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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탄생지 근처에 있는 작은 강줄기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싯다르타 탄생지 근처에 있는 작은 강줄기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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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간에서 저녁을 먹고 한국에서 온 비구니 스님과 함께 싯다르타 탄생지를 찾아 나섰다. 그마나 찌는 듯한 태양의 열기가 조금은 식었지만 더위는 여전하다. 싯다르타가 태어났다는 주변에 작은 강줄기가 있는데 형편없이 메말라 있다. 목이 긴 새들이 수심 얕은 강가에 긴 다리로 얼쩡거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빗줄기가 내리는 몬순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저 붉은 태양을 보니 내일도 무더위는 여전할 것 같다.

노을빛에 물들고 있는 강줄기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강물에 비친 노을과 풀숲이 마치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턱밑에서 먼발치로 만났었던 비구니 스님은 소녀처럼 그 그림 속에 젖어 있다.

싯다르타의 나라, 카필라 바스투는 이곳 룸비니에서 서쪽으로 30여 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폭 좁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자 저만치 싯타르타의 탄생지, 마야데비 사원이 보인다. 마야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그 먼곳에서부터 이곳까지 어떻게 왔을까.

8세기 혜초 스님이 이곳 룸비니를 다녀온 소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 사방에 도둑 떼와 맹수들이 들끓었으며 사람의 자취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때와는 달리 도둑이나 맹수들은 없었지만 룸비니 동산은 여전히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싯다르타가 태어났다는 마야데비 사원에도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싯다르타 탄생지로 알려진 네팔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 입구
 싯다르타 탄생지로 알려진 네팔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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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데비 사원에는 마야부인당(摩耶夫人堂)과 목욕지(池)가 있고, 아쇼카대왕의 석주(石柱)가 있다. 불교에서 전해져 오는 설화에 의하면 마흔이 넘은 마야부인이 이곳에서 무우수(無憂樹)나무에 오른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는 순간 싯다르타가 오른쪽 겨드랑이 밑을 뚫고 태어났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불교경전 <전등록(傳燈錄)>에 보면 아기가 태어나면서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즉, 하늘 위아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나니 온갖 괴로움으로 덮인 세상 내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 여기서 삼계(三界)란 천상·인간·지옥계를 말하며, 일곱 걸음을 걸어갔다는 것은 지옥도·아귀도·축생도·수라도·인간도·천상도 등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유아독존'의 '나'는 싯다르타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개개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든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이르는 말이다. 싯다르타가 이 땅에 온 뜻은 이를 깨우쳐 고통 속에 헤매는 중생을 구제하고 인간 본래의 성품인 '참된 나(眞我)'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 부인이 목욕했다는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 부인이 목욕했다는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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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연못 혹은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이라 불리는 이곳을 불교 신자들은 마야부인이 해산 전에 목욕을 하고 갓 태어난 싯다르타를 목욕시켰다 하여 성스러운 연못으로 여기고 있다.

5세기 무렵 이곳을 다녀간 중국의 법현 스님은 '마야왕비가 목욕한 연못은 많은 스님들이 그 물을 퍼 마신다'라고 기록했고 7세기에 다녀간 현장스님은 "이곳에는 석가족들이 목욕하던 연못이 있다. 물이 맑아 마치 거울과 같으며 갖가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싯다르타 연못은 마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목욕을 할 수 없을 만치 탁하다.

마야 부인을 모시기 위해 지은 흰색 건물의 마야데비 사원은 근래에 지은 것이다. 사원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데 무너진 옛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붓다의 탄생지를 알리는 석판이 발견되었다는 이 사원이 맨 처음 세워진 시기는 5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룸비니의 마야데비 사원이 붓다의 탄생지로 알려지게 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아소카왕 세운 석주에 근거하고 있다. 아소카 석주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빠야다시(아소카 왕의 다른 이름)왕'은 즉위 20년이 지나 이곳을 참배했다. 이곳에서 붓다 석가모니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도록 했다. 이곳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됐음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며,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하고 추수세는 생산물의 1/8만 거둔다."

 
마야데비 사원과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세워 진 것으로 알려진 아소카 석주(건물 오른쪽 기둥)
 마야데비 사원과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세워 진 것으로 알려진 아소카 석주(건물 오른쪽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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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 텅 비어 가는 마야데비 사원에서 나올 무렵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는 싯다르타의 탄생 신화를 믿어야 하는가 마는가는 중요치 않다. 싯다르타의 탄생이 존귀한 것은 모든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일깨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생후 7일, 어머니인 마야부인과 사별하고 이모에 의하여 양육되어 그 후 16세가 되어 결혼했고 아들을 얻은 후 29세에 출가를 하여 고행 길에 나섰다는 싯다르타.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길을 걸으며 나는 생후 7일 만에 어미젖을 놓아야 했던 가련한 아기 싯다르타를 떠올렸다.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길은 분명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또한 우리처럼 고뇌하는 영혼과 살과 뼈, 육신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애초에 생로병사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깨달음을 이룬 붓다이기 전에 우리처럼 온갖 고통 속에서 살아온 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 매달리기 보다는 예수가 온몸으로 말했던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듯 싯다르타의 탄생 신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싯다르타가 말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깨달음의 길,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네팔 룸비니에서 첫날 밤은 모기와의 전쟁이었다. 모기장 틈으로 침투해 들어온 몇 마리의 모기들이 끈적거리는 내 몸을 향해 저 죽을 줄 모르고 달려들었다.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모기 침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따끔한 진원지에 근육을 단단히 해놓고는 손바닥을 파리채 삼아 사정없이 휘둘러 댔다.

