짓해도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출판사도 차리고 창간파티도 열었다. 그렇게 벌써 아홉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보니 일감이 들어왔다. 그럴 땐 기쁘게 일할 수 있었다. 그건 조직이라는 울타리가 나를 지켜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의 가치로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는 문장을 따라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살다보면 쓸모 있는 인간이 못 될 수도 있는 거고 안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냥 '인간이 되자'라고만 해도 어려운데 거기에 '쓸모 있는'까지 붙이는 건 난이도 조절 실패가 아닌가.

내가 하는 이 딴짓도 지금은 내게 엄청나게 쓸모 있지만 살다보면 또 모르는 게 아닐까. 운이 터져서 기름이 나올 수도 있고 땅 파는 게 재미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일단 지금 즐겁다. 그걸로 되었다. 좋다. 그래서 당신의 딴짓도 쓸모 있었으면 좋겠다. 모래성을 쌓고 다시 부수고, 레고를 만들고 다시 무너뜨리고, 그림을 그리고 다시 지우는 딴짓이라도.

응원한다. 그 쓸모 있는 딴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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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