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담론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예술로서의 영화, 상업으로서의 영화. 전자는 평론가와 연구자들, 후자는 일반인들의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두 집단 간에 견해 차이는 있을지언정 영화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의 기본적인 역할은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영화를 둘러싼 견해 차이는 그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사람들은 영화관 밖으로 나오며 방금 보았던 영화를 되새김질 해보곤 한다. 그때, 영화는 입안에서 잘 숙성된 '담론'이 된다. 그렇게 개개인에게 맞춤형으로 제작된 담론은, 옆에 있는 친구나 인터넷상의 누군가와 공유되며 새롭게 변화한다.

우리는 그 새로움을 느끼고 싶어한다. 영화를 밑에서 올려다보는 사람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그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생명체가 유전자 교환을 통해 더 나은 개체로 변화하는 것처럼, 영화도 의견 교환을 통해 끝없이 재평가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인정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영화를 어느 관점에서 어느 깊이로 볼 것인지 정해져 있지 않음에도 그렇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작품 포스터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작품 포스터 ⓒ 파라마운트 픽쳐스


언젠가 당신은 다른 사람의 영화평을 듣곤 '별거 가지고 트집을 다 잡네'라고 생각해본 적 있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당신이 숙성한 담론을 망쳐놓으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트집이란 '올바른 것을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당신에게 사소한 것으로 트집을 잡는 사람들은 방해자다. 하지만 그 방해는 필요하다. 그 트집이 없다면 영화에 상처가 나지 않고, 상처가 나지 않는다면 좌절도 없다. 좌절이 없다면 반성이 없고, 반성이 없다면 변화가 없다. 한마디로, 트집 없는 영화는 '고인 물'과 같다.

애니메이션은 그런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트집을 잡는다면 현실세계의 법칙에 빗대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개연성'이라고 말하는 것들, 두 남녀가 사랑에 이르는 과정이나 두 단체가 싸움에 이르게 되는 과정.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으면 우리는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는 그 앞뒤를 창조해냄으로써 개연성의 함정에서 벗어난다. 인체 비례를 무시해도 캐릭터는 귀엽기만 하고, 복장이 특이해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을 지칭하는 용어가 '마술적 사실주의'로, 현실의 인과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관을 뜻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이 막연하게 개연성이 없는 건 아니다. 애니메이션의 세계엔 그들만의 개연성이 있다. 단지, 그곳이 현실세계가 아니기에 어떤 법칙이든 '개연'성이 있다는 것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무거나 가져다 써도' 착 달라붙는다. 이를테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두 만화 캐릭터, 배트맨과 슈퍼맨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배경을 지녔다. 일하는 모습은 없는데 돈은 많은 배트맨, 외계 어딘가에서 왔는데 지구에 집착하는 슈퍼맨.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유명한 두 캐릭터, 손오공과 나루토는 죽었다 살아나기도 하며 밑도 끝도 없이 강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재밌게만 본다. 그것이 만화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과 담론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작품 포스터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작품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은 오로지 담론에만 집중할 수 있다. 현실의 틀에선 그 범위 안의 생각밖에 할 수 없으므로 그렇다. 영화가 카메라와 편집으로 현실의 조작을 꾀한다면,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머릿속으로의 현실 조작이다. 한마디로, 애니메이션에서 담론이 생성되는 방식은 영화와 다르다.

따라서 이른바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리는 애니메이션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선 하나의 가정이 필요하다. '만약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라는 생각. 이것은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나, 영화에서의 가정이란 '우리 기준으로 그들을 분석하는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애니메이션을 비평하기 위해선 우리가 알고 있던 '현실계'를 포기해야 한다. 그 작품의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파악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애니메이션은 영화보다 더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매체다.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작품은 관객의 것이 된다고들 하지만, 애니메이션처럼 관객에게 능동적인 참가를 요구하는 매체는 없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 작품의 세계를 만드는 건 작가에게만 부여되는 역할이 아니다. 관객은 애니메이션 세계의 질서를 정립해나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

그러니까 특성적으로 볼 때, 애니메이션은 소설과 영화의 중간에 서 있는 셈이다. 소설은 기본적인 뼈대를 세워 그 위에 독자의 상상을 허용하고, 영화는 자신이 만든 건축물을 관객에게 내보인다. 애니메이션은 관객에게 설계도를 주고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지 협업해나간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일본 곤충기>의 작품 포스터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일본 곤충기>의 작품 포스터 ⓒ 마운틴픽쳐스


