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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4살, 6살, 8살
▲ 삼남매 4살, 6살, 8살
ⓒ 이종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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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이었다. 다른 가족들이 깰까 봐 살금살금 거실에 나와 이것저것 챙기고 있는데, 첫째가 나 때문에 깼는지 따라 나왔다. 아빠와 단둘이 있음을 확인한 뒤 비장하게 말을 거는 8살 까꿍이.

"아빠, 궁금한 게 있어."
"응? 뭐가? 말해봐."
"아빠, 솔직히 말해야 돼."
"알았어. 뭔데?"
"이 세상에는 산타클로스 없지?"
"응??!!"

벌써 두 번째였다. 며칠 전 저녁에도 갑자기 산타클로스가 없지 않느냐고 엄마, 아빠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라며 다그치던 까꿍이었는데 또 시작이었다. 그때는 뉴스 본다고 조용히 하라며 어물쩍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딸아이의 시선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누가 그래, 산타클로스가 없다고?"
"친구들이 다 그래. 수진(가명)이는 크리스마스에 일어났는데 엄마가 선물 놔두는 거 봤대."
"걔네는 산타클로스가 엄마에게 부탁했는가 보지."
"에이. 솔직히 말해줘."
"진짜야. 산타클로스는 있어."

내가 누나다
▲ 누나와 함께 내가 누나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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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단호함에 까꿍이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빠가 있다는데 어쩔 것인가. 없다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까꿍이는 영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고백하는 것도 우스웠다. 진실을 찾아가는 건 너의 몫일 뿐. 난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딸아이와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앗! 둘째, 셋째가 방에서 나왔다. 위기였다. 누나와 달리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으며 선물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녀석들은 며칠 전에도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누나 말에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침을 튀기며 반론 아닌 반론을 폈었다.

산타할아버지를 더 이상 믿지 않는 1학년과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기 위해 울음을 참는 아이들을 섞어 놓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난 다시 아이들에게 빨리 씻으라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부디 딸아이가 두 동생을 설득할 수 없기를 바라며.

빨라진 성장 시계

이제 시작이다
▲ 이빨 빠진 강아지 이제 시작이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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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해져가는 나이
▲ 1학년 까꿍이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해져가는 나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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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산타할아버지의 정체까지 의심하게 된 까꿍이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며칠 전 치아를 뺄 때만 하더라도 그냥 많이 컸구나 싶었을 뿐인데, 녀석에게서 막상 산타클로스가 거짓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아이가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성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뜩 나의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내가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친구들에게 진실을 처음으로 전해 들은 난 믿을 수 없었다. 산타할아버지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두고 갔었고, 예쁜 글씨로 카드까지 써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가짜라니.

나는 곧장 집으로 가서 어머니께 따지듯 물었고, 당신은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한 번쯤 부정하실 만도 하건만 내가 워낙에 단정적이었는지, 그것도 아님 10살이 넘은 자식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겨주시기가 부담스러웠는지 어쨌든 그렇게 진실을 밝히시고 말았다.

나는 혼자서 이 엄청난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동생을 붙들고 크리스마스의 비밀을 이야기해줬는데, 덕분에 이후 12월만 되면 동생에게 끊임없이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동생의 이야기인즉, 자신은 오빠 때문에 2년 더 빨리 산타할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그만큼 나보다 선물을 적게 받았다는 것이다.

4살과 6살
▲ 산타의 존재를 확신하는 두 형제 4살과 6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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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내가 산타클로스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4학년이었는데, 까꿍이는 1학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 진실을 눈치채다니. 당황스러웠다. 물론 언젠가 이런 시기가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그만큼 요즘 아이들이 우리 때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이야기겠지. 

아이의 빠른 성장이야 나중에 고민하더라도 당장이 문제였다. 어떻게 설명하지? 동생들한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조건으로 선물을 사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이 기회에 녀석들 모두에게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이야기할까? 도대체 왜 이런 관습이 생긴 거지? 왜 굳이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줘야 하는지 원.

의기양양 까꿍이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슬며시 내게 눈짓을 보냈다. 까꿍이에게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동생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조건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겠노라고 까꿍이와 타협을 끝냈다고 했다. 결국 까꿍이의 집요한 물음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저녁을 먹은 후 식구들이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다시금 산타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는 여섯 살 둘째와 이제야 산타클로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네 살짜리 막내는 산타할아버지에게 받을 선물 이야기만으로 시끄러웠다.

불현듯 장난기가 발동한 아내. 막내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다
▲ 청천벽력 같은 소식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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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댕아. 넌 이번에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못 받아."
"왜?"
"걸핏하면 울잖아.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셔."
"진짜?"
"노래도 있어. 한 번 들어볼래? (스마트폰으로 캐롤을 들려주며) 거봐. 진짜지?"
"그럼 어떡해? 착한 일 하면 되는 거야?"

결국 막내는 울음을 터트렸고, 아내와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숨이 넘어갈 듯 웃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까꿍이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꺼냈다.

"난 착한 일 안 해도 돼."
"누나, 착한 일 해야지만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신대."
"난 필요 없어. 그래도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실걸? 그치 아빠?"
"응? 으응. 그래도 울면 안 되지."

까꿍이의 반격(?)으로 우리는 막내에게 더 이상 장난을 이어갈 수 없었다. 녀석은 엄마, 아빠를 유치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까꿍이는 진실을 알고 있었고, 그 진실이 힘이 된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있었다.

비록 아이의 성장이 빠른 감이 없진 않지만 그것이 요즘 세대들의 현실이라면 부모로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만은 그럴 리 없다고 버티는 것 자체가 내가 소위 '꼰대'임을 자인하는 꼴이었다. 다만 까꿍이가 너무 빨리 애어른이 되어 속세에 찌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주말은 광장에서
▲ 광장에서 주말은 광장에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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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아이들에게 고백을 해본다.

"까꿍아, 산들아, 복댕아. 요즘 아빠가 너희들한테 미안해. 아직 밝고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들만 봐도 부족할 나이인데, 대통령 탄핵이니 퇴진이니 하면서 거친 현실에 너희들을 너무 여과 없이 노출시키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되거든.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이 너희들을 성장시킨다고는 하지만 부모로서 노파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결국 남루한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비판적이지만 낙관적인 자세가 필요하고, 그건 지금 너희들이 겪는 경험들과 생각에서부터 시작되거든. 아빠도 너희들이 좀 더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메리 크리스마스."

까꿍이의 외침
▲ 박근혜는 퇴진하라 까꿍이의 외침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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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육아일기, #크리스마스, #산타, #산타할아버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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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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