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열일'하는 김지현 "하기 어려운 공연도 있지만, 그래도 해야겠죠? 나이도 점점 먹어가고…. 저도 이제 노후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웃음) ‘할 수 있을 때 해야겠지?’ 이런 생각으로 해요. ‘너 조금 지나면 이제 그 역할 못해’라고 스스로 얘기해요. ‘열 살 어린 친구들이어도 내가 가서 잘해야지’하면서…. (웃음) 예를 들면 <그날들> 같은 공연이요. 어느덧 그런 나이가 됐네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곧 40이라는 게…. (웃음)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나이를 먹어버리다니…." ⓒ (주)스토리피


1982년생 배우 김지현은 정말 '열일'하는 배우이다. 거의 쉴 틈이 없이 많은 작품을 해왔다. 2015년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아래 <카포네>) 초연부터만 세어도, 10월에 끝나자마자 연극 <만추>에서 '애나' 역을 소화했고, 바로 이어서 11월에는 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아래 <한밤개>) '시오반' 선생님으로 열연했다. 2016년 1월부터는 <한밤개>와 함께 연극 <올모스트 메인>까지 소화했다. <한밤개>가 끝나고 <올모스트 메인>이 아직 진행중이었던 2월 말부터 3월 초에는 배우 이석준의 '연출' 데뷔작인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의 키아라도 맡았다.

연극 <올모스트 메인>이 끝나면 좀 쉴 것이라고 하더니 그 휴식은 얼마 가지 못했다. 7월부터 바로 <카포네> 재연에서 다시 '레이디'로 달려야 했다. 이후로 뮤지컬 <그날들> <안녕! 유에프오>를 소화한 후, 2016년의 마지막 그리고 2017년의 첫 작품으로 택한 것이 연극 <벙커 트릴로지>(아래 <벙커>)였다. 정말 빡빡하게 뛰어오면서 2017년을 맞은 셈.

"저 딴에는 그때 그게 엄청 오래 쉰 거였어요. (웃음) 그만큼이라도 쉬는 게 정말 많이 쉬는 거였어요. 4월 초에 공연 끝나고 7월에 <카포네> 올릴 때까지 석 달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연습은 했지만, 그렇게 한 달 반, 두 달 가까이 쉰 건 너무 오랜만이었어요. 일을 왜 계속 하냐고요? 자꾸 잡혀 있으니까요. (웃음) '아? <카포네> 앙코르야? 그럼 이만큼이라도 쉬어야지'하고…. (웃음)

한 번 쉬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지난번에는 여행을 좀 길게 갔다 왔고요. 쉬는 시간이 저에게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웃음) 지금도 공연을 하나만 하니까 정말 좋아요. 하루 쉬고, 하루 반나절 더 쉬다가 공연하고, 또 하루 쉬고…. 정말 바람직한 생활이죠. 극장을 가고, 영화를 보고 너무 행복해요.

아, 근데 이제 <그날들> 앙코르 들어가니까, 벌써부터 이 일상이 소중해요. <그날들> 끝나고도 못 쉬어요. 여름까지는 못 쉬어요. 가을쯤에나 쉴 수 있을까? 그것도 못 쉴지도 몰라요. 재수 없으면 올해 진짜 쭉 일할 것 같아요. (웃음) 행복한 소리죠, 이것도?"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면서 나름의 '관록'을 쌓아가고 있는 이 배우.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여러 작품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이유가 납득이 된다. 베테랑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경험치를 축적했으니까. 그런데 꼼꼼하면서도 세심한 연기가 돋보이는 그조차도 <벙커>는 어렵다고 한다. 2016년 12월 6일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상연될 예정인 <벙커>. 지난 12일 오후 3시 30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벙커> 속 그녀의 고민을 들어보았다.

