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출발이었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 우승팀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이번 시즌 1라운드에서 1승5패 승점 4점으로 부진하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외국인 선수 테일러 심슨만이 득점 2위, 공격성공률 3위로 고군분투했을 뿐 지난 시즌 정규리그 MVP 이재영이 초반 허리 부상 후유증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팀을 떠난 센터 김수지(IBK기업은행 알토스)의 공백도 생각보다 훨씬 컸다.

2라운드 첫 경기였던12일 GS칼텍스 KIXX와의 원정경기에서도 흥국생명의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흥국생명은 한동안 주전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주장 김나희를 다시 주전 센터로 배치했지만 세트 후반까지 GS칼텍스에게 3~4점 차이의 리드를 허용했다. 설상가상으로 18-21에서 심슨이 백어택을 시도하다가 고관절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6개 구단이 모두 마찬가지지만 흥국생명에서 심슨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이재영의 컨디션이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한 상황에서 심슨마저 이탈하면 공격력 급감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흥국생명은 심슨이 부상으로 교체된 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0 승리를 거두며 이번 시즌 처음으로 승점 3점을 따냈다. 심슨 대신 투입된 프로 3년 차 이한비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슈퍼 서브' 역할을 톡톡히 해줬기 때문이다.

2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한 원곡고 창단 멤버

 원곡고의 창단 첫 전국대회 우승 주역이었던 이한비는 프로 입단 후 두 시즌 동안 큰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원곡고의 창단 첫 전국대회 우승 주역이었던 이한비는 프로 입단 후 두 시즌 동안 큰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 한국배구연맹


'배구여제' 김연경(상하이), '코트의 꽃사슴' 황연주(현대건설), '천재소녀' 배유나(한국도로공사)는 V리그를 대표하는(또는 대표했던) 스타 선수라는 점 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안산 원곡중학교를 나온 동문이라는 점이다. '화성 머리띠' 김수지의 아버지 김동열 감독이 이끌던 원곡중학교는 V리그의 많은 스타들을 배출하며 2000년대 중반부터 여자배구 유망주의 산실로 떠올랐다.

하지만 힘들게 키운 애제자들이 중학교 졸업 후 안산을 떠나 타지역으로 진학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던 김동열 감독은 안산시의 도움을 받아 2013년 7월 원곡고에 배구부를 창단했다. 현재 GS칼텍스 KIXX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는 '골든 리트리버' 강소희와 흥국생명의 슈퍼서브 이한비가 바로 원곡고등학교의 창단 멤버다(1년 후배로는 지난 시즌 V리그 신인상을 탄 KGC인삼공사의 지민경이 있다).

2014년까지 이재영(흥국생명), 이다영(현대건설) 자매에 하혜진(도로공사)까지 호화 멤버를 자랑하던 선명여고에 가려 있던 원곡고는 강소희와 이한비가 3학년이 되던 2015년 태백산배 중·고 배구대회에서 창단 2년 만에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한비는 이 대회에서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 강소휘를 제치고 MVP에 선정됐다.

강소휘와 이한비는 201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각각 1,3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프로 입단 후 둘의 희비는 엇갈리고 말았다. 강소휘가 입단 첫 시즌부터 두각을 나타낸 반면에 이한비는 이재영과 심슨에 가려 좀처럼 경기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한비는 시즌 후반 심슨이 부상으로 교체되면서 간간이 출전기회를 잡아 16경기에서 64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27경기에 출전해 154득점을 올리며 뛰어난 공격력을 과시한 강소휘에게 신인왕 자리를 내줬다.

지난 시즌 프로 2년 차가 된 이한비는 팀 내 비중이 더욱 줄었다. 수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미희 감독이 이한비 대신 '살림꾼' 신연경을 주전 라이트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가끔씩 전위에서 높이와 공격력이 필요할 때에도 이한비보다는 경험이 더 많은 정시영이 주로 투입됐다. 결국 이한비는 8경기에 출전해 단 21득점을 올리며 본의 아니게 '2년 차 징크스'를 겪어야 했다.

타고난 힘과 과감한 플레이로 흥국생명에 새 바람

 이한비가 더 성장한다면 흥국생명은 더욱 다양한 공격옵션을 활용할 수 있다.

이한비가 더 성장한다면 흥국생명은 더욱 다양한 공격옵션을 활용할 수 있다. ⓒ 한국배구연맹


이한비는 신인 때부터 공격력 만큼은 프로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팀 선배 이재영이나 친구 강소휘처럼 뛰어난 탄력을 갖추진 못했지만 타고난 힘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공격은 마치 V리그 여자부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는 '표장군' 표승주(GS칼텍스)를 연상케 할 정도. 꾸준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재영과 심슨을 보좌할 '제3의 공격수'가 부족한 흥국생명에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임에는 분명하다.

실제로 이한비는 이재영이 대표팀 차출로 불참했던 지난 천안·넵스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2경기에서 24득점을 올리는 괜찮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 심슨의 공격 비중이 큰 흥국생명에서 국내 날개 공격수들은 필연적으로 서브 리시브에 참가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이한비에게는 아직 이재영이나 신연경 같은 안정된 수비를 기대할 수 없다.

불안한 수비 때문에 재능을 낭비(?)하던 이한비는 12일 GS칼텍스전에서 심슨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기회가 찾아왔다. 1세트 후반부터 코트에 선 이한비는 1세트에서만 알토란 같은 3득점을 올리며 흥국생명의 역전극을 주도했다. 특히 24-25로 뒤진 상황에서 쳐내기 공격으로 동점을 만들고 서브득점으로 역전에 성공시키는 장면은 이날 경기의 백미였다. 이한비는 이날 11득점과 함께 40%의 준수한 공격 성공률을 기록하며 흥국생명의 연패탈출에 크게 기여했다.

갑작스럽게 교체 투입된 이한비가 이렇게 맹활약을 펼칠 수 있었던 비결에는 '리시브 면제'도 한 몫 했다. 박미희 감독은 리시브를 하지 않는 심슨과 교체된 이한비에게 리시브의 부담을 주지 않고 공격에만 집중하도록 지시했다. 그렇다고 이한비가 수비를 팽개친 채 공격에만 신경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이날 이한비가 기록했던 11개의 디그 숫자가 적극적이고 치열했던 수비 가담을 증명해 준다.

사실 이한비가 당장 지난 시즌 정규리그 MVP 이재영이나 외국인 선수의 자리를 넘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시즌 중에 수비 실력이 급격하게 좋아질 가능성도 매우 낮다. 하지만 젊은 패기와 묵직한 공격력을 겸비한 이한비는 분명 이번 시즌의 흥국생명에 꼭 필요한 자원이다. 그렇게 착실히 자신의 영역을 넓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팀에서 반드시 필요한 주전 선수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한비가 성장하는 만큼 흥국생명의 전력도 자연스럽게 강해질 수 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프로배구 도드람 2017-2018 V리그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이한비 원곡고등학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