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2그룹으로 내려 왔지만 역시 2016년 리우올림픽 8강의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홍성진 감독이 이끄는 여자배구 대표팀은 불가리아와 폴란드, 그리고 한국의 수원을 거치며 치른 2017 월드그랑프리 여자배구대회 2그룹 예선 라운드에서 8승1패의 성적으로 전체 1위를 차지했다. '여제' 김연경은 득점 1위(147점), 공격 성공률 2위(44.56%), 서브리시브 4위(54.35%), 디그 8위(세트당 2.48개)에 이름을 올리며 격이 다른 실력을 뽐냈다.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한국이 2그룹 1위에 오르고도 결선 라운드의 1번 시드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선 라운드 개최국 체코가 예선 4위에 머물고도 결선 라운드 1번 시드를 얻는 혜택을 얻었고 이 때문에 한국은 오는 29일(이하 한국시각) 예선 2위를 차지한 독일과 4강에서 격돌한다. 물론 한국은 지난 7일 1주차 시리즈에서 이미 독일을 꺾은 적이 있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러운 상대는 아니다.

사실 배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번 대회가 개막하기 전에 한국의 성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다른 포지션은 대부분 리우 올림픽 멤버들이 그대로 나서지만 이효희 세터의 대표팀 은퇴로 세터 자리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여자배구의 새로운 '야전사령관' 염혜선 세터는 이번 대회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국가대표 주전 세터로서 기분 좋은 신고식을 치르고 있다..

이도희-강혜미-김사니-이효희로 이어진 여자배구 세터 계보

 작년까지 염혜선은 대표팀에 선발되더라도 벤치를 달구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작년까지 염혜선은 대표팀에 선발되더라도 벤치를 달구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 국제배구연맹


한국 여자배구는 김연경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언제나 거포기근에 시달렸지만 90년대부터 세터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이도희,강혜미,김사니(이숙자),이효희로 이어지는 확실한 계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호남정유의 겨울리그 9연패 신화를 이끈 이도희 세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금메달 주역으로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당시 대표팀 주전 대부분이 호남정유 선수들이었다).

1995년 다소 이른 은퇴를 선언한 이도희의 계보를 이은 선수는 강혜미 세터였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부터 이도희의 백업세터로 활약했던 강혜미 세터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 대표팀의 주전 세터 로 활약했다. 강혜미 세터는 국내리그에서도 현대건설 이적 후 구민정, 장소연과 트로이카를 구성하며 겨울리그 5연패를 이끌었다.

강혜미가 코트를 떠난 이후 대표팀 세터 자리는 80년대생들에게로 넘어왔다. 실업 입단 후 무려 6년 동안 강혜미 세터의 백업으로 활약하며 선배의 노하우를 전수받은 이숙자가 있었고 중앙여고 시절부터 천재세터로 불리던 182cm의 장신세터 김사니가 등장했다. 두 선수는 V리그 출범 후에도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 동반 출전해 4강 주역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사니가 10대, 이숙자가 20대 중반부터 두각을 나타냈다면 이효희는 30대가 된 후에 비로소 전성기가 찾아온 경우다. V리그 출범 후 KT&G부터 흥국생명, 기업은행까지 세 팀에서 우승을 경험했고 2013-2014 시즌과 2014-2015 시즌에는 두 시즌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김사니와 이숙자가 대표팀에서 은퇴하면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과 작년 리우 올림픽에서 주전 세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반면에 2008년부터 프로생활을 시작한 염혜선은 V리그에서 4년 연속 세터상을 받았던 정상급 세터임에도 대표팀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동시대에 경험이 풍부한 선배들이 즐비했고 지금은 센터로 변신한 한수지나 선명여고 시절부터 대표팀에 선발됐던 이다영처럼 신체조건이나 운동 능력이 좋은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염혜선은 작년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며 오랜만에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지만 대회 기간 내내 대부분의 시간을 벤치만 달구다 돌아왔다.

안정된 토스워크와 날카로운 서브 앞세워 풀타임 주전 등극

 염혜선 세터는 이번 대회 경기 도중 코트에서 위축되는 장면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염혜선 세터는 이번 대회 경기 도중 코트에서 위축되는 장면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 국제배구연맹


한국 여자배구는 리우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이효희마저 대표팀에서 은퇴하면서 세대교체가 불가피했다. 염혜선은 경쟁상대라 할 수 있는 조송화와 이다영이 부상으로 대표팀에 합류할 수 없게 되면서 월드그랑프리 주전 세터로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염혜선과 함께 대표팀에 선발된 이소라 세터는 염혜선보다 네 살이나 많지만 아직 프로 데뷔 후 한 번도 풀타임 시즌을 소화한 적이 없을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다).

염혜선은 이번 월드그랑프리 2그룹 예선 라운드 9경기에서 사실상 풀타임으로 출전하며 한국의 예선 라운드 1위를 이끌었다. 그렇다고 염혜선이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토스워크를 구사한 것은 아니다. 경기 도중에도 주장 김연경으로부터 지적을 받는 장면이 여러 차례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자칫 주눅이 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염혜선은 침착하게 토스를 올리며 공격수들을 이끌었다.

런던 올림픽 때만 해도 50%를 훌쩍 상회하던 김연경의 공격점유율이 10% 이상 뚝 떨어진 것도 염혜선의 적절한 배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연경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김연경이라는 선수가 대표팀에 등장한 후부터 1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대표팀의 고질병이었다. 염혜선은 본연의 임무인 토스뿐 아니라 수비에도 적극 가담하며 세트당 1.97개의 디그를 기록, 이 부문 15위에 올랐다. 디그 부문 상위 20위 안에서 세터 포지션의 선수는 염혜선이 유일하다.

하지만 이번 대회 염혜선이 배구팬들을 가장 놀라게 한 부분은 토스도 수비도 아닌 바로 서브였다. 염혜선은 21일 카자흐스탄전 서브득점 8개를 포함해 이번 대회 세트당 0.55개의 서브득점을 기록하며 당당히 1위에 올랐다. 힘은 좋지만 플레이가 다소 투박한 유럽과 남미 선수들은 예선라운드 내내 염혜선의 까다로운 목적타 서브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염혜선의 서브는 결선 라운드에서도 한국의 커다란 무기가 될 전망이다.

물론 이번 그랑프리 대회 활약이 좋았다고 해서 염혜선이 언니들의 뒤를 이어 한국 여자배구의 세터 계보를 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송화와 이다영 등 부상에 신음했던 세터들이 건강하게 돌아온다면 상황은 또 바뀔 수 있다. 하지만 V리그에서 8년 동안 주전 세터로 활약하며 나이에 비해 많은 경험을 쌓았고 대표팀에서도 순조로운 주전 신고식을 치르고 있는 염혜선이 대표팀 세터 세대교체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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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배구 월드그랑프리 여자배구대회 염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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