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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단식

1983년 초부터 전두환 정권의 유화적 조치들이 발표되고, 수배자들이 수배에서 풀리는 등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먼저 1983년 2월 정치활동 피규제자 중 452명을 2차에 걸쳐 해금했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 핵심인사 99명은 여전히 정치활동 금지를 풀어주지 않았다.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광주항쟁 3주년을 맞이하여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1980년 5.17 쿠데타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서 전두환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최초의 행동이었다. 김영삼은 성명에서 구속인사 석방과 전면 해금, 해직교수와 근로자 및 제적학생의 복직∙복교∙복권, 언론의 자유, 개헌 및 국보위 제정법률의 개폐 등을 요구했다. 이 소식은 정권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으나 AP통신 등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국내신문에서도 차츰 1단으로 '정치현안' 등의 표현을 쓰면서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3년 5월 24일 동아일보 1면. 김영삼의 단식을 애매모호한 '정치관심사'로 표현하고 있다.
 1983년 5월 24일 동아일보 1면. 김영삼의 단식을 애매모호한 '정치관심사'로 표현하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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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단식은 운동권 청년들에게도 즉시 알려졌고, 공개정치투쟁단체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활력소가 됐다. 1970년대에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거나 학교에서 제적된 청년들 사이에는 출신 대학교별로 모임이 있었다. 인원이 많았던 서울대는 학번별로 모였다. 이 모임들은 고난을 같이하는 동지애로 뭉쳐져 있었다. 느슨하지만 끈끈하고 응집력이 있었다.

이들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사회 속에 흩어져 자기 갈 길을 모색했지만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시국담을 나누었다. 여기에 김영삼의 목숨을 건 단식 소식은 청년들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우리도 모여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청년들의 마음속에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 이것을 조직할 사람이 필요했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이범영과 박우섭

1976년 서울대 농법회 수련회에 참여한 회원들 모습. 맨 왼쪽이 이범영이다.
 1976년 서울대 농법회 수련회에 참여한 회원들 모습. 맨 왼쪽이 이범영이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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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가장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이범영과 박우섭이었다.

이범영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이념서클 농법회 회장을 지내 서울대 운동권 선후배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76년 12월 학내 시위로 2년여 징역을 살고 나와 1979년부터 학생운동으로 징역을 산 사람들의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병역대책위를 조직하여 투쟁하면서 지방대학 출신자들과도 폭넓게 유대관계들이 있었다. 이범영은 오랫동안 구월동 수배자들 모임에서 함께 지내면서 선도적 정치투쟁이 시급하고, 그를 위한 공개 청년운동단체 건설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박우섭은 대학 시절 연극반, 극단 연우무대 활동 등을 통해 문화패들과 광범하게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당모임'이라는 이해찬, 황선진, 김도연, 이석원, 박성규 등 서울대 72학번들 모임의 연락 담당 역할을 했었고, 문익환, 백기완 등 재야 원로들과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 등 중견 재야인사들과도 광범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동수, 김근태 등을 통해 청계노조 등 현장 노동운동권과도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광범하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개운동단체 설립에 관한 의견을 수렴했다.
OB그룹에서는 최민화와 이해찬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최민화는 기사연 출판부장으로 직장에 다녔고, 이해찬도 당시 돌베개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박우섭, 이범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범영은 서울대 후배 권형택(74학번), 이우재(75학번), 연성만(75학번) 등과도 자주 만나 논의했다. 또 고려대 출신 조성우, 설훈, 연대 출신 홍성엽도 열심히 움직였다.

1979년 창립한 돌베개 출판사는 장준하 선생의 항일 수기집에서 따온 이름이다.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현재 전경.
 1979년 창립한 돌베개 출판사는 장준하 선생의 항일 수기집에서 따온 이름이다.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현재 전경.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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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리 모임

6월 말 경, 양수리 북한강가 한 민박집에 30-40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수사기관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민주동지들이 오랜만에 서로 얼굴들이나 보자는 취지로 각 학교별, 학번별로 몇 사람씩 연락했다. 아직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인지라 은밀히 조심스럽게 연락을 취했다.

신동수, 안양로(서울대 68학번), 조성우, 최민화 등 OB그룹들과 이해찬, 김도연, 박성규, 이범영, 설훈, 권형택, 이우재, 최정순(이대 75학번) 등 YB그룹으로 논의를 진행하던 사람들이 거의 모두 모였다. 박우섭은 참석하지 못했다. 박우섭은 4월에 수배가 풀려 5월 22일에 뒤늦게 결혼식을 올리고 당진 고향집에 갓난아이와 새댁을 데리고 들어가 있었다.

이 양수리 모임이 그동안 진행해온 공개단체 논의에 대해 한 매듭을 짓는 자리가 되었다. 사실상 이 자리에서 공개 청년단체가 필요하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안양로가 이날 논의를 끌어가는 데 상당히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공개 청년단체를 띄우자는 데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구체적인 조직 결성작업은 쉽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가 일련의 유화 제스처를 보이긴 했지만 사실 공개적인 반정부단체의 활동을 용인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전두환 정권은 1983년 초까지도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탄압 기조를 유지했고, 학생운동 출신 군복무사병에 대한 학원프락치사업, 이른바 녹화사업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이 따르더라도 공개정치투쟁 단체는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 양수리에 모인 청년운동가들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결국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가 문제였다.