애니메이션은 꿈에 근접한 매체이기도 하다. 영상으로 이미지를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제약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꿈은 개인의 사고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고, 그것을 개인의 기준으로 판단하기엔 너무 편협하다. 그 꿈이 어떤 사고와 판단을 보여주고 있던 간에, 작품 내적으로는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관객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보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관객들은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우를 범하고 만다. 앞서 말했듯 애니메이션은 양자 세계와 같아서, 그 내부의 법칙은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결정된다. 한마디로, 애니메이션의 담론은 작품 외적으로 토의되어야 하는 것이지 내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작품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만화는 만화로만 보자'며 작품이 내비치는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해버리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지금까지 줄곧 말했던 '만화는 관객의 사고에 의해 재정립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아 말하자면, '만화는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보는 것'이다.

예시를 들자면 이렇다.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라는 작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야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 작품은 국가가 야한 이야기를 통제하며, 주인공은 체제를 뒤엎기 위해 테러(?)를 저지르고 다닌다. 그 테러란 것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성적 담화를 외치거나 속옷을 하늘에 날린다던가 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일본에는 이렇게 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데, 대부분 관객은 그것을 현실계의 기준으로 생각해 '저급'으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러한 요소가 작품 전반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다. 그 작품에서 성을 내비친다는 건 청소년기의 하위문화와 사상의 해방이 결합한 담론으로 읽어야 한다.

애니메이션과 성

 영화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의 작품 포스터

영화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의 작품 포스터 ⓒ 찬란


성 상품화, 폭력적 묘사, 아동 학대, 극우와 극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불편해한다. 우리 사회는 그것을 해결해 나가려 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이러한 것들이 담론을 제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 그것을 막연하게 비판해선 안 된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 처음 미술관에 걸렸을 때 미술계가 발칵 뒤집힌 것은, 그것이 이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담론을 위해 민감한 소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최근작에서는 지난해 개봉한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가 대표적인 예다. 그 영화에서 인디밴드 맴버들은 단지 앨범을 냈다는 것으로 국가보안법 재판에 회부된다. '김정일 만세'라는 자극적인 곡 제목 뒤엔 '동명이인인 지인을 찬양했을 뿐'이라는 비꼼이 덧붙여진다. 그 영화는 진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담론은 별개의 문제다. 만약 당신이 게임을 자주 한다면 멀쩡한 문장도 특정 키워드에 걸려 필터링 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비판해야 할 것은, 그것이 담론과는 상관없이 작품에 개입되었을 경우에만 한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성적 묘사가 잦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줄곧 강조했듯 성적 묘사가 있다고 해서 그게 곧 성 상품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에서 성(性)은 천사와 결합해 탄생의 이미지를 주고, 성은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게 된다. 그 작품에서 천사는 악하고 악마는 선하며, 선악의 개념이 성의 원초성을 탐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평생에 걸쳐 말하던 담론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재현되는 것이다. 

성을 하나의 담론으로 삼은 작품은 대부분 그것이 전면으로 드러나 있다. <감옥학원>이 감옥이라는 직접적인 장소를 통해 감금된 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쓰레기의 본망>이 육체와 정신의 간극에 성을 투입하는 방식은 대범하지만 은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재미있는 것은 성을 부차적인 컨셉으로 차용한 작품들이 오히려 그것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보다 비난받는 정도가 심하다는 점이다. 음지의 것을 양지로 끌어올렸다고 해서, 그것도 비판이 아니라 비난을 받는 것은 작품 입장에서 상당히 억울한 일이다.

