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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30일 가석방 돼 감옥 문을 나선 김근태는 민청련 회원들의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엄혹했던 1983년에 민청련을 창립하고 민청련뿐만 아니라 사실상 운동 전반을 이끄는 지위에 이르렀지만,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비지'를 주장하고 그것이 한 원인이 돼 대선 패배로 이어짐으로써 김근태의 위상은 이전보다 현저하게 약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김근태에게는 자기 한 사람의 위상이 낮아진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분열되고 무너진 운동 세력의 전선을 어떻게 하면 다시 복구할 수 있을 것인가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서 출옥한 김근태 전의장과 마중나온 민청련 회원들. 김근태 옆으로 부인 인재근, 김성환 의장(머리띠 묶은 이), 김두일 사무국장, 임태숙, 최민화 전부의장, 원혜영, 장영달 전 부의장, 권형택 전 부의장의 모습이 보인다.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서 출옥한 김근태 전의장과 마중나온 민청련 회원들. 김근태 옆으로 부인 인재근, 김성환 의장(머리띠 묶은 이), 김두일 사무국장, 임태숙, 최민화 전부의장, 원혜영, 장영달 전 부의장, 권형택 전 부의장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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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 이후 와해된 전선

김근태는 자신의 생각을 9월 3일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의 기념강연에서, 또한 그즈음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실린 특별대담에서 밝혔다.

김근태의 강연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김근태가 아직 감옥에 있던 87년 대선 이후 운동세력 내부에서 진행돼 오던 통합 논의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앞서 민청련이 창립된 1983년 이후 이에 자극 받아 노동운동, 농민운동, 문화운동 등 운동조직들을 중심으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한편으로 재야의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민주통일국민회의가 결성됐다. 그리고 이 두 연합체가 다시 통합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을 만들었다.

그런데 민통련이 제 역량을 갖추고 활동력을 키워나가는 도중에 김대중, 김영삼을 주축으로 한 야당 세력이 재기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그 순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그 여세에 떠밀려 민통련과 양 김 세력이 연합전선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였고 이 연합전선의 깃발 아래 6월민주항쟁이 전개됐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으로 쟁취한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양 김이 분열하고 그에 따라 운동 세력도 분열함으로서 국본이라는 연합전선은 붕괴됐다. 운동 세력 내부를 보면, 연합체인 민통련이 대선에서 김대중 비지의 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민통련이 예전과 같은 운동 세력 총연합체의 위상을 가질 수는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운동 세력의 새로운 연합에 대한 논의가 촉발됐던 것이다.

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 김근태 전의장이 기념 강연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전망과 과제’ 원고의 목차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 김근태 전의장이 기념 강연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전망과 과제’ 원고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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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세력 내부에서 각 그룹 마다 논의해 오던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에 대해 김근태는 출옥 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한 자기 생각의 대강을 9월 3일 성만민청련 창립식 기념강연에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전망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얼마 뒤 기관지 <민주화의 길>과의 특별대담 '민족민주운동의 현 단계와 과제'를 통해 밝혔다.

김근태 생각의 핵심은 운동 세력의 재편에 대한 논의가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연합전선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정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선을 두 개로 나누어 생각하자고 제안했다. 하나는 민족민주운동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전선이었다.

두 전선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사회 계급에서 차이가 있었다. 민족민주전선은 다수의 동자, 소생산자, 농민, 도시빈민, 중소자본가를 토대로 한 전선이고, 현실 정치세력으로는 민중운동역량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된다. 반면 국민전선은 중소자본가와 비독점대기업을 주 토대로 하며, 현실 정치세력으로는 제도정치의 야당 세력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된다.

각 전선이 기반하고 있는 토대의 차이는 이들의 정치노선의 차이로 나타나는데, 국민전선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성취에 중점을 두지만 민족민주전선은 민중의 이익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그리고 분단의 극복을 추구한다.

김근태는 국민전선이 비록 불철저한 민주주의에 자족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이 군사독재와의 비타협적 투쟁에 앞장서는 한 그들을 배척해서는 안 되며 함께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운동세력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민족민주전선을 튼튼하게 꾸려내는 것이라고 했다. 튼실한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하고 그 힘으로 국민전선이 이끌어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근태의 이러한 구상은 지난 대선에서의 운동 세력 간 대립과 분열을 해소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김근태 자신은 그러한 일을 자신의 임무로 설정한 것처럼 보였다.