왼쪽부터 안양로, 장영달, 조성우. 1990년대에 활동하던 모습들이다.
 왼쪽부터 안양로, 장영달, 조성우. 1990년대에 활동하던 모습들이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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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막 한 과수원에서 다시 모인 20명의 청년들

7월 중순, 포도철에 인천 동막에 있는 한 과수원에서 이해찬, 박우섭, 이범영, 연성수, 연성만, 최정순 등 20명쯤 되는 청년들이 다시 모였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공개단체가 출범하면 구속을 각오하고 참여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을 앞장서서 이끌 지도자를 누구로 세울 것인가였다. 손학규(서울대 65학번), 장명국(서울대 66학번), 안양로, 조성우 등 1960년대 학번 중에서 대표급 인물들이 모두 거론되었다. 이때만 해도 김근태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아마도 김근태는 노동현장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을 일부러 끌어내 세우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5월 말부터 OB모임 물주 역할을 하던 최민화 역시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OB모임에서도 의장 후보를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OB멤버 중에는 안양로, 조성우, 장영달 등이 추천되었다. 안양로는 성격이 두루 원만하고, 선도투쟁파나 현장파에게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본인이 고사를 했다. 일선에서 투쟁한 경험이 적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본인이 내세운 이유였다. 조성우는 본인이 의지는 있는 듯 보였으나(사실 본인은 일본 유학 계획 때문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이 반대했다.

조성우의 경력으로 볼 때 지나치게 선도정치투쟁으로 기울 우려가 있고, 그래서 현장파의 참여를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장영달은 오랜 투옥생활로 운동권 청년들과의 인간관계가 넓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당시 장영달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7년간이나 징역을 살고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다시 구속 1순위 자리에 세운다는 것도 동료들의 마음에 흔쾌하지 않았다.

의장 세우기

6월 말쯤 최민화에게 정문화가 중요한 제안을 했다.

"형님이 김근태 선배를 한번 만나 보쇼."

김근태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민화는 이것이 아마도 정문화 부인 천영초(고대 72학번)의 아이디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실무간사를 했던 천영초가 당시 인천산업선교회 실무간사를 하던 김근태의 근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천산선의 내부사정이 김근태가 조만간 실무간사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최민화는 무릎을 쳤다.

'그래, 그거야!'

김근태는 서울상대 65학번으로 손학규, 조영래, 신동수와 경기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 데모하러 나갈 때 교실을 지킨 모범생이었던 그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대학 1학년 때 한일회담반대 데모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1967년 6∙8부정선거반대투쟁 때 서울상대 대의원 의장으로 데모를 주도하다 제적되면서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군대를 갔다 와서 1970년 복학을 하는데 이후 1971년 위수령, 1972년 유신쿠테타 등 박정희 군사정권이 장기집권체제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그는 항상 배후에서 학내시위를 지도했다. 그러나 심재권, 장기표, 조영래, 이신범 등이 체포되어 언론에 오르내릴 때 그만은 늘 잡히지 않고 지명수배된 상태로 남았다. 체포된 동료들의 법정에서는 항상 '공소외 김근태'로 불렸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공소외'였다.

그는 유신쿠테타가 있은 1972년부터는 학생운동만으로 독재정권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중앙정보부의 추적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냉동학원 강사, 보일러 기사 등으로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부인 인재근을 만나 동거하다가 애기도 낳고 살았다. 그러다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수배가 풀려 1980년 4월 26일 뒤늦은 결혼식을 올린다. 1980년 5.17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실무간사로 노동조합 교육과 노동자 의식화 사업에 주력했다. 그리고 공개청년운동이 한참 논의되던 1983년 초에는 구월동에서 역곡으로 이사해서 살고 있었다.

오른쪽이 인재근. 이화여대 재학 시절의 모습이다. 인재근은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던 중 수배자 김근태와 만나 결혼했다.
 오른쪽이 인재근. 이화여대 재학 시절의 모습이다. 인재근은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던 중 수배자 김근태와 만나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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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화는 정문화의 제안을 듣는 순간 김근태가 이 문제를 풀 열쇠라는 걸 직감했다. 김근태야말로 공개청년단체를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최민화는 학생운동 선배로서 김근태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김근태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잘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운동의 뿌리가 기독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근태를 처음 만난 것도 1971년 강원룡 목사가 시작한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에서였다.

최민화는 집안이 원래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데다 기독교 학교인 연세대학에 다녔기 때문에 학생 때부터 함석헌, 박형규, 김찬국 등 기독교계 민주 인사들과 가까웠다. 산선 설립자 조승혁 목사와는 일찍부터 한 교회를 다녀 친했고, 나중에는 조 목사가 시무하는 회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래서 인천산선 실무자로 일하는 김근태의 근황을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최민화가 생각할 때 김근태는 학생운동 출신 청년들의 선배로서 1960~197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을 두루 아우를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장지향적인 성향이 강한 1970년대 중후반 학번 후배들 세대에도 어필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민주화운동권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거점인 '종로5가'(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 기독교 운동단체가 모여 있어 기독교 민주화운동권을 이렇게 불렀다)와 연결하고, 그 도움을 받는 데도 적임으로 보였다. 문제는 대표적인 현장파로 알려진 김근태가 과연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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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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