이를테면 <홍각의 판도라>라는 작품에서 기계인 인간과 인간형 기계가 에너지를 공유하는 방법은, 그들이 부재하고 있는 성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들은 기계의 몸으로 살아왔으니 자신의 몸에 대한 성의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남녀가 서로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심리학에서 성은 인간심리의 근원이기에 그들의 자아에 대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결국 전작인 <공각기동대>와 괴리가 있다는 발언은 완전하게 들어맞지는 않은 것이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쓰레기의 본망>의 실사 드라마 작품 포스터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쓰레기의 본망>의 실사 드라마 작품 포스터 ⓒ 원작자, 요코야리 멩고


애니메이션 영화와 성

문제는 애니메이션 영화다. 그것은 애니메이션이자 영화이다. 둘 중 무엇이 우선인지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영화로 본다면 영화의 담론을 따르게 되고, 애니메이션으로 본다면 애니메이션의 담론을 따르게 된다. 그것은 무척 심각한 문제여서, 관객들로 하여금 판단을 유보하게 한다. 그 부분에서 작년에 흥행한 <너의 이름은>을 예로 들지 않을 수가 없는데, 작년 한 해와 최근 십 년을 통틀어서 흥행한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은 현실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무스비'라는 마술적 개념이 있는 세계관이다. 즉, 영화의 현실세계와 애니메이션의 마술세계가 공존한다. 이 작품은 대중과 평론가에게 호평받았고, 성적묘사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때, 성적묘사의 근거로 삼는 것은 '로우 앵글', '바스트 모핑', '판치라'(각각 아래에서 위의 시점, 흔들리는 상체 묘사, 가려져 있던 팬티의 노출을 뜻함) 등이다. 이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요 특징으로 거론되는 것이며, 예술성보단 상업성이 강한 작품에서 주로 관찰된다. 이것은 작품성보다 상업성을 우선으로 해나가겠다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인터뷰로 명백해진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의 작품 포스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의 작품 포스터 ⓒ SICAF


이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발언은 상업성을 주로 놓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업성을 첨가하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의 전작에서 주로 관찰되는 특성들, 계단과 철로의 단절의 이미지, 벚꽃과 구름의 유동적인 시간 이미지가 작품 내에서 자주 인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마코토의 필모그래피의 변곡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변곡점의 축을 이루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성적묘사'다. 아쉽게도 이 글은 애니메이션에서의 성 담론을 다루므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다루진 않을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에서 공간은 인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다. 인물은 주로 연애감정을 가진 사춘기 또래 남녀로 나타나며, 같은 공간에서 다른 높이에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기작 <별의 목소리>(2002)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별의 목소리>는 흔히 '썸'이라고 부르는 관계의 중학생 남녀 중, 여자 쪽이 우주 비행기의 파일럿으로 발탁되는 간단한 서사다.

작품은 우주라는 공간과 지구를 대비시키며 두 공간에서 통용되는 시간 법칙을 교묘하게 비튼다. 두 사람은 전파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전파는 지구에서 빠르지만 우주에서는 그녀가 멀어지는 만큼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별의 목소리>에서 우주란, 견우와 직녀 설화에서 나타난 것처럼 단절의 이미지이다. 즉, 두 사람은 우주에서의 메시지 교환을 통해 공간이 시간을 변화시키는 것을 경험한다. 이러한 부분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 스텔라>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성의 담론 : <너의 이름은>

 영화 <너의 이름은>의 재개봉 포스터

영화 <너의 이름은>의 재개봉 포스터 ⓒ 미디어캐슬


<너의 이름은>은 이러한 감독의 의지에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상업성이 결합한 결과다. 이 작품에서도 사춘기 또래의 두 남녀가 나오며, 두 사람은 도쿄/이토모리라는 분할된 공간에서 영혼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는 대로변의 자가용 무리와 지하철의 속도감을 통해 도쿄의 빠릿함을 묘사하며, 큰 호수와 흔들리는 나무를 통해 이토모리의 느릿함을 강조한다. 두 인물의 대사, "바쁘다"와 "따분하다"는 그것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영혼이 뒤바뀌며 도쿄는 느릿한 템포로, 이토모리는 빠릿한 템포로 묘사된다. 그때, 공간으로 비유되던 인물의 성격은 뒤바뀐 장소의 템포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영화는 그러한 변화를 통해 인물의 성장을 보여준다. 이토모리 현의 타키는 느긋해지고 도쿄의 미츠하는 빠릿해진다. 그 후,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미츠하는 소심했던 성격에서 탈피해 '빠릿함'의 추진력을 얻게 된다. 이렇듯 영화는 영혼의 반복적인 교환을 통해 '시간으로서의 공간'을 인물 성장의 도구로 차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비판점으로 거론된 성적묘사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까? 일단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근거 중, 로우 앵글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로우 앵글은 인물의 크기를 실제보다 크게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권위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따라서 이토모리의 느긋함을 안고 살아가던 미츠하가 타키의 영혼을 지니게 되었을 때, 그에 따른 성격의 변화를 묘사하기에 적절하다.

