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대처의 장례식도 민영화하자. 그래서 최저가로 입찰한 업체에 맡기자. 대처는 그걸 원했을 것이다."

지난 2103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이 사망했을 당시, 70대의 노장 켄 로치 감독은 이렇게 비꼬았다. 영원한 청년이자 '전세계 1등 좌파' 감독 켄 로치가 그간 보여준 신자유주의와 민영화, 영국 보수당과 후기 노동당에 보여 온 분노와 비판을 떠올려보면, 일견 수긍을 하게 되는 '고별사'라 할 만하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여든줄에 들어선 이 켄 로치는 조금도 변치 않았다. 아니, 절대 양보가 없다. 그에게 올해 10년 만에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후 두 번째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긴 <나, 다니엘 블레이크>(8일 개봉)가 이를 입증한다.

칸영화제 역사상 두 번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7명의 감독 중 한 명인 켄 로치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긴 이 작품을 마주한다면, 왜 전 세계 영화계가 켄 로치에게 존경과 찬사를 바치는지 기꺼이 수긍하게 될 것이다. 과장이라고? 마지막 장면의 묵직한 울림을 목도한 관객이라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가난이 너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포스터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포스터 ⓒ 영화사진진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우리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야만 한다."

얼핏,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 속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와 엇비슷한 것 같은 이 전언은 올해 칸영화제 당시 켄 로치 감독의 수상 소감이다. 60여 년간 영화를 찍어 온 이 노장 감독이 여전히 '희망'과 '연대', '함께 사는 미래'를 꿈꾸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소감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러한 비전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의 작품세계와 사회적 활동이 철저하게 '계급'과 '연대'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관해서 켄 로치는 또 이렇게 언급했다.  

"사람들에게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다."

그래서 다시 계급이고, 빈곤이요, 복지다. 가난이란 이름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켄 로치는 세상의, 우리의 '잔인함'과 결부시킨다. 이를 위해 켄 로치가 외견 상 주목한 문제는 사회보장제도의 이면과 관료주의, 디지털 사회로부터의 소외 등이다. 

다니엘(데이브 존스 분)은 일평생 목공이자 공예가로서 성실히 살아온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실직하게 되고, 의사는 당분간 일을 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실직 급여를 상의하기 위해 찾아간 기관의 직원들은 지속적으로 구직 활동을 해야만 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누차 강조한다.

사별한 부인을 그리워하고 딱히 친구도 없던 다니엘은 관공서에서 문제를 일으킨 '싱글맘' 케이티와 그가 키우는 어린 남매를 만나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건강을 돌보면서 이력서도 내보고, 평생 다룰 줄 몰랐던 인터넷도 드문드문 배우지만, 생활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다니엘이 친구로서 염려하는 존재는 오로지 케이티와 남매가 남았을 뿐이다.  

막다른 벼랑에 몰린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야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사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만큼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도 또 없다. 실직자든, 혁명가든, 아이든, 아빠든, 엄마든, '싱글맘'이든, 켄 로치의 주인공들은 우리네 이웃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 가족을 위하고, 친구가 필요하며, 최소한이든, 더 나은 여유든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장삼이사 들이다. 다만, 배경이 유럽이나 영국의 어느 도시들일 뿐이다. 대한민국, 지금, 여기에서 그의 영화를 본다 해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공통점은 또 있다. 신자유주의 하의 관료제나 경쟁체제, 빈곤 등에 의해 고통 받고 내몰린 인간들이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조금 다른 점은 멀쩡했던 사람들이 점차 빈곤의 극단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담담하게 그린다는 것뿐이다.

영화는 암흑의 화면에서 관공서의 상담사와 상담을 하는 데이브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끊임없이 구직과 전화‧인터넷 상담을 요구하는 이 직원에게 데이브는 그저 한 명의 국민일 뿐이다. 그렇다고 딱히 매몰찬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병들고 혼자인 데이브에게 지금의 상황은 깜깜한 암흑과도 같을지 모른다.

