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넷플릭스


지난 5월,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개봉했다. 넷플릭스라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와 일부 극장에서만 상영했다. 이후 영화제 등에서도 상영 기회를 가졌지만, 실제로 감상하지 못한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지금에 와서 한 번 이야기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옥자, 미자 그리고 상징

영화는 동물 보호,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심층적으로 보면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 역시 하고 있다. 영화에서 '옥자'는 자본의 상징이다. 포스터에서 옥자는 자본의 대표인 공장을 등에 업고 있다. 옥자는 버릴 것이 없는 슈퍼 돼지이다. 등심, 갈비, 뒷다리, 모든 것이 유익하다. 맛도 좋고, 양도 많다. 자본에 의해 태어난 옥자는 개와 돼지로 표현되는 부르주아 층의 은유이기도 하며, 동시에 복제된 하층민들의 자아상이기도 하다. 비록 상류층의 이상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말이다.

작품 내의 여러 장면에서 '괴물'에 대한 오마주를 찾을 수 있다. 마치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인 <괴물>을 역전해 놓은 듯하다. 두 작품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기술 면에서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구도가 그렇다. 설정 면에서는 괴물과 옥자는 인간의 인위적인 손길이 닿아 탄생한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옥자는 여러 개체 중 하나이며 괴물은 단 하나이다. 괴물은 사람들을 해치고 옥자는 사람들에게 해침을 당한다. 괴물이 인간의 탐욕이 원죄로서 되돌아온 심판자라면 옥자는 인간의 탐욕에서 보호해야 할 약자이다.

이름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미자는 여자아이다. 그리고 흔한 이름이다. 미자가 가족처럼 아끼는 슈퍼 돼지의 이름은 옥자다. 역시 흔한 이름이다. 게다가 현재에 와선 굉장히 촌스럽다. 어째서 이름이 옥자일까. 아마도 그건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표현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두 흔한 이름이 합쳐 하나의 가족이 된 순간부터 그건 더는 흔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은 복잡한 자기 자신의 내면을 규정하는 하나의 외면이고, 이름을 부르는 둘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서로의 이름을 인식하고 부를 때 우리는 순수해진다. 저 자신의 마음이 온건히 드러나는 발화가 서로에게 닿는다. 옥자와 미자는 그런 존재다. 동물과 인간이라는 언어적 불소통성은 마음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순수함은 옥자가 사는 높은 산골에서 더욱 빛난다. 외부와의 고립된 장소가 순수성을 부각한다.

미자가 집으로 돌아와 짤막하게 보이는 집안에 벽에 걸린 증서가 보인다. 회사로부터 받은 이 우수 축산농민 인증서는 갑과 을의 관계를 은유한다. 가장 우수한 슈퍼 돼지를 길러내기 위해 경쟁하는 26개국의 사람들과 각 나라에 한 명 있는 돼지 주인들은 당연히 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조차 자본에게 주어진 하나의 씨앗을 키워 결실로서 내놓는다. 결국,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 보았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본의 노예다.

교차하는 두 가지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평화로운 미자와 옥자의 생활에 누군가가 찾아온다. 약속한 10년이 되어 베스트 슈퍼 돼지로 선정된 옥자를 보러 온 회사의 관계자들이다. 그중에서도 대표 격인 조니 박사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착해 보인다. 일행은 조니 박사를 유명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로 소개한다. 시골 소녀인 미자도 한 번에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사실 조니는 악인이다. 영화의 후반에서 조니가 옥자의 고기 샘플을 채취하는 장면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조니는 옥자의 고기를 먹어보고 싶어 한다. 옥자는 감금된 공간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고통스럽게 샘플을 채취당한다. 옥자는 울부짖는다. 조니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이면서 정작 언론 밖의 동물과는 소통하지 않는다. 그가 선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화면 속에서뿐이다. 

