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던 때는 아마도 중학생 무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 딴에는 세상 돌아가는 걸 좀 알겠다 싶을 때라, 지구 밖에 있을 법한 다른 삶이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우주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만화로 된 어린이 과학 교양서에 나온 정도밖에 없었지만, 특이하게 생긴 외계인을 만나거나 이국적인 외계 행성을 여행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죠.

뤽 베송 감독의 신작 SF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는 바로 그런 종류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발레리안과 로렐린>이라는 프랑스의 인기 SF 만화책 시리즈를 바탕으로 만든 이 작품은, 프랑스 영화 사상 최고인 2억 9백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다고 합니다.

 영화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한 장면. 도입부에 소개되는 미지의 행성 뮬의 아름다운 경치와 종족 설정은 굉장히 공을 들인 것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영화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한 장면. 도입부에 소개되는 미지의 행성 뮬의 아름다운 경치와 종족 설정은 굉장히 공을 들인 것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 판씨네마(주)


우주수호부의 일급 요원 발레리안(데인 드한)과 로렐린(카라 델레바인)은 늘 아웅다웅하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아끼는 최고의 파트너입니다. 이들은 도난당한 우주 정부의 재산이자 신비의 생물인 '컨버터'를 회수하라는 임무를 아슬아슬하게 완수한 후, 수천 가지 외계 종족이 드나드는 거대 우주정거장 알파로 귀환합니다.

방사능이 검출되는 알파 내부의 특정 구역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은 발레리안과 로렐린은, 신원 불상의 외계 종족으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클라이브 오웬)이 생포당하고 발레리안의 생사 역시 알 수 없게 됩니다. 로렐린은 무모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윗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발레리안을 찾아 나섭니다.

현란한 시각 디자인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현란하게 묘사된 우주 곳곳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외계 행성의 풍경, 다양한 성격의 외계 종족들, 우주선을 비롯한 여러 기계 장치들의 다채로운 디자인 등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일반적인 SF 영화 세 편에 나올 법한 분량의 CG 화면이 이 한 편에 다 들어 있습니다.

주인공을 맡은 데인 드한과 카라 델레바인의 연기도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특히, 두 사람이 한 화면 안에서 함께 연기할 때가 좋습니다. 재치있게 비꼬는 대사를 주고받으며 밀당을 하는 동안 꽤 흥미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지거든요. 시간이 갈수록 높아져 가는 두 사람 사이의 성적 긴장감은 영화 전체로 봤을 때 서브 플롯에 불과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느린 템포로 심심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입니다. 발레리안과 로렐린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딱히 심각한 장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만나지 않습니다. '어떤 외계인을 만나서 이렇게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면 거의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영화 내내 적대 세력의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의 긴장감이 많이 떨어지고, 따라서 관객들도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지는 못합니다.

도입부에서 뮬 행성이 나오는 장면이나 '컨버터'를 구하는 시퀀스, 그리고 결말 부분이 그나마 흥미진진한 편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이야기의 재미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두 주인공과 함께 신비한 우주 세계를 체험한다는 기분으로 보는 것이 여러모로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낙관적인 우주 백일몽



 영화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한 장면. 데인 드한과 카라 델레바인은 함께 있을 때 느낌이 훨씬 좋다.

영화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한 장면. 데인 드한과 카라 델레바인은 함께 있을 때 느낌이 훨씬 좋다. ⓒ 판씨네마(주)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전반적인 느낌은 한마디로 10대 초반 청소년의 낙관적인 백일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발레리안과 로렐린은 설정상 특수 요원들이지만, 미지의 우주에 대한 순수한 경외심, 외계 문명을 대하는 때묻지 않은 호기심, 실제보다 약간 과장된 자아상에서 나오는 근거 없는 자신감 등을 지닌 사춘기 청소년들 같지요. 이야기 전개도 우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는 쪽이어서,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성인 관객에게는 애들 장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치하고 굳이 볼 필요가 없는 영화라고 낙인 찍기는 좀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만큼 장점도 있으니까요. 우주 시대의 도전과 꿈을 그리면서도, 성차별이나 인종차별 같은 잘못된 편견에 기초하지 않고, 무엇보다 정의와 사랑이라는 가치를 존중하는 면모를 보여 줍니다. 쓸데없이 무섭거나 폭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1, 2학년 정도의 청소년에게 관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주에 대한 꿈과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치기 시작할 나이에 보기는 더없이 괜찮은 작품이니까요. 이 영화를 본 학생들이 나중에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도가 되겠다고 다짐하거나, 다른 SF 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설정이나 캐릭터 디자인 같은 면에서 <아바타>나 <스타워즈> 등 다른 유명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청소년 눈높이의 각본에 이렇게나 많은 제작비를 투입한 것도 산업적 측면에서 봤을 때 문제입니다.실제로 전 세계 흥행 성적이 1억 3천만 달러(8/21 기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우주에 관해 막연한 공상에 빠졌던 기억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각박한 세상살이는 잠시 잊고, 극장에 앉아 예전에 꿈꾸던 모험과 로맨스의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는 것 자체가 좋은 휴식이 될 테니까요.

 영화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포스터.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각본이 아쉽지만, 우주 공간을 향한 상상력의 향연은 반갑다.

영화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포스터.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각본이 아쉽지만, 우주 공간을 향한 상상력의 향연은 반갑다. ⓒ 권오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홈페이지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발레리안 데인 드한 카라 델레바인 뤽 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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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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