관객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다가가기 위해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지현 크리스틴 그리고 석준 알베르트 <카포네> 초연부터 재연 그리고 <벙커>까지 호흡을 맞춰 온 이석준 배우와 김지현 배우. 이윤지(이석준-윤나무-김지현) 페어로 불릴만큼 두 배우의 합은 훌륭하다. 이석준 배우는 김태형 연출과 지이선 작가가 협업한 연극을 '지탱극'으로 명명했다. ⓒ (주)스토리피


"<벙커>는 좀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카포네>보다도 더. <벙커>는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고요. 매일매일 물음표가 떠서 더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하다보면서 점점 생기는 거라…. 하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웃음)"

제스로 컴튼의 대표 트릴로지 시리즈, <카포네>, <프론티어 트릴로지>(아래 <프론티어>) 그리고 <벙커>. 이 중 <카포네>는 2015년 초연과 2016년 재연을 통해 연극·뮤지컬 팬들에게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벙커> 역시 이번 공연이 초연이다.

<카포네>처럼 각 70분으로 나뉜 3부작이 <벙커>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모여있다. 각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이라는 시공간적 공통점을 지니지만, 분절되어 독립된 개별 작품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초반, 전쟁에 자원입대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모르가나'는 <원탁의 기사>에서 모티프를 따온 작품이다. '아가멤논'은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독일로 잠시 피신 온 영국 여자와, 저격수 독일군이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파멸하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 '맥베스'는 바로 그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이다. 극중극 형태를 취하며, 전쟁이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와중에 현실비판적 요소도 충실하게 반영했다.

<카포네> 때 증명했듯이, '지탱극'(지이선 작가+김태형 연출의 작품)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이 두 창작자의 조합은 굉장히 강렬하고 독특한 결과물을 내어놓는다. <벙커> 역시 이 '지탱극'의 특징이 충실하게 들어가 있다. 연극이지만 노래도 하고, 춤도 춘다. 라이선스 작품이지만 재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부분들을 넣고 빼고 재조립한다. 그래서 무대와 배경이 비록 우리가 잘 모르는 시공간의 이야기여도,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맥락적 의미를 갖도록 조율한다. 배우들은 엄청나게 '굴러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관객의 만족도는 높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가웨인 그리고 모르가나 판본마다 다소 상이하지만, 아더왕의 전설을 그린 <원탁의 기사>에서 모르가나는 기사들을 유혹하고 아더왕을 파멸시키는 마녀로 등장한다. 가웨인 앞에 등장한 그녀는 환상인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가. ⓒ (주)스토리피


배우 김지현은 '모르가나'에서 아더를 기다리는 여자친구 그웬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모르가나(그리고 가레스), '아가멤논'에서는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여했던 영국인 크리스틴, 그리고 '맥베스'에서는 간호사 릴리와 극중극의 레이디 맥베스를 맡았다. 김지현 배우 머릿속에 자꾸 떠오른다는 '물음표'도 어쩌면 3부작에서 이토록 많은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게 아닐까.

"음,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모르가나'에서 '내가 뭐지?' (웃음) 하면서 '나는 누구, 여긴 어디?'하는 의문이 계속 든다든가, 레이디 맥베스 독백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의심이 생긴다든가…. 처음 극을 올려놓고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벙커>는 작품이 어려워서 그런지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처음에는 잘 해결했다고 생각하고 올렸는데, 하면서 점점 너무…. <카포네>도 물론 깊이가 있는 작품이었지만, <벙커>는 좀 다른 종류의 깊이가 있는 것 같아요."

확실히 깊이가 있다. 친절하지도 않다. <벙커>는 연극이라는 장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우러나오는 더 진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오브제의 심층적인 의미, 기발한 메타포, 반복되지만 다른 의미와 맛을 지니는 대사, 찾아내는 재미가 있는 숨은 복선들까지. 하지만 연극이라는 작품을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는 분명히 어렵다. 쉽게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다.

"많이 봐주신 분들은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한데, 처음 보는 분들은 이 극이 어떠실지…. 엊그제 어떤 관객분이 코를 골면서 주무시더라고요. 너무 죄송했어요…. 코를 막 너무 크게 고셔서 관객들이 다 쳐다보시고…. '극이 너무 지루한가?'하면서 혼자 고민하고, 내가 더 잘했어야 하나 자책도 하고…. 물론 모두에게 다 재미있을 순 없지만, 저 분에게는 이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연극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재미없게 보시면 연극은 재미없다는 오해나 선입견을 만들어드리게 되니까…. 아, 더 재미있게 했어야 했는데…."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대본도 안 보고 선택한 <벙커> "<벙커>도 저한테 대본을 제일 마지막에 줬어요. 그래서 다들 놀랐고요. 어떻게 신성민도 받고, 정연도 받고, 오종혁도 받았는데, 나한테 안 줘? (웃음) 너무 쉽게 한다고 했나? (웃음) 너무 대본도 안 보고 한다고 했나 살짝 후회를…. 그만큼 믿으니까요." ⓒ (주)스토리피