이중적인 조니 박사의 역할은 축산 동물을 바라보는 사회의 두 가지 시선을 우리에게 견지한다. 분명 여러 동물이 사회에서 상업적으로 이용된다. 그건 고양이나 강아지와 같은 반려동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식탁에 올라온 고기를 먹으면서도 반려동물에게는 충실하다. 그런 면에서 작중에 등장하는 동물 해방 전선은 조니 박사와 역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생명체를 구원하는 단체와 자기 생명체를 구원하는 개인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영화에서 미자와 동물 단체는 서로 협력하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며 같은 목표를 갈망한다. 그 둘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회적 논제이다.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회사의 대표는 쌍둥이로 루시 미란도와 낸시 미란도이다. 둘은 서로 의견이 다른데, 각각 온건파와 급진파이다. 루시는 사악하고 교활하다. 겉으로 회유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돼지를 돌려줄 마음이 없다. 언론과 인맥을 이용해 교묘하게 대중을 선동한다. 루시의 회유 정책이 실패하자 곧바로 취임하는 낸시 또한 사악하다. 언론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는 낸시는 마치 자본의 태세전환처럼 보인다. 본래 회사의 CEO였던 루시가 자사의 이미지를 위해 옥자를 구하려는 미자의 마음을 간사하게 이용했다면, 낸시는 루시가 해왔던 모든 것을 중지시키고 밀어붙인다. 루시의 선동과 날조를 위시한 대외 전술은 디케의 눈을 가린다. 낸시의 기업의 이익에 해가 된다면 어떤 행위라도 할 것만 같은 자본은 진흙탕처럼 추잡하다. 그리고 이 두 대표의 전환과정은 빠르고 신속하다.

이 두 대표는 서로에게 역의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두 인물을 합치면 동물 단체와도 대비된다. 동물 단체는 분명 옥자를 구한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으나, 그것을 향해가는 방법에서는 회사와 다를 바가 없다. 옥자를 구하기 위해 미자를 추악한 진실의 구렁텅이에 던져 넣은 것이나, 거짓과 가증으로 점철된 그들의 비뚤어진 폭력성이 그렇다. 어떻게 보면 대의를 위해 소인을 희생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미자는 확실한 혼자다. 두 단체에 이용당하는. 그리고 여자아이다.

탐욕과 탐욕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탐욕에서 옥자를 구원하는 것은, 또 다른 탐욕의 상징이었던 금 돼지이다. 영화의 결말 부에서 미자는 옥자를 구하기 위해 공장으로 달려간다. 숨을 헐떡이는 미자가 공장에 도착하자 마침 라인 가동이 한창이다. 도살 담당자는 돼지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기계에 밀어 넣는다. 그 모습을 본 미자는 경악을 감추지 못한다.

차례가 되어 이제 막 도살이 되려고 하는 옥자의 모습이 보이고, 미자는 다급하지만, 천천히 옥자를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말없이 도살 기계를 운용하는 담당자에게 한 장의 사진을 건넨다. 사진 속에는 미자와 옥자와 어린 시절이 담겨있다. 담당자는 기계 가동을 멈추고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하던 담당자는 이윽고 사진 속의 소녀와 눈앞의 소녀를 번갈아 쳐다본다. 미자의 침입으로 울린 경고음에 회사의 운영진들이 달려온다. 회사의 대표를 필두로 한 임원들이 미자를 내려다보고, 미자는 대표를 향해 항의한다. "옥자를 죽이려는 이유가 뭐야?" 대표가 대답한다. "우리는 죽은 것만 팔거든." 이에 옥자가 울먹이며 말한다. "옥자와 함께 집에 가게 해주세요." 대표는 미자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옥자는 우리 회사의 자산이야", "우리는 자랑스럽게 일하는 사업가들이야", "여기 있는 모든 게 우리가 거래하는 것들이지", "돼지는 버릴 게 없어." 말을 마치고 대표는 담당자에게 옥자의 도축을 명한다. 총구는 옥자의 머리를 겨눈다.