그동안 한국의 쌀쌀한 봄가을 날씨와 맞먹는 히말라야 주변을 맴돌았기에 인도 네팔 모기와 정면으로 부딪힌 경우가 없었다. 모기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네팔 룸비니의 한여름 밤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선풍기에서 조차 뜨거운 바람이 불어댔고 촘촘한 모기장은 거추장스러운 차단막이 되어 숨을 옥죄어 왔다.

수시로 모기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화장실 주변의 세면장에서 미지근한 물을 끼얹고 돌아 나오는 순간 왱왱 거리는 공습경보와 함께 모기떼들이 자살공격대, 가미카제처럼 달려들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모기가 달려들지 않는 체질임을 자랑삼곤 했는데 이곳 네팔 룸비니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모기들은 공습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이유도 없어 보였다. 모기들을 피하는 것은 나의 생존법칙이고 모기들의 생존법칙은 내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모기를 때려잡겠노라 방안을 휘젓고 다니다가 다시 모기장 속에 스스로 갇혔다. 시체처럼 반듯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숨고르기를 했다. 어느 순간 모기들의 피인지 나의 피인지 붉은 피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지금 대체 뭐하고 있는가. 싯다르타, 고타마 붓다가 태어난 룸비니에서, 그것도 불교 사원에 누워 살생을 일삼고 있다니...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룸비니 동산에서 모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라 했던 붓다의 가르침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문득 우리 집 작은 아이 인상이가 떠올랐다. 녀석이 대여섯 살 무렵이었다. 모기떼들이 왱왱 거리는 한여름 밤에 제 형 인효와 함께 가부좌를 틀고 오래 앉아 있기 시합을 하다가 녀석이 내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아빠, 이러고 오래 있으면 부처님은 발 안 저려? 모기가 부처님도 물어?"
"글쎄..."

그 당시 나는 인상이가 별 생각 없이 단순하게 던진 질문을 붙잡고 오만가지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부좌 틀고 앉아 수행하던 부처님의 발은 저리지 않았을까? 모기가 부처님을 물었을까? 뱀은 부처님을 보호해 줬는디 설마 모기가 피를 빨아 먹었을라구, 아니지 그래도 뱀은 영물이잖어, 모기하구는 천성이 다르지. 부처님이 완성체가 되기 이전에는 아마 모기한티 엄청 뜯겼을겨.'

녀석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를 궁리하고 있는데 정작 녀석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빨랫줄에 걸어 놓은 엄마 옷이 귀신같다'며 부처님과 모기를 금세 잊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무엇이 소중하고 소중하지 않은 것인지를 따로 놓고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어떤 것에 집착하는 순간, 관념이 되어 버린다. 관념은 그 무엇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단지 잡념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인도와 네팔을 떠돌고 있는 나는 여전히 부처님의 말씀이 이랬는니 저랬는니 떠올려가며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모기조차도 소중한 생명이라 여겼던 불과 몇 시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해 손바닥에 붉은 피를 묻혀가며 모기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어리석음을 인식해놓고 나는 곧바로 또 다른 잡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모기가 부처님도 물었을까? 부처님도 인간이었다.'

온갖 잡념에 사로잡혀 밤잠을 설친 탓에 뜨거운 태양이 중천에 떠올라 있을 무렵에서야 흥건한 땀에 절어 잠에서 깼다. 

네팔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날아든 까마귀들
 네팔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날아든 까마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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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밖으로 나와 보니 어제 저녁 무렵 어린 싯다르타로 다가왔던 네팔 아이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타고 온 버스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른 아침 어디론가 떠난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앉아 있던 벤치에 자리다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싸움을 하는 것인지 서로 부리를 쪼아대며 이리저리 날갯짓을 하고 있는 까마귀 몇 마리가 보인다.

저만치 벤치에서 젊은 한국인 여성이 서양 남자에게 뭔가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어제와 다른 서양남자였다. 벌써 세 번째 서양 남성이었다. 한국인 여성은 긴 머리를 뒤로 제켜가며 깔깔거리고 있었고 서양 남성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폼이 불교 수행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서양 남자였지만 한국인 여성은 그 서양 남성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나는 흐느적거리며 다시 숙소로 들어와 배낭을 꾸렸다. 이곳에서 차분히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밀려 있던 원고를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모기와 더위 탓에 노트북조차 펼치지 못했다.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싯다르타 탄생지에서는 더 이상 붓다를 만날 수 없었다.

룸비니에서 버스를 타고 소나울리 국경으로 가기 위해 어느 버스 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탔다. 혼잡한 소나울리 국경 마을에 도착할 무렵에서야 손목이 허전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동생 스님이 선물한 염주를 룸비니 한국 사원의 세면장에 놓고 왔던 것이다.

한국에서부터 부적처럼 손목에 두르고 다녔던 소중한 염주였다. 이제 내 스스로가 부적이 되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처로 삼아라' 말씀 하셨듯이 이제부터 의지할 거처는 내 자신뿐이다.

동생 스님이 달라이라마 존자로부터 받았다는 그 염주는 이제 그 누군가의 소중한 염주가 될 것이었다. 그 잃어버린 염주는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물음 앞에 서게 했다. 내가 거처하는 보금자리 또한 마찬가지다. 내 보금자리에 누군가가 머무른다면 그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이다. 네팔 국경 너머 인도 어딘가에 내가 머물 새로운 거처가 있을 것이었다.

네팔 인도 국경 마을 소나울리
 네팔 인도 국경 마을 소나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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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룸비니, #마야데비 사원, #싯다르타, #소나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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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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