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12일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국내 개봉했다. 이미 유료 시사회를 통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35년 전 작품 <블레이드 러너>(1982)의 철학을 잘 계승했다는 관객들과 그렇지 않고 지루하고 어렵다는 관객들로 나뉜다. 평점은 8점 후반대로 출발해 조금씩 하락하고 있다. 예매율 역시 1위 자리를 넘겨줬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작을 드니 빌뇌브 감독이 이어간다고 했을 때 많은 영화광이 기대했다. 드니 빌뇌브는 전쟁의 상흔을 로드무비의 감성으로 그려낸 <그을린 사랑>(2011)으로 이미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프리즈너스>(2013) <시카리오>(2015) <컨택트>(2016) 등으로 장르를 넘어선 영상 미학과 탄탄한 이야기 구조, 숨 막히는 반전으로 두터운 팬층을 확보했다. 그런 그가 전설적인 <블레이드 러너>의 2편을 만들었다.

영화는 이미지다.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와 서사가 핵심인 장르는 소설이다. 영화는 결국 보여주는 것으로 승부한다. 이미지들의 향연을 감상하고 싶은 욕구가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모은다. 장면들은 때론 인과율에 의해 때론 시간에 따라 엮이고 이어진다. 하지만 한 장면, 한 장면 공을 들인 영화는 종종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도 한다.

강동원 주연의 < M >(이명세 감독, 2007)이 대표적이다. < M >은 빛과 어둠,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을 조명으로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지만 관객들로부터 소외당한 비운의 작품이다. 사실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 역시 관객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뛰어난 영상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인간-리플리컨트(인조인간) 간 심오한 철학은 나중에야 재발견되었다.

영화는 결국 이미지로 승부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뛰어난 영상미 자체만으로 영화는 탁월하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뛰어난 영상미 자체만으로 영화는 탁월하다. ⓒ 소니픽처스코리아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미지로 승부하는 작품이다. 한 마디로 영상미가 빼어나다. 러닝 타임 2시간 43분 동안 이미지들에 압도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영화음악의 거장 한스 짐머가 OST에 공동으로 참여해 이미지들의 미학을 극대화했다. 강철과 엔진의 거친 질감을 영화에 걸맞은 음악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영화는 자원이 고갈되고, 기후가 변해버린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이미지와 음악으로 보여준다. 이게 이 영화를 보게 되는 제1의 이유가 될 것이다.

관건은 난해하게 보일 수 있는 이야기다. 전편 <블레이드 러너>의 서사를 승계하고 있기 때문에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이해하기 위해 그 중간에 일어난 대정전과 리플리컨트의 생산 복구 등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온라인을 통해 3편의 애니메이션 포함, 짧은 영화 <대정전(Black Out) 2022><2036: 넥서스의 여명(Nexus Dawn)><2048: 도망칠 곳은 없다(Nowhere to Run)>를 공개했다. 왜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이야기가 탄생하게 되었는지 미리 알려준 것이다. 이 3편을 봐야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더해 감독은 영화 시작에 긴 자막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리플리컨트는 복제품을 뜻하는 '레플리카(replica)'와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뜻하는 '레버넌트(revenant)'가 합쳐진 말이다. 생명을 복제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을 극복했다는 의미가 강하다. 죽음이란 인간이나 인간 복제물이나 모두 극복할 수 없는 한계다. 아무리 자식을 많이 낳아도 그 자식들이 다시 재생산이 불가능하다면 죽음은 극복 불가능하다. 영화 속 월레스가 그토록 바라던 리플리컨트끼리의 재생산이 중요한 이유다.

블레이드 러너는 단지 코드 네임일 뿐이다. 마치 경찰들이 '신세계' 프로젝트를 진행하듯이 말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리플리컨트를 찾아내 제거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일종의 특수 경찰인 셈이다. 그런데 왜 굳이 검의 날을 뜻하는 '블레이드'가 붙었는지는 의문이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도 블레이드 러너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시나리오를 작성하면서 다른 소설에서 언급된 블레이드 러너란 말을 차용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다. 어쨌든 영화 속에선 블레이드 러너가 리플리컨트를 잡는 일을 한다.

리플리컨트와 블레이드 러너에 숨은 뜻

영화 속 리플리컨트의 제조 과정 리플리컨트는 복제인간이다. 그런데 인간과 복제인간은 서로를 탐하며 공생할 운명이다.

▲ 영화 속 리플리컨트의 제조 과정 리플리컨트는 복제인간이다. 그런데 인간과 복제인간은 서로를 탐하며 공생할 운명이다. ⓒ 소니픽처스코리아


<블레이드 러너 2049>가 핵심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두 가지이다. 첫째, 내가 나라는 건 과연 어떻게 깨닫게 되는가? 나라는 존재는 부모로부터 혹은 나와 대비되는 다른 부류로부터 혹은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로부터 증명된다. 영화는 이 모든 것을 흔들어놓는다. 부모도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도 주변의 모든 것들도 거짓이라면 과연 나는 누구인가? 사실 이 질문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의 속성이지만 리플리컨트도 충분히 질문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게 한 것이다. 나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들이 실재한다는 것은 알겠으나 그 실재성이 의심 투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일 뿐이다. 허무주의다.

둘째, 영화의 모든 인물이 리플리컨트가 아닐까 의심된다. 나의 존재가 의심스럽다면 과연 내가 인간인지, 인조인간 리플리컨트인지 알 수 없다. 실제로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인간이라는 증거가 없다. 퇴역한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조차 과연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 확신할 수 없다. 30년 동안 방사능이 있었던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방사능이 줄어들어 인간이 살만한 정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처음엔 분명 인간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K(라이언 고슬링)는 리플리컨트로서 리플리컨트를 제거하러 다닌다. 같은 역할이라면 같은 부류의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

리플리컨트인 K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경찰 국장 조시(로빈 라이트)의 정체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조시는 월레스와 긴밀하게 엮여 있다. 조시는 리플리컨트의 혁명을 두려워하지만 붙잡혀 온 K에게 48시간을 유예해준다. 특히 K 앞에서 술을 마시며 문득 애정을 보일 듯 말 듯 한 장면은 조시가 과연 인간인지 헷갈리게 한다. 홍채를 인식해 확실히 구분하지 않는 이상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 알 길이 없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분명 전편의 세계관을 충실히 이어받으며 확장해냈다. 그 세계관은 복제인간의 시대에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인문학적 성찰을 하게끔 한다.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간주되던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이제 리플리컨트에게 이어진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리플리컨트인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정말 디스토피아인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과연 인간과 리플리컨트를 구분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기계 없는 인간, 인간 없는 기계란 애초부터 없다. 서로가 기생하며 살아왔다. 영화뿐만 아니라 인간과 기계는 서로를 탐하며 공생해왔다. 우주 식민지인 오프월드 vs. 지구, 인간 vs. 리플리컨트, 비 vs. 눈, 이 경계들을 지워버리고 싶은 게 리플리컨트들의 욕망인지 모르겠다. 기계의 관점에서 말이다.

블레이드러너2049 블레이드러너 리플리컨트 드니빌뇌브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술문화, 과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