"잠깐만요" 미자는 지금껏 허리춤의 가방에 넣어두었던 묵직한 금 돼지를 대표에게 던진다. 옥자와는 다른 모습의 돼지가 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이기에 가치는 크다. "내가 옥자를 사겠어. 산채로" 대표는 금 돼지를 보고 흐뭇해하며 옥자를 풀어준다. 말투와 어조는 전과 다르게 미자를 고객으로 칭하며 예우한다. 그리고 부하에게 명령한다. "우리 회사 슈퍼돼지의 첫 번째 구매자이니 정성껏 모셔" 지금껏 영화가 말하던 탐욕에 대한 항의는 이렇게 깨어진다.

작중에서 탐욕에 항의하는 두 인물, 미자와 동물 단체는 회사에 대항해 옥자를 쫓는다. 그래서 이 작은 혁명을 따라가던 우리는 미자가 옥자에게 돼지 모양의 금덩어리를 내미는 순간 허무함을 느낀다. 허무함은 그동안 영화가 보여주던 탐욕에 대한 가치가 뒤집히며 온다. 분명 영화에서 자본으로 규정된 회사 부르주아의 모습을 미자가 똑같이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가? 가족 같은 옥자를 돈으로 환산해서 거래하다니.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항하는 우리의 모습이고, 결국 자본을 움직이는 건 또 다른 자본이라는 사실이 실망스럽다. 회사를 쓰러트리고 그 위에 올라서는 미자의 모습을 원했던 우리의 상상 속 쿠데타는 깨어졌다.

미자가 구한 건 고작 옥자뿐이지만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미자가 옥자를 데리고 나오는 길고 어두운 길목은 돼지들의 낮은 울음소리로 스산하다. 카메라는 끝없이 펼쳐진 돼지들의 무리를 부감으로 비추고, 집으로 떠나는 옥자를 화면에 잡는다. 미자는 옥자를 찾아 집을 떠나온 순간부터 차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버린다. 앞으로 걸어가는 미자와 옥자를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며 철조망 너머의 돼지 무리를 잡는다.

그때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고, 미자는 그곳을 쳐다본다. 돼지들이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총성이 연이어 이어진다. 다시 카메라는 옥자와 미자를 따라 앞으로 이동하는데, 철조망 너머로 돼지 가족이 옥자를 따라온다. 졸래졸래 따라오는 새끼 돼지가 귀엽다. 그들을 본 미자는 발걸음 속도를 천천히 늦춘다. 돼지 부부는 새끼 돼지를 철조망 너머로 밀어 넣는다. 새끼 돼지는 철조망 너머로 나와 당황하고, 그것을 본 옥자는 새끼 돼지를 입안으로 숨긴다. 미자는 눈물을 흘린다. 새끼 돼지를 떠나 보낸 돼지 부부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모든 대지에 있는 돼지들이 구슬피 울기 시작한다. 자식만큼은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기를 제공해야만 하는 축산 동물의 인생은 불행하다. 아무런 인도적 장치 없이 살해되고 소비된다. 옥자는 자본에 의해 키워졌고 자본에게 소비되며 자본을 활용한 덕에 구출되었다. 옥자는 전 세계 26개국의 축산 농민들에게 맡겨진 슈퍼 돼지 중 한 마리이다. 동시에 결말 부에서 미자가 옥자를 데리고 회사를 빠져나오는 장면에서 보이는 수많은 돼지 무리 중 한 마리이다. 우리 또한 그렇다. 슈퍼 돼지는 단지 축산 자본의 어두운 단면을 표현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에 대항하지만 결국 자본의 손아귀에 있다. 아무리 분노하고 투쟁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공장을 빠져나오는 길목 시퀀스의 다음으로 이어지는 고향에서의 첫 장면에서 옥자는 잠에서 깨어난다. 마치 지금까지의 일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곳은 현실이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새끼 돼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새끼 돼지는 도입부에서 미자가 놓아준 작은 피라미와 대비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집 안 벽에는 우수 축산 농민 증서가 없다. 그리고, 처음처럼 여전히 평화롭다.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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