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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광화문으로!

19일 토요일. 우리 집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지난 12일 회사 업무 때문에 광화문 광장에 나가지 못했던 내가 이번 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광장에 나가야 한다며 식구들을 다그친 탓이었다. 오늘은 계엄령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 광경을 아이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설마 계엄령이 내려질까.

외출하기 전 이것저것 챙기고 있는데 자기 방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던 첫째 까꿍이가 이거면 되겠냐며 A4 한 장을 들어 보였다. 그곳에는 '대통령 하야'라는 글귀가 들어 있었다. 허어. 초등학교 1학년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하야라. 어쩌다가 나라가 이 모양이 됐는지.

대충 잘 했다고, 그거 가지고 가서 흔들면 되겠다고 건성건성 대답하자 까꿍이는 그런 아빠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지 또다시 뭔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종이를 내밀었다. 좀 더 많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국민의 명령이다'
'한국이 엉망이다'
'우리는 기분이 엄청 힘들다'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려면 그만해라'

촛불의 형상화
▲ 조금 더 심각한 하야 요구 촛불의 형상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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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랑한 글귀에 헛웃음부터 나왔다. 이 아이가 도대체 얼마나 알고 이런 말들을 구사하고 있는 걸까? 녀석에게 이 사태는 나중에 어떻게 기억될까?

"이런 말은 어찌 알아? 엄마, 아빠가 이야기 했던가?"
"아니. 말 안 해도 알지. 뉴스도 계속 보고 있는데."

옆에서 막내 복댕이가 끼어든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려와야 해."
"응? 넌 대통령이 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통령이 예뻐지는 주사 맞는다고 누나, 형들 죽어가는 거 안 보살폈잖아."

이런. 네 살짜리 꼬마한테도 신뢰를 잃어버린 대통령이라니. 네 나이면 꿈이 대통령이라고 해도 조숙한 느낌이건만, 넌 벌써부터 대통령이 내려와야 하는 현실부터 배우고 있구나. 그래도 어쩌랴. 이게 현실인 것을. 오늘 아빠는 그런 너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줄 거다.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갔다. 예전 같았으면 교보문고 등지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촛불집회에 참여하곤 했으나 이번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도 봐야 되니 집회에 참여했다가 아이들 졸릴 시간에 맞춰 전철을 타고 일찍 돌아오는 수밖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엄마, 아빠와 전철을 탄다며 신 나했지만, 밤늦게 녹초가 되어서 돌아올 아이들 생각을 하니 부모로서 걱정부터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다. 과연 이게 잘 하는 일일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광화문 광장에 가서 나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가뜩이나 요즘 얕은 감기에 몸 상태도 좋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굳이 광화문으로 향하는 건 내 욕심 아닐까?

그때였다. 전철 안에서 까꿍이가 반가운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녀석의 같은 반 친구였다. 그 아이도 엄마, 아빠, 유모차의 갓난아기 동생과 함께 외출을 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역시 광화문이었다. 까꿍이는 자신의 친구가 자기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고무된 듯 전철 안에서 연신 까르르거리며 즐거워했지만, 정작 그 모습에 위안을 받는 것은 내 자신이었다. 그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도 광화문 행 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 광화문 행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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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을 들른다는 까꿍이의 친구와 헤어진 뒤 우리는 4시쯤 드디어 광화문에 도착했다. 행사 시작이 6시라고 했지만 광화문은 벌써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곳곳에서 이번 시국에 대한 국민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최순실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세월호 7시간, 박근혜 대통령 퇴진까지 모두가 격정적이었다.

아내의 말대로 거리에는 광우병이나 세월호 등 예전 촛불 때와 달리 노년 세대가 많이 보이는 듯했고, 그만큼 광장은 어느 때보다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JTBC뉴스룸은 광장의 온도가 실제로 다른 곳보다 6도 높았다고 보도했다). 사람들은 모두 분노에 차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다.