분명하게, 이 영화에서 로우 앵글은 (사물을 제외하고)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타키'의 시점만을 그리고 있다. 또한 이에 따르면, 영화 후반부에서 자전거 타는 미츠하(타키 영혼)에게 판치라가 발견된 것은 타키의 시점을 표현하고 있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제하면, 바스트 모핑으로 대표되는 신체 묘사가 남는다. 농구를 하며 흔들리는 가슴이나, 최초로 몸이 뒤바뀌던 시점에서 미츠하의 가슴을 만지는 타키(영혼)가 그 예다. 이것은 아마도 십 대의 시간관을 차용하기 위한 도구로 보인다.

인간의 시간 인식은 상대적이어서, 나이에 따라 시간의 속도감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과 생활 패턴의 정착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장하는 시기의 시간은 느리고, 그 후로는 점점 늙어가며 시간에 가속이 붙는다. 인간의 성장이 20세 전후로 완성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작품 속 인물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늙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느리게만 흘러가는 나이다.

 영화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영화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하지만 그러한 일상성은 신체의 뒤바뀜이라는 마술적 서사를 통해 파괴된다. 작품에서 유성은 그들 신체가 뒤바뀌게 되는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밤하늘의 정적인 이미지에서 유성은 그 속도감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가진다. 즉, 등장인물의 신체가 뒤바뀌는 순간에 시간관이 가속화된다. 그런데 작품의 후반에 그 운석은 두 갈래로 분할되어 미츠하가 사는 이토모리를 파괴하고 만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 벌어졌으며, 수년 전의 일이기에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들이 그동안 신체 교환을 통해 아무리 시간관을 빠르게 했다 한 들, 운석이 떨어지는 날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무스비'라는 마술적 개념이 등장해 그것을 가능케 한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무스비란 동양에서의 '붉은 실 설화'에 기초한 것이다. 설화에 따르면, 태어나기 이전부터 두 남녀는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 있든 간에 그들을 만나게 해준다. 즉, 이 작품에서의 무스비란 두 인물의 시간관을 관통하는 도구다.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지금까지 시간 교환의 축이었던 '운석'은 그 역할을 무스비에 빼앗기고 만다. 이제 운석은 단순히 파괴와 재앙의 이미지일 뿐이다. 미츠하와 타키는 처음부터 연결된 운명이었던 것이다.

작품에서 '무스비'는 신체의 교환이라는 것으로 지칭된다. 신체의 교환을 통해 가속되는 시간관에, 어긋날 수 있던 개인은 신체를 만지며 자아를 확인한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성적 묘사, 미츠하(타키)가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것이나 타키(미츠하)가 발기된 성기를 경험하는 것. 이것은 현재 뒤바뀐 신체를 가장 확실하게 인식하는 방법이다. 무스비라는 것으로 이어진 개인은 하나의 운명(운석을 막음)을 공유하기에 혼란스럽고, 성기의 분할을 통해 자아를 확인받는다.

 영화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영화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그것은 마치 프로이트가 말했던 남근기의 특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때, 남근기 선망대상인 부모는 각자가 동경하는 상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머니가 없는 타키에게 미츠하는 '따스한 어머니'이고, 따분한 촌동네에 사는 미츠하에게 타키는 '마천루 도쿄'에 사는 아버지다. 이토모리의 호수는 자궁의 이미지이며, 도쿄의 마천루는 남근의 이미지다. 이때 운석은 초자아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타키/미츠하 스스로가 운석을 마술적 도구로 여기지만, 그것은 사실 무스비(자아)의 반대편에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아와 초자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힘껏 뛰어다닐 수밖에 없다.

또한 표면적인 맥락으로도 사춘기의 주된 관심사가 아이돌, 연애, 화장과 같은 '이성'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작품이 보여주는 성에 관한 탐구, 담론은 맥락적으로 어긋나 있다고 볼 수 없다. 한결같던 그들의 일상은 남/녀 역할교환을 통해 활기를 찾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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