100명의 관객에게만 허락된 무대이다. 비좁은 공간이기에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매우 가까울 수밖에 없다.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팽팽하게 조여 오는 긴장감,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 여기에 실제 벙커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대의 압박감이 자칫 어떤 관객에게는 너무 높은 장벽일지 모른다. 창작진과 배우의 고민은 그래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모르가나'가 조금 바뀌었어요. 많이는 아니고…. (웃음) 작품 끝나면 '내가 하는 거 맞는 것 같아?' '난 뭔 것 같아?' '난 어떤 느낌이야?'이러면서 우리끼리 얘기를 많이 했어요. 서로서로 마음이 통해서 '그래? 그럼 수정 한 번 해볼까'가 된 거죠. 연출진과 같이 미팅하고, 배우들도 연기하면서 함께 느꼈던 것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하는 방향으로요. 하는 입장에서는 훨씬 더 편해진 것도 있고요. 모르가나가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까 해요. 모르가나라는 여자가 환상인지 실재하는 건지 회상인지가 애매하게 구성이 널려 있어요. 예를 들면, 가웨인은 환상을 보는 게 명확하거든요. 그 친구는 그런데 그걸 팩트라고 믿으니까, 가웨인에게만큼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아더나 랜슬롯한테는 걸리는 부분들이 있어요. 지금 나오는 여자가 그웬인지 모르가나인지 헷갈리기도 하고요. 극의 이름도 '모르가나'니까 조금 더 모르가나스러운 느낌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예를 들면, 이전까지 아더는 아예 모르가나를 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아더에게도 모르가나의 환상이 보여요. 계속 보이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이 끔찍한 상황을 버티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죠. 아더 역시 이 전쟁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니까, 세 사람(아더, 랜슬롯, 가웨인) 모두에게 모르가나가 보여야죠. 전쟁이 만들어낸, 전쟁터의 환상이니까. 그래서 모르가나의 끝 장면에서도 등장해서 아더랑 대칭하듯이 서 있죠. 그렇게 아더의 마음 속에도 모르가나를 심어줘요.

모르가나 끝나고 커튼콜 때 제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거든요. 나오면서도 '고생은 남자 배우들이 훨씬 많이 했는데, 내가 마지막에 나와도 되나?' 그러니까 '모르가나잖아'라는 답이 돌아와서 그냥 '아...'했어요. (웃음) 제목이 '모르가나'인데 하면서도 계속, '모르가나 모르겠다' 그러고…. (웃음) 배우들이랑 같이 '모로가도 가면 되는 거 아니야?'이러기도 하고. (웃음)"

편지를 씹어 삼키다 든 자괴감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김지현만의 매력 "비슷한 이미지가 자꾸 소비되는 것 같아서 걱정"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연기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밝은 캐릭터, 어두운 캐릭터, 천진난만한 캐릭터, 성숙한 캐릭터…. 특히나 <벙커>에서 그녀가 맡은 인물들에 이미 특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주)스토리피


<카포네>의 진가는 '로키', '루시퍼', '빈디치'까지 세 작품이 모두 다른 매력을 뽐내면서도 하나의 콘셉트 안에 잘 녹아들었다는 데 있다. 반면 <벙커>에는 '로키'처럼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극이 없다.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 모두 상이한 아우라를 풍기는 건 분명하지만, 세 작품 모두 어둡다. 침잠하면서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다. 어렵기도 하고, 기묘하기도 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연기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극이 제일 마음에 드는지.

