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온더비치> 영화 포스터

▲ <비치온더비치> 영화 포스터 ⓒ 비치사


한국에서 단편 영화를 보는 방법은 네이버 영화 등에서 다운로드를 받거나 유튜브, 비메오 등 동영상 감상 사이트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등 학교에서 제작한 단편 영화는 영상자료원에 가면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단편 영화는 여러 이유로 만날 기회가 희귀하다. 그런 면에서 <비치온더비치>를 연출한 정가영 감독은 적극적으로 자기 작품을 알리는 사례에 속한다.

유튜브의 채널 '가영정'에선 <혀의 미래><내가 어때섷ㅎㅎ><처음><술 마시기 좋은 날><피크닉><캐스팅>까지 정가영 감독의 손길이 닿았던 단편 영화를 모두 만날 수 있다. 그 외에 트위터에 올리려고 만든 듯한 <30초 트위터 무비>와 <8월의 크리마스>의 일부 영상을 '재구성'이란 명목 아래 장난을 친 <8월의 그리숨었수>도 감상이 가능하다.

<비치온더비치>는 정가영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가영(정가영 분)이 전 남자친구 정훈(김최용준 분)의 집에 느닷없이 찾아가면서 시작하는 한낮의 해프닝을 담았다. 헤어진 연인이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닌, 전 여자친구가 집에 쳐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어떤 하루'를 <비치온더비치>는 조명한다.

<비치온더비치> 영화의 한 장면

▲ <비치온더비치> 영화의 한 장면 ⓒ 비치사


과거를 추억하고 현주소를 이야기하며 미래를 상상하는 그들의 시간엔 정가영 감독의 단편 영화의 색채가 묻어 있다. 헤어진 연인의 재회엔 <술 마시기 좋은 날>이 겹쳐지고, "우리 자면 안 돼?"라고 말하는 가영의 모습은 친구의 애인을 유혹하는 <내가 어때섷ㅎㅎ>의 여성이 연상된다. 첫 관계를 이야기할 때엔 <혀의 미래>의 첫 키스의 설렘도 떠오른다.

이전 정가영의 영화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비치온더비치>는 동시에 홍상수를 연상시킨다. <비치온더비치>엔 가영과 정훈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극 중에서 가영이처럼 <비치온더비치>는 많은 부분을 통해 홍상수 감독에게 존경을 바친다.

<비치온더비치>는 <해변의 여인>의 영어 제목인 <우먼 인 더 비치>에서 가져왔다. 제목에서 맞춤법을 무시하는 것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빌려왔다. 흑백을 사용한 부분은 <오! 수정>과 <북촌방향>의 영향을 받았다. 음악이 갑자기 나오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내용에서도 유사성은 깊다. 일상을 무심하게 지켜보는 태도, 술과 섹스, 엉뚱한 대사와 어색한 몸짓까지 판박이다.

결정적인 차이점도 존재한다. 하나는 홍상수 감독은 꿈과 현실, 반복과 차이 등 영화의 형식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정가영 감독의 <비치온더비치>는 흘러가는 시간을 평범하게 보낼 뿐이다. 또 다른 차이는 역전된 인물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남성들은 욕망을 위해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기만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남성의 가면은 벗겨지고 말의 위선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와 반대로 정가영 감독은 <비치온더비치>에서 욕망의 발화점을 여성에게 놓는다. 가영은 같이 자자고 계속 조르고, 정훈은 불순한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역전된 관계에서 중심추는 자연스레 여성의 몫으로 옮겨진다.

<비치온더비치> 영화의 한 장면

▲ <비치온더비치> 영화의 한 장면 ⓒ 비치사


가영은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남자친구가 많다는 사실을 정훈이 문제삼자 "이상한 한 놈이랑 자는 것보다 좋은 열 놈이랑 자는 게 훨씬 낫다"고 응수할 정도다. 그렇다면 그녀를 저속하거나 지질한 '비치(사전적 의미는 개 같은*)'로 봐야 할까? <비치온더비치>의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 있다.

<해변의 여인>의 '해변의 여인'은 남성이 만든 여성의 고정 관념과 판타지를 의미한다. 남성의 시선 아래 줄곧 놓였던 김문숙(고현정 분)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길로 나아간다. <비치온더비치>에서 가영은 정훈에게 한순간도 끌려가지 않는다. 남성에 의해 밀려나는 듯했으나 다시 자신의 의지로 들어와 자기가 원하는 때에 나간다. <해변의 여인>에서 김중래(김승우 분)가 김문숙과 최선희(송선미 분)란 두 여성을 합쳐 하나의 환상에 가까운 여성 이미지를 조각하려 했다면, 가영은 자기 뜻대로 정훈에게 '여인'와 '비치'란 두 개의 얼굴을 남겨준다.

<비치온더비치>에 깊숙이 배어있는 홍상수의 색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홍상수 영화의 여성 버전 또는 20대 청춘 판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관찰하면 형식이 빠지면서 생긴 공백이 들어온다.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홍상수 영화의 비밀은 영화적 관습을 비튼 형식이라고 적은 바 있다. 홍상수 영화의 마법인 형식이 사라진 자리에 덩그러니 20대의 언어가 놓인 <비치온더비치>을 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웃기기는 해도 신비롭진 않다."

비치온더비치 비치사 정가영 김최용준 이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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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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