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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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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그래픽 일러스트 그림책을 선호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고 산보다 더 큰 붉은 거인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책장을 넘겼다.
아이들 방학에 맞춰 1주일 일정으로 친정에 내려온 지 사흘째. 처음 이틀은 넷째라도 임신한 마냥 늘어져 자고, 다음 하루는 어릴 적 놀던 동네의 산과 들로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다니고, 그 다음 하루는 아이들에게 오랜만에 책도 읽어주고 같이 종이접기도 하며 느릿느릿 시간을 보냈다. 몇몇 가지 일들이 여전히 쌓여있지만, 뒤로 미뤄둔 채 이러기를 며칠 째.

몇 달 만에 누려보는 여유로운 일상, 한 해를 마무리하고 맞은 휴가는 벽장 속 곶감 빼먹는 기분이다. 작년 한 해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 둘째의 어린이집 입소, 그리고 마을 안팎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내느라 분단위로 시간을 쪼개며 살았다. 운전 경력 7년이 다되도록 차선 변경이 그렇게도 어렵더니 시간에 쫓기다보니 짧은 신호를 한 번에 넘기 위해 차선을 두세 번씩 옮겨 타는 건 일도 아니게 되었다.    

어릴 적 내가 걷던 풍경 속을 걷는 세 아이들
▲ 새해, 다시 시작하는 소소한 일상 어릴 적 내가 걷던 풍경 속을 걷는 세 아이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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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휴가, 다시 찾은 일상

밀린 설거지 해치우듯 살았던 해를 넘기고 지리산 속 친정에 폭 담겨 며칠 보내고 있자니 잊고 지내던 일상이 꺾어 신어도 부담 없는 낡은 운동화처럼 다시 다가왔다. 사나흘 산 속 집에서 빈둥거리다 포근한 겨울날씨를 핑계삼아 아이들과 함께 읍내 구경을 나섰다. 어릴 땐 걸어 한 시간 걸리던, 가다가 한눈이라도 팔면 두 시간도 걸리던 비포장 길이 신작로가 된 탓인지 이젠 그렇게 멀지 않은 읍내 가는 길. 아기띠도, 유모차도 필요 없는 아이들은 이젠 내 손도 잡지 않고 셋이서 나란히 걸어간다. 어린 날 이 길을 걷던 내가 겨울볕 속에 순간 나타나 함께 걷다 사라진다.

서울 동네 도서관에 예약 걸어둔 지 한 달이 지나도 아직 내 차례가 오지 않았는데 시골 도서관엔 보고 싶던 책 모두 대출 가능이다. 실로 오랜 만에 소설책 한 권과 두 달을 벼르던 그림책 두 권을 빌렸다. 우리 넷만 있는 한적한 유아자료실 온돌방에 비스듬히 누워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림책을 집어 들었다.

카르멘 치카 글, 마누엘 마르솔 그림, 조문영?정홍의 번역, 로그프레스 출판사
▲ <거인의 시간> 카르멘 치카 글, 마누엘 마르솔 그림, 조문영?정홍의 번역, 로그프레스 출판사
ⓒ 로그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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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난 시간, <시간의 거인>

일반 그림책보다 큰 판형으로 시원한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책이었다. 책 크기만큼이나 큰 제목 <시간의 거인(O tempo do Gigante)>. 카르멘 치카 글, 마누엘 마르솔 그림, 조문영‧정홍의 번역, 로그프레스 출판사, 그리고 포르투갈 NATIONAL COMIC AWARD 2015 어린이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 해외작가 부문 수상작이라는 별이 붙어 있다. 평소 그래픽 일러스트 그림책을 선호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고 산보다 더 큰 붉은 거인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책장을 넘겼다. 

