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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메르루즈 공산게릴라들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양인 프랑스와 비조의 자서전과 영화 '고백의 시간'에도 등장하는 1975년 당시 프랑스 대사관 정문 철제문의 최근 모습.
 크메르루즈 공산게릴라들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양인 프랑스와 비조의 자서전과 영화 '고백의 시간'에도 등장하는 1975년 당시 프랑스 대사관 정문 철제문의 최근 모습.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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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구의 무려 1/4에 해당되는 200만 명의 목숨을 잃게 만든 '킬링필드'는 캄보디아 양민들만 희생의 제물로 삼은 게 아니다. 남겨진 문헌 기록에 따르면, 최소 수십 명의 외국인들이 내전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크메르루즈의 잔혹한 대학살기록이 남아 있는 프놈펜 뚜엘슬렝 박물관에 가보면 수천 장이 넘는 캄보디아 희생자들의 흑백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푸른 눈을 가진 이방인들의 사진도 여러 장 시선을 사로잡는다. 당시 이들은 대부분 미국 CIA나 소련 KGB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이곳에서 고문 끝에 처형당한 외국인들이다.

하지만 당시 외국인들이 목숨을 잃은 곳은 이 수용소뿐만 아니다. 1970년대 초 내전 당시 전국 어디서든 외국인 중에서도 서양인들은 무조건 크메르루즈의 주요 표적이 됐고, 일단 체포되면 살아서 제 발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크메르루즈에 잡혔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럽인

킬링필드 당시 크메르루즈에 붙잡혔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럽인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크메르루즈군 지도자와 훗날 크메르루전범재판 법정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 프랑스인 프랑스와 비조씨.
▲ 킬링필드 당시 크메르루즈에 붙잡혔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럽인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크메르루즈군 지도자와 훗날 크메르루전범재판 법정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 프랑스인 프랑스와 비조씨.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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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중에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니, 유일한 서양인 생존자가 딱 한 명 있었다. 프랑스 낭시 출신 민속학자 프랑스와 비조(François Bizot)씨다. 그는 1965년 이 나라 불교 관련 연구를 위해 캄보디아에 왔다. 현지여성과 만나 딸까지 둔 행복한 삶을 영위하던 어느 날 그는, 훗날 자신의 책으로도 남기게 되는, 인생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된다. 앙코르와트 복원사업팀에 합류해 유적복원 연구를 하던 중, 현장에서 수 십km쯤 떨어진 북부 안롱벵 지역을 근거지로 게릴라로 활동하던 크메르루즈군에게 그만 붙들리고 만 것이다.

1971년 10월 어느 날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는 함께 일하던 2명의 캄보디아 출신 동료들과 함께 붙들려 'CAMP M.13'이란 곳에서 이들로부터 갖은 고문과 고초를 당하게 된다. 끝까지 저항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에게는 여느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CIA 첩자라는 누명을 썼다. 이후 들쥐와 뱀,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깊은 정글, 지옥 같은 감옥에 갇혀 그는 공포와 허기 속에 4개월이나 버텼다. 극단적 허기와 눈앞에 서성이는 죽음의 공포 속에 그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에게 어쩌면 살아서 빠져나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이 생긴다. 자신의 납치를 주도하고 직접 심문까지 했던 게릴라군 우두머리와 예상치 못한 특별한 인간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어두운 밤 둘 사이 깊은 대화가 오가게 되고, 마침내 이들은 서로의 생각까지 공유하게 된다. 한갓 영어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비조 자신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 크메르루즈의 가리어진 민낯과 허상까지 깨닫게 된다. 그자는 다름 아닌, 훗날 1만 4천 명 민간인들을 학살해 악명높은 뚜얼슬렝 수용소 소장에 오르게 되는 '카엥 구엑 이에우'였다.