마치 "당신이 일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직업을 찾지 않으면 당신은 고통 받을 겁니다"라는 관료제의 의도적 잔인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은가. 국민의 세금으로 돌아가는 정부는 흡혈귀처럼 끊임없이 국민들의 세금을 필요로 하고, 국민들은 공장의 부품이나 톱니바퀴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야만 하는 존재들이지 않나. 평생 한 눈 팔지 않고 일하며 세금을 내왔던 다니엘 블레이크 역시 이 관료제와 복지 제도의 허점에 걸려든 난처한 상황인 셈이다. 

그렇게 구직과 가료에 힘쓰는 다니엘의 일상에 케이티와 그의 어린 남매들이 찾아 든다. 다니엘은 소소하게 도움을 주고 케이티 가족에게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된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고 싶은 싱글맘 케이티도 역시 지금 막다른 벼랑에 몰려 있다. 부모나 각자 다른 아이들의 아빠들에게 도움을 처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급기야 여성용품을 도둑질까지 하게 된 케이티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던 상황에 매춘을 제안 받고, 몇 백 파운드가 아쉬워 결국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 상황을 알아챈 다니엘은 매춘 현장을 찾아 눈물로 그만둘 것을 호소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빈곤에 내몰린 케이티의 냉대와 거절뿐이다.

결국 병이 난 다니엘에게 찾아 온 케이티의 어린 딸은 문전박대를 받으면서도 "아저씨, 우리 친구 아니었어요?"라며 간절하게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어떤 거창한 연대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가 결국 다니엘의 마음을 여는 이 장면은 꽤나 찡한 울림을 준다.

그러니까, 빈곤에 내몰린 아이는 그저 엄마에게 "구멍 난 신발 때문에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다"고 담담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원래 가난은 아이들이 먼저 눈치 채는 법이지 않나. 아이들의 눈치는 더 커질 수밖에 없고. 그런 아이를 위해 또 엄마는 매춘에 나선다. 그걸 말리는 다니엘을 케이티는 외면할 수밖에 없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빵과 우유를 사기 위해서.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좌로 부터) 각본을 쓴 폴 래버티 작가, 켄 로치 감독, 레베카 오브라이언 프로듀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좌로 부터) 각본을 쓴 폴 래버티 작가, 켄 로치 감독, 레베카 오브라이언 프로듀서. ⓒ 영화사진진


그러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어느 순간 복지의 사각지대에 몰려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의 인물들을 신파의 감정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켄 로치 감독 특유의 온기만을 유지할 뿐이다. 다만, 위트나 드라마틱한 서사는 최대한 줄였다. 대신 일상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켄 로치 감독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꼭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시장경제는 냉혹하게 우리를 이런 재앙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어요. 노동계급을 자꾸 취약하게 만들고 착취하기 쉽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을 마주하게 되는 거죠. 이건 시스템의 결함이거나, 사람들의 잘못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스템을 바꾸길 원치 않잖아요. 그래서 사람의 문제, 즉 개인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놀라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거죠. 우리는 그래서 뭘 했는가?" (켄 로치 감독 인터뷰 중)

그래서 우리는 뭘 했는가. 이 질문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바로 이 질문. '헬조선'을 만든 이들이 과연 희대의 국정농단 사태를 불러온 주범들뿐인가. 대통령과 공범들이 수천억, 수백억의 세금을 펑펑 낭비할 때, 송파 세 모녀는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건가. 성수역에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젊은이가 꼭 목숨을 희생당해야 했을까.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보며 부지불식 간에 제기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라는 다니엘의 대사야말로 켄 로치 감독이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존엄'의 다른 말일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다니엘이 '시민 선언'을 할 때, "내가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시민들에게 외칠 때, 그의 갑작스런 인정투쟁에 길거리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 줄 때, 그래서 더욱 뜨거운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확인하게 될지 모른다. 

가난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저항이자 어떤 숭고한 행위. 이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과 연민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연대라고 켄 로치 감독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켄 로치 최고의 걸작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올해가 가기 전에 놓치지 말아야 할 필견의 작품임엔 틀림없다.

대통령 탄핵과 함께 '변혁'을 꿈꾸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면 빈곤층이, 노동계층이, 시민들이, 국민들이 어떤 벼랑으로 몰릴지에 대한 비전과 시뮬레이션을 충실히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여든 살의 거장은 그렇게 우리보다 훨씬 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과거 비슷한 처지의 주인공이나 소재를 다룬 작품들보다 먹먹하고 갑갑한 결말을 준비해 놓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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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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