"늘 그렇듯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요. 그래도 굳이 꼽는다면 '아가멤논'. '아가멤논'이 아무래도 드라마적으로 수월한 작품이라서요. 아가멤논을 할 때 재미를 건지는 것도 많고요. 캐릭터도 좀 명확하고. 응? '모르가나' 너무 까나? (웃음) '맥베스'도 극중극을 왔다갔다 하다보니까 중심 잡는 게 어렵거든요. 흔들리지 않고 쭉 풀어나가는 건 '아가멤논'입니다. 감정적으로 힘들지 않느냐고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그렇게 많이 힘들진 않아요. (웃음) 발랄한 캐릭터가 저한테 딱 맞진 않은 것 같아요, 훨씬. 하면 할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웃음) 저에게 없는 모습은 아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 하나를 극대화시켜서 하는 거니까요. 무게감 있는, 더 가라앉은 느낌이 더 편하긴 해요."

크리스틴은 영국에서 서프러제트 운동을 하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잠시 독일로 피신했다. '총 쏠 줄 아냐'고 묻는 알베르트의 총을 넘겨 받아 한 방에 사슴을 명중시킨다. 당당하고, 주체적인 이 여자. 자신이 왜 재산도 가질 수 없고, 투표권도 없는지 의아해하는 여자. 그런 크리스틴은 독일에서 알베르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와 결혼한다. 그의 아이를 갖는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다. '아가멤논'은 전쟁으로 멀어진 알베르트와 크리스틴의 비극을 그린다. 그리고 이 비극 속에서 크리스틴은 피폐해져 가고, 의존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김지현의 바람 "좋은 여자 배우와 함께, 친한 친구들과 무대에 서고 싶어요. 같은 배역 말고 같은 공간에서 같이 공연하고 싶은데, 사실 더블 캐스팅이면 같이 할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많거든요. 그런 바람이 있어요." ⓒ (주)스토리피


"지이선 언니가 일반적인 '클리템네스트라'(희곡 원작 <아가멤논> 속 여성 주인공으로, '악녀'로 자주 묘사된다)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여성참정권 운동을 하는 등의 설정을 추가로 넣어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만들고 싶어했죠.

그래서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요. 크리스틴이라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그려놨는데, 알베르트가 전쟁에 나가면서 많이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잖아요. 근데 그런 생각도 있어요. 이 남자와 여기에서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어느 정도 포기한, 이런 면과 저런 면을 반반 섞은 캐릭터가 된 게 아닐까. 독일은 크리스틴에게 알 수 없는 공간이에요. 독일 남자와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지만, 동시에 '이런 남자라면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하죠. 그래서 알베르트의 프러포즈를 크리스틴이 쉽게 오케이하지 못하는 거예요.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상을 갖고 운동을 하는 여자였는데, 그런 사람이 사랑과 결혼을 선택한다는 건 절대 순조롭지 않았을 거예요.

아이를 지키며 살아가는 강한 모습도 보여주지만, 크리스틴에게는 약해 보이는 순간들이 있어요. 전쟁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전쟁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아요. 어떻게 될지도 모르죠. 그래서 전쟁 안에서 피폐해진 사람들의 감정이 부닥쳐야만 이 극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맥베스의 어려움 "대학 때도 고전을 한 적이 없어요. 셰익스피어, 체홉 이런 작품은 거의…. 학교 자체가 워낙 그런 작품을 안 하기도 하는데, 해도 할 기회가 없었죠. 그래서 이 거대한 셰익스피어를 해결하기 위해 허덕이고 있었어요. ‘맥베스! 맥베스!! 맥베스!!!’" ⓒ (주)스토리피


모르가나에 아가멤논 얘기까지 했다면, 맥베스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장교 벤과 마크는 이 지루한 참호전이 무의미하다는 걸 안다. 개활지 몇 미터를 확보하기 위해 쏟아 붓는 물량, 희생당하는 목숨들. 인망 높은 마크를 향해,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장군이 되면 다를 거야'와 같은 말을 한다. 운명처럼 다가온 장군의 자리, 하지만 맥베스가 왕의 자리에 올라 파멸하듯이, 마크도 권력에 취해 미쳐가기 시작한다.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를 극중극으로 집어넣어, <벙커>의 '맥베스'와 <맥베스>가 교차하는 방식을 취한다. 김지현은 콘월 대대의 간호사로서 환자를 돌보는 릴리 그리고 맥베스가 왕위에 오르도록 만드는 레이디 맥베스를 오고간다.