벌써 인산인해다
▲ 19일 16시 경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 벌써 인산인해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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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 하는 까꿍이
▲ 마음을 꾹꾹 담아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 하는 까꿍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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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계속 차가운 광장에 둘 수 없어 교보문고에 잠시 들렀다 나오니 어느덧 6시가 되었고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광화문 사거리는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었기에 안내에 따라 교보문고 건물 뒤를 돌아 세종대왕 동상 앞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촛불들이 저 멀리 광화문까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항상 촛불 사이에 있어서 전체적인 조망이 어려웠었는데 그렇게 직접 촛불을 조망하고 보니 새삼 정치인들이 이 시위를 왜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광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60만 촛불의 함성. 계속해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여섯 살 둘째가 문득 질문을 던진다.

"왜 사람들은 여기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 이러지 말고 대통령한테 가서 이야기하면 되잖아."
"네 말이 맞는데, 대통령이 안 만나줘. 경찰들 시켜서 길을 다 막았어. 그래서 우리가 대통령 들으라고 이렇게 소리 지르는 거야."
"그래? 참 나쁜 대통령이네."

광화문 광장
▲ 국민의 요구 광화문 광장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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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때 그곳에 있었다

내가 처음 광장을 접한 건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02년 6월, 한일월드컵으로 한창 뜨거웠던 그때였다. 나는 광화문에서 스페인 전을 보고난 뒤 집에 오던 길을 평생 잊지 못한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느릿느릿 기어가는 버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중앙선 너머 버스 승객과 거리낌 없이 하이파이브를 했던 그 경험.

평소 같았으면 생면부지의 사람과 어깨만 부딪혀도 죄송하다고 했을 텐데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이 허용됐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로 원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그 승리의 광장에서 비록 서로 몰라도 얼싸안고 기쁨은 나누었으며, 벅찬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마음껏 소리 질렀다. 당시 우리는 말 그대로 하나였으며, 하나의 공동체를 경험했다.

혹자들은 그 모습에서 과도한 국가주의를 봤다며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그 비판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광장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그 무엇이었다. 비록 '국가'를 매개로 했으나, 광장은 본질적으로 나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타자에 대한 인식의 장이었으며, 우리의 에너지를 확인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광장의 목소리가 우리 모두를 대변한다는 분명한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느낌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난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지고 촛불이 타오를 때면 항상 광화문 광장에 서 있었지만 2002년도의 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광장에서 많은 시민들과 함께 항상 분노하고 외쳤지만, 그것이 오롯이 우리 공동체의 힘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생각이 존재했고, 촛불은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박근혜 즉각퇴진
▲ 아이들의 외침 박근혜 즉각퇴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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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날의 촛불은 예전과 달랐다. 구호가 더욱 격정적이고 뜨거웠다. 그것은 오히려 2002년도 승리의 광장에서 느꼈던 그 기운에 가까웠다. 비록 아직 목적 달성은 이루지 못했지만, 우리의 함성이 공동체 전체를 대변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 확신에 차 있었고,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임을 느끼고 있었다. 혹자들의 말대로 뜻하지 않게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있었다.

며칠 전 영화 <자백>과 <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보면서 가장 감동스러웠던 때는 다름 아닌 후원자 명단이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내 이름을 찾느라 바빴지만, 이후 느낀 감정은 위안과 안도감이었다.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그 감정을 현재 광장에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자막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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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내려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데 막내 복댕이가 오늘 외쳤던 구호를 다시금 크게 복기한다.

"퇴진해는 박근혜라."

다 같이 웃음이 터진다. 그래, 네 살짜리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퇴진이 뭐고, 박근혜가 무엇인가. 다만 네가 오늘 광장에서 얻은 그 느낌은 가지고 가기를. 그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고, 네가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의 저력이란다. 나중에 10년 뒤 역사를 배울 때, 그리고 네가 아이를 낳고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 말하렴. 우리는 그때 그곳에 있었노라고.

부디 박근혜 대통령이 하루빨리 결단하기를 바란다. 아이 셋 데리고 광화문 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태그:#육아일기,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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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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