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도전하는 신태용호가 유럽파의 합류로 드디어 '완전체'를 구성했다. 이미 국내파 위주로 조기소집된 대표팀은 지난 21일부터 파주 NFC에서 이란-우즈베크전을 대비한 훈련을 진행해왔다. 여기에 소속팀 일정을 마친 해외파들이 순차적으로 합류했고, 지난 28일 손흥민(토트넘)과 황희찬(잘츠부르크),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등 유럽파까지 마지막으로 가세하면서 신태용 감독이 발탁한 26인 엔트리가 마침내 한 자리에 모두 모이게 됐다.

차범근-박지성 이래 유럽파는 명실상부하게 한국축구를 이끄는 간판 스타 대접을 받아왔다. 여전히 세계축구간 수준차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아시아 선수로서 축구의 본고장 유럽에서 뛴다는 상징성은 특별한 위상으로 느껴졌다. 유럽파의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가 마치 대표팀의 경쟁력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유럽파의 활약 여부에 따라 팀 수준 자체가 달라진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냉정히 돌아보면 한국축구에서 유럽파들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오히려 양날의 검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유럽파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오히려 K리거나 아시아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대표팀에서 과소 평가받는 경향도 생겨났다. 2010년대 이후로는 유럽파와 국내파 간의 위화감 문제가 대표팀의 민감한 현안이 되면서 파벌-차별 논란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역대 대표팀 감독들은 대체로 유럽파를 노골적으로 우대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유럽파에 대한 지나친 환상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경우도 많았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당시 홍명보호는 역대 대표팀중 가장 많은 17명의 해외파를 발탁했고 그중 9명이 유럽파였다. 반면 국내파는 6명, 골키퍼 3명을 제외한 필드 플레이어는 3명에 불과했다.

홍명보호는 유럽파들의 재능과 경험을 과신했지만 문제는 정작 이 당시 대다수의 유럽파들이 소속팀에서 꾸준한 출전기회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컨디션이 떨어져 있던 상태였다는 점이다. 우려한 대로 홍명보호는 브라질월드컵에서 조별리그 1무 2패에 그치며 1998년 프랑스 대회 이후 최악의 성적으로 조기탈락하는 굴욕을 겪었다.

당시 홍명보호의 주축으로 중용되었던 박주영, 지동원, 김보경, 이청용 등이 일제히 부진에 빠지며 탈락의 원흉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그나마 선전한 것은 이근호, 김신욱, 김승규 등 과소 평가받던 K리거들이었다. 홍명보 감독은 대회 직후 여론의 뭇매를 맞은 끝에 사퇴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선수선발을 합리화하면서 "K리거는 B급"이라 경기력이 떨어져도 유럽파를 더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희대의 궤변을 남기기도 했다. 이 대회는 한국축구계에 만연한 과도한 '유럽파 판타지'에 본격적으로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전임 울리 슈틸리케 감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부임 초기에는 국내파를 적극적으로 중용하고 이정협 같은 무명선수를 발굴하는 등 이전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는 듯 했으나 오래가지 않아 홍명보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선수들을 중용하겠다는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고 경기력이 떨어진 유럽파들을 무리하게 기용하면서 내부 경쟁과 플랜B가 실종됐다. 슈틸리케호가 최종예선들어 부진을 거듭하면서 결국 감독 경질과 월드컵 본선행 불투명으로 이어지는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었다. 이름값과 경험은 높아도 경기감각이 떨어진 유럽파 VS 이름값은 떨어져도 소속팀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국내파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문제는 한국축구 대표팀의 가장 큰 난제가 된 지 오래다.

신태용 신임 감독은 예비 엔트리까지 포함한 31인 명단을 통틀어서도 총 5명의 유럽파만을 선발했다. 물론 기성용-손흥민 등 반드시 대표팀에 필요하다고 평가받은 선수들은 이번에도 포함되긴 했지만 최근 몇 년간의 대표팀을 통틀어 유럽파의 비중이 가장 낮은 선수구성이다.

슈틸리케호의 마지막 A매치였던 카타르전에서 발탁되었던 유럽파중 이청용(크리스탈팰리스)-박주호(도르트문트)-지동원(아우크스) 등이 모두 이번 신태용호 1기에서는 탈락했다.

이들 모두 대표팀 경험이 풍부한 선수들이지만 한편으로 최근 소속팀에서 활약이 신통치않았거나 경기감각이 불확실한 선수들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반면 전임 감독들에게 소외받던 K리거는 이번에는 전체 엔트리의 절반에 가까운 11명이나 선발됐다. 신태용 감독이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고 이란-우즈베크전에 당장 최상의 컨디션으로 나설수 있는 선수들만을 선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대목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에 합류한 유럽파들도 대다수가 아직 컨디션에 의문부호가 붙고 있다는 점이다. 주장 기성용은 지난 6월 무릎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른 이후 비시즌을 준비하면서 충분한 훈련량을 소화하지 못했다. 소속팀 배려로 대표팀에 조기합류하게 되었지만 소속팀 에서 경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며 체력과 실전감각에 우려가 붙는다. 대표팀은 그동안 기성용이 빠지거나 부진한 경기에서 팀전체가 함께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냈을 만큼 그 비중이 절대적이다.

손흥민은 팔 부상으로 수술을 받은 이후 회복속도가 빨라 소속팀 토트넘의 리그 경기에서 3연속 출장(교체 2회, 선발 1회)하며 비교적 꾸준히 경기를 소화했지만 득점포를 가동하지는 못했다. 풀타임을 소화할 체력에 대한 우려나 강한 몸싸움에 대한 부담감이 아직은 남아있는 모습이다. 팀내 가장 유명 선수로서 최종예선들어 손흥민에 대한 상대의 집중견제가 점점 심해지면서 본인의 부담감도 크다.

이밖에도 구자철은 올시즌 소속팀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변신하며 적응기를 겪고 있다.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황희찬은 잘츠부르크에서 쾌조의 골감각을 자랑하고 있지만 최근 무릎부상을 당했다는게 마음에 걸린다. 권창훈은 오랜만의 A대표팀 복귀다. 국내파 선수들에 비하여 유럽파 선수들의 합류 시기가 늦은 만큼 이란전에서는 조직력-체력 면에서 아직 100%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신태용 감독의 고민거리가 될만하다.

이란-우즈베크와의 이번 2연전은 한국축구의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의 운명이 걸린 단두대 매치다. 숫자는 줄었어도 대표팀 내에서 유럽파의 비중은 여전히 가볍지 않다. 이번에 선발된 유럽파 모두 대표팀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선수들이며 부상 등 큰 문제만 없지만 당연히 선발로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 자원들이다.

이란과 우즈베크의 전력이 모두 만만치 않은 것을 감안하면 한국축구 최고의 자원들인 유럽파의 활약 없이 승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대표팀 내에서 기대치에 비하여 아쉬운 모습을 보였던 유럽파들이 이번에는 이름값을 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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