"사실 저한테는 모르가나보다도 맥베스가 제일 어려워요. 어렵고, 어려워서…. 다음에 할 때는 김태형 연출에게 말해서 내가 한 바퀴라도 돌든가, 박수라도 짝짝 치든가 해야겠어요. (웃음) 별로 어렵다고 생각 안 했는데 하면 할수록 어렵더라고요. 사실 원작보다도 레이디 맥베스는 많이 생략되어 있잖아요. 맥베스도 압축해서 하니까 레이디 맥베스는 더 압축해서 장면별로 워낙 짧게 등장하니까…. 맥베스가 주로 끌고 가는 사람이고, 레이디 맥베스는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어떻게 보면 기능적인 측면으로 나오는 건데 그걸 다 하고 있는 건지 고민이 많아요.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보여 드려야하나', '어떻게 보여야 하나', '내가 어떻게 하고 있나' '마냥 미친 여자처럼 보이진 않을까' 같은 고민들이요.

극중극을 하면서, 명확하게 인물 전환이 보여야 하나, 아닌가 고심했죠. 마지막으로 초이스했던 건, 조금 오그라들 수도 있겠지만 확 변환을 시켜야겠다는 것이었죠. 누가 봐도 연극하듯이, 누가 봐도 셰익스피어인 것처럼. 표정이나 톤도 확 변화를 줘야 관객들도 이해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어요. 배우로서는 쉬운 부분이 아닌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쓰던 톤과 말에서 초를 키면 갑자기 다른 톤과 말을 써야 하니까요. 편지도 씹어 먹어야 하고…. 어디 입에 붙어서 나오지도 않고…. (웃음) 잘 씹어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난 누구, 여긴 어디' 이러다가 씹던 편지를 빼면서 이러려고 레이디 맥베스했나 자괴감도 들고…. (웃음) '레이디 맥베스'가 참 힘들어요."

과연 김지현은 <프론티어>도 할까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잠을 죽이다 "잠이 많아요. 최소 8시간씩 자야 해요. 7시간 자면 피곤하고, 8시간 자면 개운해요. 약간 세뇌됐어요. 8시간 잤어? '오, 좋아. 괜찮아.' 7시간 잤으면 '어, 좀 부족하네.' (웃음) 공연 늦게 끝나면, 집에 가면 12시잖아요. 특히 다음날 오전 연습 있으면 전투적으로 집에 가요. '빨리 씻고 빨리 자야지! 그래야 8시간 잘 수 있어!'" ⓒ (주)스토리피


'지탱극'의 탁월함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잡는다는 데 있다. 상업극으로서 극적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의미를 품는 데도 결코 소홀하지 않다. <벙커>는 전쟁의 참상을 그리고 권력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들을 말한다. 연기하는 배우로서 <벙커>의 가장 주요한 메시지는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맥베스'의 마지막 얘기가 그래도 이 작품의 가장 주제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요. 오늘날의 우리가 있기까지 정말 많은 피의 역사들이 있잖아요. 내가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희생에 대해서 알게 되죠. <벙커>를 보고 나가시면서, 역사에 대한 그런 것들을 조금 생각해 보시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이게 그저 전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연극이었으면 저나 배우들도 이입이 많이 안 됐을 것 같아요. 마지막에 그 얘기를 듣고 있으면, 어떤 거대한 일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게 지금 일어나는 세상의 일들에 대응할 수 있는 큰 방법 아닐까? 그런 마음? 그런 걸 한 번쯤 생각하면, 적절했다고 생각해요. 길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웃음)

(손사래 치며) 아, 그렇다고 '푸시(Push)'가 되는 건, 저도 정말 싫거든요. '과거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너희가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치는 거 진짜 별로예요. 그러려는 작품도 아니고요.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 하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과거가 어땠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는지….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잘 몰랐던 사람에게는 그 작은 사실이 정말 큰, '울컥'하는 게 생기는 것처럼요. 세계적인 것이든, 우리나라 안에서의 과거이든, 역사에 대한 생각들을 하면서 조금씩은 잊지 않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트릴로지를 한다는 것 김태형 연출의 '페르소나'를 꼽으라면(본인은 부정하지만), 단연 윤나무 배우를 꼽을 수 있다. 남자 배우 중 페르소나가 윤나무라면, 여자 배우 중엔 누가 있을까. <한밤개> <카포네> <벙커>까지 함께 한 김지현 아닐까(역시나 본인은 부정했다). '이윤지' 페어가 다시 한 번 '지탱극'을 만난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즐겁다. ⓒ (주)스토리피