'두잇(Duch)'이란 또 다른 별명을 가진 그는 이후 당 지도부에 이 서양인에게는 첩자혐의가 없다는 장문의 상세보고서를 올리게 된다. 그 덕에 그는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자신을 잡은 자가 결국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두잇과는 그렇게 기약 없는 작별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풀려난 다음날 남은 2명의 캄보디아인 동료들은 무참히 살해당하고 만다. 그가 기억하는 1971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파란만장했던 그 자신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다. 그로부터 4년이란 시간이 흐른 1975년 4월 어느 날 또 다시 그는 평생에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역사적 순간들과 마주치게 된다.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이 공산화되던 날

 1970년대 내전 당시 크메르루즈 공산게릴라군에 의해 희생된 서양인의 흑백사진을 한 여행객이 지켜보고 있다.
 1970년대 내전 당시 크메르루즈 공산게릴라군에 의해 희생된 서양인의 흑백사진을 한 여행객이 지켜보고 있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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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목숨을 건져 나온 후에도 그는 캄보디아를 떠나지 못했다. 이후 미군의 갑작스러운 철수선언에 이어 공산혁명세력인 크메르루즈군들이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키려 돌진해오자, 그 역시 살아남기 위해 프랑스 대사관 안으로 급히 피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곧바로 절대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인물이 된다. 크메르어와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유창했기에 그는 대사관 내 비공식통역원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대사관 철제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크메르루즈 군인들과 소통하고 협상을 주도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다.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사관 관내에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들어온 캄보디아인들과 외국인들 수가 무려 3천 명이 넘었다. 미국 <뉴욕 타임스> 시드니 쉔버그 같은 외국종군기자들도 프놈펜이 공산화되는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마지막 취재를 마친 채 대사관으로 들어와 오직 이 나라를 탈출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고, 그중에는 한국인도 한 명 있었다(우리나라 외교부가 30년 만에 공개한 외교기밀문서자료에 따르면, 항공기술자 김대국씨가 이 안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나온 관련 기록에 따르면, 그해 5월 3일 무사히 태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 외에도 프랑스 대사관 안에는 크메르루즈가 척결대상 1순위로 뽑은 론놀 정부에서 일했던 정부고위 관료들과 그 가족들도 수백여 명이나 숨어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힘있는 외국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신들만큼은 무사히 이 나라를 탈출할 수 있을 거란, 한 가닥 희망을 품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 떨던 이들에게 운명의 신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협상과정에서 크메르루즈 당국은 외국 여권이 없는 캄보디아 자국민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대사관 밖으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만약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식량은 물론이고, 물과 전기를 끊을뿐더러 다른 외국인들의 신변안전도 보장 못 한다고 협박했다. 비공식 통역원 역할을 했던 그는 이 같은 요구내용을 프랑스 대사관 총영사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중앙정부의 훈령을 받은 프랑스 대사관은 곧바로 가장 냉정하고 비인도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대사관에 들어온 사람들을 선별하고 솎아내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캄보디아인일지라도 외국인과 결혼한 현지여성과 자녀들은 신원서류만 확인되면, 대사관 안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국 여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남성들은 결혼서류가 있어도 예외로 남겨졌다. 이들은 다른 캄보디아인들과 함께 대사관 밖으로 쫓겨났다(훗날 이 같은 프랑스 외교당국의 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처사는 훗날 피해자들의 유가족들에 의해 법정분쟁으로 비하되며, 인권국가를 자처해온 프랑스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주게 된다).  

영화 <미션>으로 유명한 롤랑 조페 감독이 지난 1984년 만든 영화 <킬링필드>에도 이 장면이 나온다. 시드니 쉔버그 기자도 작고하기 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극적 분위기 연출을 위해 동료이자 통역원이었던 딧 프란의 위조여권을 조작하는 장면만 거짓일 뿐, 당시 프랑스 대사관 안팎에서 벌어진 실제 일어난 상황과 분위기는 영화 속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증언한 바 있다.

