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블랙리스트' 예술 검열에 저항하고자 예술인들은 직접 머리에 '검은색' 비닐 봉지를 쓰고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 앞 도로에 앉았다. 이들은 조윤선 장관 출근 저지 투쟁을 벌였으나 조 장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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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난장'이었다. 새가 우는 소리조차 소음으로 들릴 정도로 조용한 세종시에 문화예술인들이 주도하는 1박 2일의 '판'이 벌어졌다.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태', 이른바 '예술 검열'에 분노한 문화예술인들이 지난 11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있는 정부세종청사 앞에 모였다. 정부에 '블랙리스트'로 '찍힌' 문화예술인들이 워낙 많은 탓일까. 문학부터 연극, 영화, 미술, 음악까지 장르를 막론하고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한데 모였다. 문화예술인 200여 명은 11일 오전 10시부터 '블랙리스트 버스'를 타고 서울 광화문에서부터, 혹은 전국 각지에서 손수 이동수단을 마련해 정부세종청사 앞에 도착했다. 이들이 도착하자 다소 적막했던 문화체육관광부 앞은 시끌시끌 생기가 넘쳤다.

 '노란 우산'을 학생들이 '블랙리스트 버스'를 보고 환호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 자격으로 이날 블랙리스트 집회에 참석했다. 노란 우산을 들고 있던 한 학생은 스스로를 '배우 지망생'이라 밝혔다. 그는 "세월호 참사도 그렇고 현재 가장 많이 사용하는 색깔이 노랑색이지 않나. 그래서 노란 우산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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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예술적인' 시위

문화예술인들은 서울 광화문에서 공수해 온 박근혜 대통령과 조윤선 문화체육부 장관 등의 모형을 문화체육관광부 건물 앞에 놓고 세종시 집회의 첫 문을 열었다. 첫 순서로 문화예술인들이 선택한 건 '침묵 시위'였다. 이들은 블랙리스트 사태에 저항하는 의미로 '검은' 비닐 봉지를 쓰고 문화체육관광부 앞 도로에 앉았다. 또 어떤 이들은 머리 위에 검은색 갓을 쓰기도 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머리에 검은 봉지를 쓰고 선두에 서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을 독려했다. 세종시의 바람이 사정 없이 검은 봉지를 때렸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블랙리스트' 예술 검열에 저항하며 머리에 '검은색' 비닐 봉지를 썼다. 지난 11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는 문화예술인들은 서울 광화문에서 '블랙리스트 버스'를 타고 세종시로 와 조윤선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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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경동 시인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는 의미로 머리에 검은 비닐봉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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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시위로 잠시 조용했던 문화체육관광부 앞은 이윽고 풍물 소리로 가득 찼다. 주로 여성들이 주도해 도깨비를 쫓아냈던 의식인 도깨비 굿이 2017년으로 왔다. 장구를 치는 하애정씨는 이날 도깨비굿을 위해 직접 빨간색 옷을 만들어왔다. 그 역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하애정씨에 따르면 빨간색 옷은 용기와 희생을 상징한다.

그를 비롯해 도깨비굿에 참여했던 문화예술인들은 정신 없이 풍물을 때리며 건물 앞 도로를 무대 삼아 빙글빙글 돌았다. 도깨비굿은 솥뚜껑처럼 일상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낡고 깨진 풍물을 이용한다. 도깨비굿의 취지에 맞게 문화예술인들은 각자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물건을 쥐고 한참 춤을 추었다.

 '블랙리스트' 에 오른 풍물인 하애정씨가 11일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장구를 치고 있다. 지난 11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는 문화예술인들은 서울 광화문에서 '블랙리스트 버스'를 타고 세종시로 와 조윤선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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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물패 삶터의 이성호씨가 11일 오후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태에 저항하며 '블랙리스트 칼날' 위에 올라가 익살 맞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성호씨 역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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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들이 '공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공연을 마무리하고 각자 빗자루를 쥐고 "쓰레기를 쓸어버리자" "조윤선은 나와라"라고 외치며 문화체육관광부 정문으로 뛰어갔다. 경찰들이 이를 제지하자 울타리 위로 올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어 문화예술인들은 "박근혜 구속"과 "조윤선 사퇴"를 요구하며 정부세종청사 건물을 따라 행진했다.





 11일 오후 문화예술인들이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 앞에 모여 조윤선 장관 모형에 '검은' 먹물을 뿌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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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순택 사진작가가 11일 오후 박근혜 정권의 예술 검열에 항의하며 문화체육관광부 울타리 위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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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짧고 예술은 길다"

11일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뭉쳤지만 이들의 요구는 같았다. 블랙리스트 사태를 만든 책임자인 조윤선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오후 조윤선 장관 모형에 '검은' 먹물이 뿌려졌다. 집회에 참석한 문화예술인들은 환호했다. 자신들에게 블랙리스트라는 혐의를 덧씌운 사람이 반대로 '검은' 먹물을 뒤집어썼다. 조 장관의 모형이 절반 가까이 검게 칠해지고 나서야 이 퍼포먼스는 끝이 났다. 공연으로 내내 흥겨운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문화예술인들의 분노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장면이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의 대표적인 탄압 예술가인 이하 작가도 이날 자신의 그림을 들고 시위에 참석해 "조윤선 사퇴"를 외쳤다. 이하 작가는 또박또박 "박근혜와 조윤선 퇴진시키러 왔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권력자들이 예술까지 통제하려고 한다"며 "표현의 자유, 생업의 자유 그건 우리에게 목숨 같은 것이다. 그걸 막는다는 건 우리 보고 죽으라는 이야기"라고 언급했다.

 11일 오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는 예술인들이 정부세종청사 건물을 따라 행진하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 버스'를 타고 서울 광화문에서 세종시까지 와 블랙리스트 사태의 책임자인 문화체육관광부 조윤선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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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소설가는 무대 위에 올라 "국민들이 이 추운 날 무슨 고생이냐. 사람 하나 잘못 뽑으면 이 고생을 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오랫동안 광화문 광장 텐트촌에 머물렀던 류연복 판화가 역시 소리를 높였다. 류 판화가는 "적은 돈을 갖고 네편 내편 갈라 예술가의 자존심을 건드는 행위가 바로 블랙리스트다"라고 정의하면서 "예술가라는 건 돈 없이 배를 곯더라도 자기 자존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말했다.

조윤선 장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박 2일 동안 조윤선 장관은 문화체육관광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2일 오전 조윤선 장관 출근 저지 투쟁을 진행하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30여명은 조 장관이 나타나지 않자 먹물을 뒤집어 쓴 조윤선 장관 모형을 출근시키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했다. "조윤선 장관님 출근하십니다! 길 좀 비켜주세요!"

[관련기사] 먹물 뒤집어 쓰고, 빗자루질... 조윤선 장관의 '굴욕'

 12일 오전 8시 세종시 정부종합청사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30여 명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들이 모여 조윤선 장관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11일부터 1박 2일 동안 '블랙리스트 버스'를 조직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의 책임자인 조윤선 장관의 사퇴과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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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10시 경, 이들은 세종시를 뒤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16일 광화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블랙리스트 대응 대규모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만이 아니라 블랙리스트로 인해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시민이면 누구나 집단 소송에 참여할 수 있다. 아직 '판'은 끝나지 않았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화체육관광부 세종시 블랙리스트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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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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