 1988년 9월 3일 김근태의 성민청 창립 기념강연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현황과 과제’ 중 두 개의 전선을 설명한 도표.
 1988년 9월 3일 김근태의 성민청 창립 기념강연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현황과 과제’ 중 두 개의 전선을 설명한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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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지도부에 대한 비판

한편 노태우 정권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그 힘으로 야당과 운동세력에 대한 공세를 펴나갈 기세였다. 그것이 전두환 때처럼 폭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운동 세력을 국민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고립시키려는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이러한 정세에 속에서 민청련은 하반기 총회를 앞두고 치열한 배부 논의에 들어갔다. 관례적으로 해왔듯이 11차 총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조직 단위와 부서에 대한 평가작업에 들어갔다. 그 기조는 9차총회 이후 민청련이 내세운 '청년대중운동론'이 실제 활동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에 맞춰져 있었다.

민청련은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동서울, 남서울, 북서울이라는 지부를 건설했고, 나아가 경기도의 안양과 성남으로 지부를 넓혀나갔다. 이러한 지역지부의 건설은 분명한 성과였지만, 총준위 평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지도력 부재'의 문제가 지적됐다. 

지도력의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민청련은 각 대학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조직이라는 틀을 벗고, 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노동청년들을 자기 조직원으로 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목표는 쉽사리 달성되지 않았다. 각 지역 지부는 여전히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주요 회원이었고, 이전의 지도부가 중앙에서 중앙 권력을 향해 투쟁했다면, 지역 지부는 지역 차원에서 지역 권력과 투쟁하는 일종의 중앙의 지역화를 수행하는 양태였다.

그러한 지역 단위의 정치투쟁 조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애초에 설정한 '청년대중운동론'에 부합하는 것인지, 그 노선에서 이탈한 것인지에 대해 김성환 의장 지도부는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 그래서 각 지역 지부는 그때그때 지역에서 발생하는 노동쟁의에 대응할 뿐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지침은 없는 상태라고 자평하기에 이른 것이다.

학생들의 통일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88년 10차 총회 지도부를 이끈 김성환 의장이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5공비리 규탄 및 전두환 이순자 구속 처벌을 요구하는 선전을 벌이고 있다
 1988년 10차 총회 지도부를 이끈 김성환 의장이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5공비리 규탄 및 전두환 이순자 구속 처벌을 요구하는 선전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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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중요한 이슈가 있었다. 학생운동 쪽에서 거세게 치고나온 통일운동이었다. 이는 학생운동 속에서 성장한 이른바 민족해방(약칭 NL) 계열 노선이 외화된 것이었고 따라서 민청련 회원들은 지도부에게 NL에 대한 태도의 표명을 요구했다.

김성환 의장 지도부는 공개적이지는 않았지만, NL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그에 따라 학생들의 통일운동에도 지지와 지원은 하지만 적극적인 자세는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5공 비리와 광주항쟁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투쟁을 기본 방침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방침'으로 NL이라는 '노선'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김성환 지도부는 당시를 풍미하던 NL에 대해 비토는 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고, 그것은 회원들에게 지도부의 노선 부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학생운동에서 터져 나온 통일운동 열풍에 대해 김근태 전 의장이 성남 강연회에서 언급한 바가 있었다. 김 전 의장은 그것이 성과와 한계를 모두 드러냈다고 했다. 즉 기존의 운동 세력은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을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관습에 젖어 있었는데, 학생운동이 그것을 단숨에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운동이라는 것을 제시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고 했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대선 패배 이후 침체돼 있던 운동 사회의 분위기를 일신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통일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투쟁의 배합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즉 5공 비리나 광주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 그쪽의 투쟁 동력을 상실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학생운동이 통일 문제를 워낙 거세게 치고나옴으로서 전체 운동의 흐름에 일종의 병목 현상이 발생하고 이것이 운동의 질곡으로까지 나아갔다고 비판했다. 또한 학생운동은 본원적으로 대중을 대표하는 지위를 가질 수 없음에도, 그들이 사회 운동 전반을 자신들의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어떤 면에서 사실상 운동 전체를 지도하려고 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김 전 의장의 이러한 비판은 민청련에게 그다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이후에 김근태의 행적에서 알 수 있게 되지만, 김근태는 이제는 민청련의 범위를 벗어나 전체 운동의 재편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그만큼 민청련 회원들과의 접촉면은 넓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8년 6월 9일,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연세대학교에서 집회를 연 전대협. 이후 학생운동에서 통일운동이 투쟁의 기조를 이루었다.
 1988년 6월 9일,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연세대학교에서 집회를 연 전대협. 이후 학생운동에서 통일운동이 투쟁의 기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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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11차 총준위 논의는 지도부 교체로 모아져 나갔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민청련으로서 새 지도부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흐름과 호흡을 같이 하는 이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다양한 논의 그룹들과 접촉면을 갖고 있는 민청련 회원들에게 그러한 처방이 충분한 것인지는 판단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민청련동지회 주 : 연재를 잠시 쉬겠습니다. 다음 49회부터 민청련 해소까지의 글은 약간의 시간을 두고 내용을 알차게 보강한 뒤 다시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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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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