대사관 철제 문밖에는 AK소총을 든 검은색 옷차림의 크메르루즈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해진 수순대로 이들은 모두 체포됐다. 신원조회를 통해 고위공무원들과 그 가족들이란 사실이 발각난 사람들은 군인들에 의해 시내 후미진 어디론가 끌려가 이후 실종되고 말았다. 결과는 미루어 짐작되고도 남는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소위, 그들이 말하는 노동재활교화소 또는 협동농장 등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기아로 죽거나, 혁명의 반동세력으로 몰려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 이것이 이미 영화나 책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킬링필드'의 실상이며, 비극적 결말이기도 하다.

대사관 철제문을 간신히 벗어난 그는...

 프랑스출신 민속학자 프랑스와 비조가 실제 경험한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 '고백의 시간'  불어버전 포스터.
 프랑스출신 민속학자 프랑스와 비조가 실제 경험한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 '고백의 시간' 불어버전 포스터.
ⓒ 영화 '고백의 시간' 공식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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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운좋게 대사관 안에 남을 수 있던 사람들은 철문 밖으로 쫓겨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은 대사관 정문에 놓인 2m 남짓 철제문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줄 유일한 보호 방책인 동시에 자신들의 생과 사를 가를 수도 있는 '죽음의 문'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냉혹한 현실 인식은 이 철문 너머로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쳐내는 데 일조했던 프랑스와 비조 자신도 공유했을 게 분명하다. 

이후 그 자신을 포함해 프랑스 대사관에 남아 있던 외국인들은 프랑스 정부와 크메르루즈간 협상이 간신히 타결돼 함락 이후 한 달여가 지난 5월 중순 무렵 트럭에 실려 태국 국경을 통해 캄보디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10년간 살았던 이 나라와의 기약없는 이별이었다.

고향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먼 훗날 자신이 직접 목격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경험을 토대로 한 권의 책을 쓰게 된다. 무려 28년이나 지나 과거의 후유증과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뒤다.

영어로도 번역 출간되는 바람에 <더 게이트(The Gate)>로 알려진 이 책의 불어 원제목은 <정문과 사형집행인의 침묵(Le Portail and Le Silence du Bourreau)>이다.

책 제목만 보더라도, 당시 사람들의 생사를 갈랐던 대사관 철문이 갖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이 문 너머로 사람들을 사지로 내몬 당시 프랑스 외교관들의 비정함을 '사형집행인들'로 묘사한 대목 역시 눈길을 끈다. 비공식 통역원이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기력과 당시 느꼈을 인간적 고뇌와 감정 역시 이 책 제목에 고스란히 스며든 듯싶다.    

이 책은 이후 영화 <인도차이나>로 제65회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레지스 와그니어 감독에 의해 2014년 영화로도 이후 만들어지게 된다. <자백의 시간(원제 Les Temps des Veux)>이란 제목의 이 영화는 그해 캐나다 텔루라이드 영화제와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대되었을 뿐더러,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출품돼 한국 영화팬들에게도 소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려 35년이 지난 어느 날, 프랑스와 비조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평생 지우고 싶었던 캄보디아를 다시 찾게 된다. 곧바로 그는 자신을 정글 감옥에 풀어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크메르루즈 뚜얼슬렝 교도소 소장 두잇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해후한 장소는 유엔이 주도하는 크메르루주전범특별재판소(ECCC) 증인 법정에서였다. 그는 공교롭게도 투얼슬렝 수용소 대학살사건의 주범인 두잇의 사건공판 첫 번째 증인으로 채택됐다. 영화에서나 나옴 직한, 아이러니하면서도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두잇은 2012년 열린 첫 재판에서 3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2심 최종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열린 내부공개의 날, 그 '철제문'을 찾다