글작가 카르멘 치카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활동 중인 작가로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다 <거인의 시간>으로 첫 그림책을 냈다. 강렬한 짧은 문장의 광고 카피를 써온 경력이 그림책을 만나 한 페이지에 길어야 두 문장(그것도 몇 페이지 뿐, 대부분이 아주 짧고 쉬운 한 몇 단어)의 글로 거대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그림작가 마누엘 마르솔 역시 스페인 마드리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광고계에서 일하다 <아합과 흰 고래>를 통해 일러스트레이터로 데뷔했다. 섬세하면서도 그래픽적 감성을 지닌 특유의 그림체로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촌스러운 성미 탓에 컴퓨터로 그려내는 그림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거인의 시간>으로 만난 마누엘 마르솔의 일러스트는 아주 큰 세밀화를 마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거인의 머리 위 나무는 날마다 자라고
▲ 아무 일도 일어나 지 않는 거인의 시간 그러나 거인의 머리 위 나무는 날마다 자라고
ⓒ 로그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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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무 일 없어"

큰 판형의 그림책을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넘기면 붉은 거인이 큰 손으로 자작나무를 긁으며 중얼거린다. "오늘도... 아무 일 없어" 붉은 거인의 머리 위로 작은 나무 한그루 솟아나고 그저 구름만 하릴없이 모습을 바꾸며 무심히 흘러가는 가운데 나무는 자라난다. 거인은 평온한 세상을 내려다보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라지만 그저 모기 한 마리 날아다닐 뿐. 족히 수십 년의 시간은 걸려야 하는 울창한 소나무 숲 산도 무료한 거인에겐 모기 한 마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산 속의 소나무 몇 그루 뽑아다 제 몸보다 작은 어느 집 마당에 심어놓고 밤하늘을 보며 한숨처럼 내뱉는 거인의 말. "앞으로도 매일... 이럴까?" 거인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날들이었지만 그 사이 거인의 머리 위 작은 묘목이었던 나무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되어있다. 거인이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둥근달이 거인과 같은 눈망울로 거인이 사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거인이 땅 위를 내려다보듯.

무심하게 마을을 보살피는 거인의 섬세하고도 거대한 몸짓
▲ 가장 가슴 뭉클했던 장면 무심하게 마을을 보살피는 거인의 섬세하고도 거대한 몸짓
ⓒ 로그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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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히 보살피는 마을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진다. 무심히 그 속에 앉아 비를 맞고, 자신이 나무를 심은 집 위로 드리우는 먹구름을 아무렇지 않게 걷어내고, 폭설이 내리는 날엔 허리를 숙여 집의 거대한 지붕이 되어 대신 눈을 맞아준다. 그러는 사이 거인의 머리 위 나무는 무성한 녹음을 드리우다 단풍이 물들고 낙엽을 떠나보내곤 앙상해지며 시간을 쌓아간다.

무심히 지켜낸 마을엔 다시 봄이 오고 초원엔 젖소들이 풀을 뜯고, 거인의 머리 위 나무는 새와 벌레들의 낙원이 된다. 거인은 태풍에 날아가는 젖소를 구해 보살펴주면서도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며 무료해 한다. 그러나 젖소를 배 위에 뉘인 거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평온한 일상에 화산이라도 폭발한 건지 땅이 끓어오르고 거인의 머리 위 나무도 불에 타는 소동이 벌어지지만, 다음 장을 넘기면 속눈썹까지 하얗게 세어버린 더 이상 붉지 않은 하얀 거인은 이렇게 말한다.

"... 꿈이었구나."

정말 꿈이었을까? 무엇이 꿈이었을까? 흰 수염이 길게 자란 거인의 머리 위엔 이젠 고목이 된 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고 그래도 새 한 마리 친구 되어 앉아있다. 젊은 날 거인이 심은 나무는 집보다 훨씬 더 키가 커졌고, 낡은 집 지붕을 뚫고 거인의 머리 위 나무와 닮은 나무가 가지를 뻗어 있다.

늙은 거인은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마을 풍경을 내려다보며 "오늘 하루도 이렇게 지나가겠지? 아무 일 없이..."라고 말하지만 붉은 젊은 날과 달리 따뜻하고 평온해 보인다. 소소한 일상 속에 거인은 자작나무에 손가락을 대고 나무를 오르내리는 개미들과 장난을 치며 "그래도 괜찮아"라고 모두에게 위로를 건넨다.