<카포네> 초연과 재연 그리고 <벙커> 초연까지. 제스로 컴튼의 트릴로지 시리즈 3개 중 2개는 훌륭하게 각색되어 국내 무대에 안착했다. 지이선과 김태형이라는 훌륭한 페어도 한 몫했지만, 이 극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메신저로서 활약한 배우들의 공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이제 하나 남은 제스로 컴튼의 트릴로지 시리즈인 <프론티어>도 머지 않이 국내에 소개될 예정이다. 이미 김태형 연출은 지이선 작가에게 프로그램북을 통해 공개적 '러브레터'를 쓴 상황. 과연 김지현도 함께 하게 될까. 연출이 '연기 인력거'라고 부를 정도로 신뢰가 높은데?

"<프론티어>…. 아아…. '지탱극'…. (웃음) 지 작가 언니도 안 하겠다고 했다가, 프로그램북에 완전…. 전 깜짝 놀랐어요. (웃음) '뭐야? 정말? 이게 뭐야? 북한이야? 공산주의야? 안 하면 총살시킬 지경인데?' (웃음) 지이선 언니가 분노했더라고요. '이 미친놈이! 이런 글을 프로그램북에!' (웃음) 그래서 연출의 글이 그렇게 늦게 나왔구나 싶었죠.

뭐, '지탱'씨가 저 말고 다른 여배우랑 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김태형 연출의 페르소나는 윤나무로 충분한 것 같고요. 저는 빼주세요…. (웃음) <프론티어>는 제가 본 적도 없고, 자세한 내용도 전혀 몰라서요. 콘셉트 정도만 알고…. 정확히 얘기된 건 아직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제안이 온다면…. 우선 물어봐야죠. '지이선 언니, 쓸 거야?', '윤나무, 너 할 거야?', '(이)석준 오빠, 할 거야?' 그렇게 한다면? 그렇게 하면 당연히 해야죠. (웃음) 너무 세트로 묶여 다니면서 같이 다니는 게 서로에게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도 분명 있거든요. 세 트릴로지를 다 한다는 건, 저에게도 큰 의미가 될 것 같아요."

바로 뒷타임의 인터뷰가 잡혀 있어서, 아직 못 푼 이야기가 많음에도 정리해야할 시간이 왔다. 진짜 마지막 질문. 수많은 작품을 섭렵하며, 대체불가능한 배우가 되어가고 있는 김지현에게 <벙커>는 어떤 필모그래피로 남게 될까?

"과연 김지현은 <프론티어>까지 할까? (웃음) 이번 <벙커>에서 판가름 나나? (웃음) 음…. <벙커>…. <벙커>는 글쎄요. 저한테는 이렇게 재미있는 구성의 초연 연극 두 편을 세 번이나 올린 게, 특이한 이 공간에서 관객을 만났다는 게 배우로서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작품이었어요. 쉬운 공간은 아니니까요. 많이 고생했지만, 쉽지 않은 공간에서 다른 종류의 여섯 개의 공연을 연습하고 올리면서, 배우로서 어떤 부분이라도 단단해지지 않았을까요. 김지현은. (웃음)"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솔저, 김지현 지난 2016년 12월 6일에 개막하여 오는 2월 19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맞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 이 작품에서 '솔저4'로 출연 중인 배우 김지현의 프로필 이미지 및 출연 모습이다.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각 작품별로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며 본인만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고 있다.

▲ 김지현에게 오는 작품 "너무 감사하게도 항상 흥미롭고 하고 싶은 작품이 들어와요. 재밌겠다 하는 작품들이 들어와서 다 재밌게 소화하고 있고, 그래서 계속 일할 수 있는 것 같아요"라는 그. 앞으로도 '열일'해주기를 바라본다. ⓒ (주)스토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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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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