수도 프놈펜 캄보디아 프랑스대사관 전경 약 60년전에 건립된 이 대사관 건물은 70년대 캄보디아 역사의 아픈 상처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수도 프놈펜 캄보디아 프랑스대사관 전경 약 60년전에 건립된 이 대사관 건물은 70년대 캄보디아 역사의 아픈 상처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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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30일 헤리지티 데이를 맞아 일반인에게 공개된 캄보디아주재 프랑스대사관 내 관저 응접실 내부의 모습.
 지난 9월 30일 헤리지티 데이를 맞아 일반인에게 공개된 캄보디아주재 프랑스대사관 내 관저 응접실 내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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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지난 9월 30일은 '헤리티지 데이'(Heritage Day)였다. 이날은 프랑스가 전 세계에 전파된 자국의 문화유산을 외부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날이다. 수도 프놈펜에 주재한 60년 된 프랑스 대사관도 일반인들에게 하루 동안 대사관 건물과 내부를 공개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른 아침부터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기다리는 약간의 수고로움과 까다로운 몸수색, 그리고 소지품 검사까지 감내한 뒤 마침내 프랑스 대사관 문 안으로 들어섰다. 흰색 페인트칠을 한 오래된 대사관 건물동과 그 옆으로 펼쳐진 3헥타르 공원 부지가 순간 눈앞에 나타났다. 말로만 듣던 과거 역사의 현장에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은 들떴다. 정원 전체가 열대나무들과 잘 키운 꽃들로 장식되어 있어 마치 거대한 수목원에 들어온 느낌을 들었다.

하지만 울창한 열대나무숲과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하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프놈펜 함락 당시 사용되었다는 그 철제 대문을 제일 먼저 찾았다. 오랫동안 꼭 한 번 보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바로 그 철제문이었다. 이 문은 프랑스와 비조 자신의 기억속에 남아 있던 바로 그 문인 동시에,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한 레지스 와그니어 감독의 영화속에도 실제 등장하는 그 철제문이다. 다행히 정원 한가운데 놓인 이 철제문은 프랑스 대사관 측에 의해 잘 보존·관리되고 있었다.

낡고 녹슨 이 철제문 앞에 놓인 안내문을 들여다보니, 크메르어와 불어로 이 문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사진 2장이 붙어 있었다. 1970년대 대사관 정문 풍경을 담은 오래된 사진 한 장과 이 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 철제문 위로 큰 여행용 가방이 오가는 모습이 담긴 또 다른 사진 한 장이었다. 이 사진 아래에는 1975년 4월 17일이란 날짜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이날은 수도 프놈펜이 공산 게릴라세력의 손에 의해 함락된 날이자, 인구대학살 '킬링필드 시대'의 서막을 알린 날이기도 하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낡고 페인트까지 벗겨진 채 힘겹게 서 있는 철제문 곁에 한 발짝 다가갔다. 차가운 철망을 만지려는 순간 온몸에 전율처럼 소름이 돋았다. 뾰족한 송곳 같은 가시가 달린 이 철제문을 넘어 살기 위해 매달리고 몸부림쳤을, 겁에 질린 사람들의 처절한 눈빛과 '아비규환'이란 다름없던 당시 상황이 머릿속을 순간 사정없이 흩트려 놓았기 때문이다.

 대사관내 정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크기에 울창한 숲과 잘 가꾼 열대식물들로 꾸며진 프랑스대사관내 공원 모습.
 대사관내 정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크기에 울창한 숲과 잘 가꾼 열대식물들로 꾸며진 프랑스대사관내 공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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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각 이곳을 찾은 이 나라 젊은 세대들은 당시 그들의 부모세대가 느꼈을 공포나 비극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이 철문이 외국영화의 소재가 되었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에 그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문에 기대 기념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마도 크메르루즈 컴플렉스에 벗어나지 못한 정부당국에 의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참고로, 32년째 장기집권중인 훈센 총리는 옛 크메르루즈 군사령관이었다.)

간혹 이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에 조금은 마음이 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낡고 녹슨 이 철제문은 "그저 지나간 과거는 이미 과거일 뿐"이라는 듯, 애써 긴 침묵속에 이들을 조용히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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