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을 꼽아 보라고 하면 보통은 어머니를 떠올릴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걸음마 하던 시절부터 장성하여 결혼한 후까지 가장 많은 기억을 남겨 주신 분입니다. 늘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머니 속도 많이 썩여 드렸지만요.

이 영화 <우리의 20세기>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1979년 여름, 기업 제도실에서 유일한 여성으로 일하는 55세의 도로시아(아네트 베닝)는 이혼한 후 열다섯 살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먼)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예술가 지망생인 20대 여성 세입자 애비(그레타 거윅)와 제이미의 친구로서 자기 집 드나들듯이 놀러 오는 줄리(엘르 패닝), 1층 인테리어 공사를 맡아 거기서 숙식하며 지내는 윌리엄(빌리 크루덥)은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람들입니다.

40세에 낳은 외아들 제이미가 잘 커가기를 바라며 노심초사하던 도로시아는, 어느 날 제이미가 친구들과 기절 놀이를 하다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 하는 일을 겪자 대책을 강구합니다. 도로시아는 애비와 줄리를 따로 불러 부탁하죠. 제이미가 좋은 남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요. 자기가 없는 시간에 제이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자기와 못하는 이야기를 나누면 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겁니다.

세대와 상황이 다른 세 여성의 삶

 영화 <우리의 20세기>의 한 장면. 도로시아(아네트 베닝)은 애비(그레타 거윅)와 줄리(엘르 패닝)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영화 <우리의 20세기>의 한 장면. 도로시아(아네트 베닝)은 애비(그레타 거윅)와 줄리(엘르 패닝)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설정만 보자면 제이미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극 중에서 제이미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관찰자이자 그들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 영화가 진짜 주목하는 것은 세 여성 도로시아, 애비, 줄리의 삶입니다.

2차대전 중 전투기 조종사가 되려고 훈련까지 받았던 50대 중반의 도로시아는 사회생활 내내 여성이라서 안 된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해 온 인물입니다. 20대 중반의 애비는 뉴욕에서 예술을 공부했지만, 뜻하지 않은 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10대 후반에 들어선 줄리는 심리 상담사인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소녀죠.

이들이 현실에서 부닥치는 문제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고민은 1970년대에 활발하게 전개됐던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쟁점들을 잘 짚어내기 때문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 관객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은 인물의 삶을 보여 주는 방식입니다. 일반적인 극영화처럼 등장인물의 삶에 개입해서 탄탄한 플롯을 짜고 작가의 의도를 삽입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저 인물을 가만히 지켜보고 다양한 일화를 포착할 뿐입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악과 화면 효과, 무수히 삽입된 스틸 컷들, 당시의 페미니즘 도서들, 내레이션 등은 이 영화만의 독특한 표현 양식을 만들어 냅니다. 문학으로 치면 소설, 에세이, 시의 특성을 모두 지녔다고 해야 할까요?

아네트 베닝과 그레타 거윅, 엘르 패닝은 섬세한 내면 연기를 통해 자기가 맡은 인물을 매우 구체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업계에서 이들이 쌓아 온 배우 경력은 영화 속 인물들의 설정과 묘하게 겹치면서, 실제 그 인물이 된 듯한 느낌을 더합니다. 아네트 베닝은 할리우드 최고 여배우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급속하게 주연급과 멀어졌고, 그레타 거윅은 주로 미국 독립 영화에 출연하면서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장편 영화를 찍었으며, 엘르 패닝은 아역 출신에서 본격적인 성인 연기자로 발돋움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관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황혼기

 영화 <우리의 20세기>의 스틸. 작품의 배경인 1979년은 의미 있는 시기이다.

영화 <우리의 20세기>의 스틸. 작품의 배경인 1979년은 의미 있는 시기이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이 영화의 배경이 1979년 여름인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때는 미국 역사에서 진보적 자유주의가 거의 마지막 황혼을 불태우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해 말에 이란 미 대사관 인질 사건이 일어나면서 당시 대통령이던 카터의 '도덕 외교' 노선이 크게 흔들렸고,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진보적 자유주의는 지속해서 위축됐습니다.

사실 1970년대 미국 사회는 정치, 경제적으로 '보수의 반격'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1972년 닉슨이 압도적인 표 차로 대통령에 재선된 것, 그리고 1973년의 석유 파동은 보수화를 촉진했습니다.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 정치는 공화당이 대표하는 정치적 보수주의자와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카터, 클린턴, 오바마 등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이 있었지만 흐름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동산 자본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특이한 현상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지식인과 중산층에게 미래가 이렇게 전개될 거라는 얘기를 들려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닉슨의 사임과 베트남전 종전 선언, 그리고 민주당 출신 카터의 극적인 당선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진보의 시대가 계속될 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곤 했으니까요. 영화에도 나오지만, 사회 문화적으로도 페미니즘 이론이 선풍을 일으켰고 관습 파괴적인 펑크 음악이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영화의 쓸쓸한 분위기를 한층 강조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과 달리,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아는 관객들로서는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습니다. 40여 년이 지나도록 '20세기' 여성들이 제기하는 쟁점 중 많은 부분이 여전히 논쟁거리인 채로 남아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희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현실로 바꾸려는 노력은, 시대의 기억을 기록한 이 영화 같은 시도를 통해 세대를 넘어 계속될 테니까요.

 영화 <우리의 20세기>의 포스터. 1979년 미국에서 살아가는 세 여성의 삶을 통해 시대와 장소를 넘어 공감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는 영화다.

영화 <우리의 20세기>의 포스터. 1979년 미국에서 살아가는 세 여성의 삶을 통해 시대와 장소를 넘어 공감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는 영화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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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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