붉은 거인 하얗게 세고, 함께 늙어가는 마을 풍경
▲ 억겁의 시간이 흘러 붉은 거인 하얗게 세고, 함께 늙어가는 마을 풍경
ⓒ 로그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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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그림 찾기의 즐거움

간결한 문장 몇 줄만으로 거인의 길고도 큰 시간을 지어낸 카르멘 치카의 이야기는 마누엘 마르솔의 대담하면서도 섬세한 그림을 만나 '재미'있는 그림책이 되었다. 처음엔 이야기와 거인의 큰 몸짓을 따라 읽고, 두 번 세 번 다시 읽으면 구름의 모양, 나무의 변화, 거인의 거대한 몸짓과 대비되는 아주 작은 모기, 벌레, 새들, 심지어 거인의 발에 짓눌린 풀들의 움직임까지 '깨알 같은' 재미 속에 시간의 변화를 찾을 수 있다.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 '칼치기'를 하며 운전할 땐 미처 보지 못했던 소소한 일상을 아이들 손잡고 시장가는 길에야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산보다 더 큰 거인이 들어 있는 그림 속엔 바람에 날리는 거인의 털 한 올 한 올, 개미 다리 하나하나까지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어쩔 땐 거인마저 작아 보이는 먼 그림으로, 어쩔 땐 거인의 얼굴을 화지에 가득 담아 속눈썹까지 보이는 코 앞 그림으로 다양한 구성의 재미를 선사한다. 큰 것과 작은 것의 극명한 대비는 거인과 개미가 친구가 되는 기발함으로 그림과 글 모두에 담겨 그림책 곳곳에 보물처럼 숨어있다.

거인의 시간, 개미의 시간

책 속 거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책 속의 시간은 거인의 온 몸이 하얗게 셀 정도로 억겁의 세월로 쌓였다. 같은 곳에서 함께 겪은 시간이지만 거인과 개미의 시간은 다르고 그 시간 속에 겪었던 일도 저마다 다르게 남았을 것이다. 거인의 시간과 개미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지난 내 시간을 돌아보았다.

2009년부터 시작된 세 번의 출산과 육아의 시간은 2016년까지 이어졌다. 젖먹이 어미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닌 듯 했던 지난 육아의 시절이 '개미의 시간'이었다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거인의 시간'이지 않았나 싶다. 내 시간을 갉아먹으며 아이를 돌보는 것 외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그 시간 동안 나도 아이들도 많은 것이 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것이 되어가겠지.    

엄마 아빠는 이제 마흔살!
▲ 우리는 이제 아홉, 일곱, 다섯 살! 엄마 아빠는 이제 마흔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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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향해 앞 뒤 없이 달렸던 20대, 뭐가 뭔지 모른 채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고 기른 30대, 그리고 맞은 40대. 이제야 비로소 일상의 묵묵함이 얼마나 힘이 센지 알 것 같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런 일상을 제대로 살지 못한 건 아닐까? 늘 무엇이 되고 싶었고, 무엇이 되기 위해 쫓기듯 살았다. 마흔이 되면 복귀해야한다는 조바심에 더욱 바삐 지낸 작년이었다. 그러나 마흔 첫머리에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친정집 오래된 풍경 속에 담겨 '거인의 시간'을 들여 보니 개미의 시간과 거인의 시간은 결코 같지 않으나, 또 결코 다르지도 않다.

올해 3월이면 다섯 살 막내도 드디어 어린이집에 간다. 화려한 복귀까진 아니어도 내가 하던 일, 하고 싶던 일에 조금 더 가까이 가보려 한다. 마흔,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나 미래의 꿈이 아닌 개미의 시간 같은 일상의 힘으로 묵묵하게 거인의 시간을 써 내려 가고 싶다. 쓰고 보니 참 큰 소망이다. 새해니까, 새해 소망은 좀 커도 되니까!


거인의 시간

카르멘 치카.마누엘 마르솔 글.그림, 조문영.정홍 옮김, 로그프레스(2016)


태그:#거인의 시간, #육아일기, #카르멘치카, #마누엘마르솔, #스페인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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