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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기자 말

구월동 사람들과 공개청년운동

민청련의 창립은 구월동에 은거하던 수배자들이 공개청년운동단체의 필요성을 논의하면서 촉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팸플릿 [전망] 작성에 참여했던 소준섭은 그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전망]의 논리가 운동권 전반에서 확실하게 득세하면서 구월동의 '논의 구조'에서는 자연스럽게 공개적 청년운동 건설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범영 선배가 벽에 기댄 채 큰 눈을 굴리며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라고 공개 청년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대화와 논의에 있어 김근태 선배를 좌장으로 모신 것은 물론이다. 특히 70년대에 있었던 민청협 활동을 평가하면서 그 단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청년 운동을 어떻게 건설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많았다."

이 구월동에서의 논의가 팸플릿 [전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면 70년대 말 정문화(서울대 70학번. 1998년 작고), 조성우 등을 중심으로 재야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민주청년협의회(약칭 민청협)에 대해서 "70년대 청년 재야운동이 커다란 '상징성'을 가졌으며 대중에 대한 공개적 '스피커'의 역할을 담당하고 정권에 대하여 대외적 압력을 행사하는" 긍정적 역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불분명한 민중지향적 성격과 잡다한 구성층으로 인한 결속력의 약화, 진정한 대중적 기반이 없는 입만의 운동"이라고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그래서 새로이 건설되는 청년운동은 진정한 대중적 기반을 갖는 조직운동이 되어야한다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민청협에서 발행한 회보 표지들. 창간호는 표지 없이 6페이지로 단출하게 발행했으나, 2,3,4호는 각각 16, 26, 28페이지로 늘어나면서 점차 내용이 다채로워졌다.
 민청협에서 발행한 회보 표지들. 창간호는 표지 없이 6페이지로 단출하게 발행했으나, 2,3,4호는 각각 16, 26, 28페이지로 늘어나면서 점차 내용이 다채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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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에서 주장하는 학생운동의 선도적 정치투쟁은 사회운동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었다. 82년 말부터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던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는 정부당국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광주학살의 실상도 국민들에게는 철저히 은폐되었고, 그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은 일부 운동권 사람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유통될 뿐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민중운동도 그 생존권 주장을 대변하고 엄호할 세력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사회에서 이러한 공개정치투쟁을 담당할 세력은 역시 학생운동에서 단련된 청년들일 수밖에 없었다. 80년 5.17 쿠데타로 다시 제적되어 사회에 나온 복학생 청년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인적 자원은 충분했다. 문제는 유신체제에 버금가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 아래에서 과연 공개정치투쟁단체가 생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누가 그 일을 맡을 것인가에 있었다.

구월동 사람들은 1983년 초부터는 공개투쟁의 가능성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모두가 수배상태였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동태에 특히 민감했다. 그런데 1983년 들어서면서 변화가 감지됐다. 많은 수배자들의 수배가 해제되었고, 수배자들에 대한 수사기관의 추적도 완화된 듯 보였다. 이러한 변화가 이들로 하여금 공개투쟁단체의 활동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던 것이다.

이때 박우섭이 자신에 대한 수배가 해제된 것으로 판단하고, 4월에 경찰에 자수한다. 박우섭은 예상대로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다. 대신 구월동 수배자 방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고, 나머지 사람들은 연고를 찾아 떠났다. 그러나 구월동 그룹 사람들은 공개투쟁단체가 필요하다는 강한 확신과 의지를 품고 있었고, 언젠가 그 단체가 출범하면 그 단체에서 자기도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박우섭이 자수하여 수배를 푼 것도 그것이 앞으로의 공개단체 활동을 위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민청협 그룹

또 한 갈래 공개적 청년운동 건설 논의가 태동한 곳은 민청협 그룹이었다. 나중에 이들을 OB그룹이라고 불렀다.

민청협은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이 중심이 되어 1978년 5월에 출범한 단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청년들 67명이 그해 1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아직 풀려나지 못한 이강철, 유인태 등 6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그중 일부의 사람들이 유신체제 아래에서의 이른바 요시찰 인물들에 대한 탄압에 대해 공동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민청협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회장은 정문화가 맡았다. 이후 2대 회장은 조성우(고려대 68학번)가 이어받았는데, 1979년 명칭을 '민주청년협의회'로 바꾸고, 상설적인 민주화투쟁 단체를 표방했다.

1978년 1월 발표한 이현배·유인태·김효순·이강철·김지하·장영달 등 6인에 대한 석방 요구 성명서. 뒷면은 성명 주최자 67명의 명단이다.
 1978년 1월 발표한 이현배·유인태·김효순·이강철·김지하·장영달 등 6인에 대한 석방 요구 성명서. 뒷면은 성명 주최자 67명의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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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협은 1979년 3월 1일 출범한 재야단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민주통일국민연합, 의장: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과 더불어 유신 말기 재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명맥을 이어나갔고, '동일방직사건', 'YH사건' 등의 노동운동에 깊숙이 개입하며 유신정권에 대항했다.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난 직후에는 유신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한 '통대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기획하는 데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들이 기획한 YWCA에서의 국민대회는 계엄군의 진압으로 쑥대밭이 되고, 민청협 간부 이우회, 최열, 최민화, 강구철, 홍성엽 등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 이후 민청협은 사실상 해체되고, 구속을 면한 회원들은 1980년 3월 '서울의 봄' 시기에 복학하여 학생운동에 복귀했다.

그러다 5.17쿠테타로 전두환정권에 또 한 번 철퇴를 맞아 조성우, 이해찬, 홍성엽 등 상당수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구속되지 않은 회원들은 사회 각 곳에 흩어져 재기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 역시 1980년 이후에 과거 70년대 민청협 같은 공개청년운동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른바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알려진 ‘통대선출 저지 국민대회’ 사건으로 구속된 주요 인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직책은 당시 기준)으로 함석헌 씨알의 소리 대표,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이우회 민청협 회장, 당시 결혼식 신랑 역을 한 홍성엽 민청협 운영위 부위원장, 최열 민청협 부회장, 최민화 밀물출판사 대표
 이른바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알려진 ‘통대선출 저지 국민대회’ 사건으로 구속된 주요 인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직책은 당시 기준)으로 함석헌 씨알의 소리 대표,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이우회 민청협 회장, 당시 결혼식 신랑 역을 한 홍성엽 민청협 운영위 부위원장, 최열 민청협 부회장, 최민화 밀물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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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민청협 회장으로 YWCA 국민대회를 주도했던 조성우는 대회 당일 날 요행으로 현장에서 체포되는 것을 면했다. 그러나 계엄사에 수배되어 공개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조성우는 수배상태로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고려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리고 5.17 이후 다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중심인물로 계엄사의 집중 추적을 받고 결국 6월에 체포됐다. 조성우는 계엄사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군법회의 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2년여 수형생활을 하다가 1982년 12월에 형집행정지로 문익환 목사, 이해찬 등과 함께 석방된다. 

계엄사에서 워낙 혹독한 고문을 받았던 조성우는 감옥 생활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석방되자마자 민청협을 재건하여 군사정권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래서 조성우는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3년 1월 김근태를 찾아가 민청협을 재건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이 재건작업에 김근태가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한다.

민청협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당시 양대 세력인 정치투쟁파와 현장파가 모두 함께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양파에서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김근태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당시 김근태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성우는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편으로 조성우는 민청협 재건을 공론화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일본에 유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전면에 나설 처지는 아니었다.

조성우의 석방으로 구 민청협 멤버들의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 모임을 만드는 데에는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하면서 재야 선후배 사이에 두루 관계가 원만했던 최민화가 중심 역할을 했다. 최민화는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구속되었다가 징역 10월의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리고 1년 만에 1980년 11월 30일 석방되었다. 1981년 4월부터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취직하여 출판부장으로 근무했다.

최민화는 1982년 12월, 조성우가 석방되자 1983년 새해 벽두부터 조성우, 문국주, 이우회 등과 함께 원로들에게 세배를 다니면서 공개 청년단체를 다시 꾸리는 논의에 바람을 잡았다. 처음에는 조성우가 주선한 장소에서 부정기적으로 몇 번 모이다가 점차 신촌 부근 대흥동에 있던 최민화 집을 자주 모임 장소로 이용했다. 다들 실업자 신세인데 최민화는 부인 박혜숙이 약국을 운영하는 데다 최민화 본인도 기사연에서 괜찮은 월급을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자연히 물주가 되었다.

최민화의 부인 박혜숙이 대흥동에서 운영하던 세민약국. 이 약국은 훗날 민청련 시절에도 비밀아지트로 자주 애용됐다. 박혜숙 씨는 암투병 끝에 2004년 작고했다.
 최민화의 부인 박혜숙이 대흥동에서 운영하던 세민약국. 이 약국은 훗날 민청련 시절에도 비밀아지트로 자주 애용됐다. 박혜숙 씨는 암투병 끝에 2004년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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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공해문제연구소 사무실

1982년 5월 최열과 정문화가 중심이 되어 공해문제연구소를 창립하고 혜화동에 조그만 사무소를 열었다. 이곳이 또 운동권 청년들의 모임장소가 되었다. 당시 모임 장소가 마땅치 않았던 청년들로서는 이곳에 자주 들러 모임도 하고 시국담도 나누었다. 정문화, 최열이 민청협 간부였기 때문에 자연히 민청협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범영이 소개한 서울법대 출신 김태현(서울대 75학번)이 실무간사로 근무하고 있어서 박우섭, 이범영 등 YB그룹에서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공문연 사무실에서 민청련 조직이 싹텄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최열과 더불어 공문연의 주도 멤버였던 정문화와 김태현.
 최열과 더불어 공문연의 주도 멤버였던 정문화와 김태현.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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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협 그룹과 공해문제연구소 사람이 주축이 된 OB모임이 1983년 5월부터는 정례화되어 매주 한 번씩 최민화 집에서 모였다. 이때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기독교 쪽으로 김경남, 황인성, 송진섭. 가톨릭의 이명준, 문국주, 민청협의 조성우, 장영달, 정문화, 이해찬 등이 참여했고, 그 밖에 경북의 정화영(경북대 68학번), 광주의 이강(전남대 68학번), 부산의 김재규(부산대 68학번)등과도 연락을 취했다. 이 모임 사람들은 대체로 공개정치투쟁단체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했다. 그러나 누가 구심이 되어 이 조직을 이끌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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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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