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드와 오언은 2000-2001 시즌 리버풀의 UEFA컵, 리그컵,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2000-2001 시즌 리버풀의 UEFA컵, 리그컵, FA컵 우승을 이끌었던 제라드.(오른쪽) ⓒ 리버풀FC


리버풀과 잉글랜드의 '영원한 캡틴' 스티븐 제라드가 정든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제라드는 25일(한국시간) 은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선수로 뛰는 동안 믿기지 않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리버풀과 잉글랜드 대표팀과, LA 갤럭시에서 보낸 모든 순간에 감사한다"는 소감을 남겼다.

제라드는 '리버풀의 심장'으로 통했다. 7살인 1987년 리버풀 유스팀에 입단한 제라드는 1998년 11월 29일 블랙번과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통해 프로에 데뷔했고, 2015년 1월 LA 갤럭시로 이적하기 전까지 리버풀에서만 17년간 총 710경기(정규리그 504경기.각종 컵대회 206경기)를 뛰며 186골을 넣었다.

제라드는 리버풀에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2005), UEFA컵(2001), 리그컵(2001ㆍ2003ㆍ2012), FA컵(2001ㆍ2006년) 등 총 9차례의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특히 만 23세에 불과하던 2003년부터 무려 12년간 리버풀의 주장을 역임하면서 소화한 경기수만 473경기로 자타공인 팀의 리더이자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제라드는 다재다능한 선수의 표본이기도 했다.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지만 수비형 미드필더와 공격형 미드필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역할까지 두루 수행할 수 있었고 간간이 윙어나 라이트백까지 소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상의 포지션은 역시 공격형 미드필더로 최전성기에는 한 시즌 20골 이상을 기록하는 공격수 못지않은 득점력으로 미들라이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제라드의 축구인생에 최고의 순간은 역시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요약되는 2005년 5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다. 아직도 전세계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챔피언스리그 역대 최고의 결승전으로 평가받는 이 경기에서 리버풀은 전반 AC밀란에게 0-3까지 끌려가던 경기를 후반에만 3골을 만회하며 원점으로 되돌렸고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우승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제라드는 후반 9분 추격의 포문을 여는 첫 번째 헤딩골을 터뜨리며 승리에 기여했다.

화려한 축구 인생, 하지만 리그 우승컵은 들어올리지 못한 제라드

물론 제라드의 화려한 축구인생에도 그늘은 있었다. 제라드는 단 한 번도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이는 리버풀의 숙원이기도 하다. 리버풀은 80년대까지 잉글랜드 최다우승팀이었지만 1992년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로는 단 한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라이벌 맨유에게 최다 우승팀 타이틀도 빼앗겼다.

특히 2013-2014시즌은 제라드와 리버풀에게 모두 큰 회한으로 남아있다. 당시 리버풀은 정규리그 종반까지 선두를 달리며 대망의 우승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제라드의 뼈아픈 실수가 첼시의 결승골로 이어지며 리버풀의 우승꿈이 날아가는 결정적인 빌미가 됐다. 이후 제라드는 자서전에서 당시 첼시의 후유증으로 한때 자살까지 생각했을만큼 심적인 충격이 컸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후 리버풀은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37라운드 경기에서도 3골차  리드를 지키지못하고 3-3 무승부를 기록하며 '이스탄불의 기적'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겪는 아이러니와 함께 우승의 마지막 희망이 좌절됐다.

국가대표 경력도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2000년 우크라이나전에서 처음 '삼사자군단' 유니폼을 입고 A매치 데뷔한 제라드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114경기를 뛰며 센츄리클럽에 가입했고 총 21골을 넣었다. 총 3회의 월드컵과 2회의 유로 본선에 출전했고, 2010년부터 2014 브라질월드컵까지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주장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제라드가 활약하던 시절 잉글랜드는 단 한 번도 메이저대회 8강 이상의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포지션이 겹치던 프랭크 램파드(전 첼시)와의 공존 문제는 역대 잉글랜드 감독들의 골머리를 앓게하는 오랜 전술적 난제이기도 했다.

특히 제라드의 마지막 국가대항전이었던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우루과이-코스타리카 등과 죽음의 조에 속하여 예선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제라드는 우루과이전에서 실점의 빌미가 되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공교롭게도 직전 시즌 프리미어리그 첼시전 실수와도 오버랩되며 3개월 사이에 제라드의 축구인생에 두 번이나 최악의 순간으로 기억되는 오점으로 남았다. 이는 제라드의 축구 커리어 전반에 걸쳐 반복되었던 징크스이기도 한데, 중요한 경기마다 잦은 기복과 치명적 실수를 종종 저지르며 지금보다 한 단계 높아질수 있었던 제라드의 커리어가 정체된 원인으로도 꼽힌다.

하지만 제라드가 결국 리버풀과 잉글랜드 축구의 레전드로 남을 수 있었던 진정한 가치는 우승트로피의 개수나 개인기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특히 고향팀인 리버풀에 대한 남다른 충성심은 제라드의 축구인생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제라드는 프란체스코 토티(AS 로마)와 함께 유럽축구를 대표하는 원클럽맨이자 축구 로맨티스트로 유명하다. 제라드는 기량이 정점에 달했던 2000년대 중반 막대한 연봉을 제시한 유럽 명문과 부자 구단들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끝내 리버풀에 남았다.

리버풀의 붉은 심장으로 불린 제라드

리버풀은 잉글랜드 축구를 대표하는 전통의 명문클럽이지만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하향세에 접어들었다. 공교롭게 제라드의 최전성기는 리버풀의 암흑기와도 일치했다. 많은 이들은 제라드가 2005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주가가 최고에 올랐던 시기에 이적했으면 아마 최소한 우승컵 4~5개는 더 거머쥐었을 것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제라드는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끝내 리버풀에 남았다. 기량이 쇠퇴한 선수생활 후반기 리버풀과의 재계약이 어려워지면서 몇몇 팀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LA 갤럭시행을 선택한 것도, 차마 유럽무대에서 리버풀을 적으로 만나는 상황을 겪고싶지 않았던 제라드의 의지였다. 제라드에게 있어서 고향팀 리버풀은 하나의 직업을 넘어선 축구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팬들도 제라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라드는 개성강한 스타 선수들이 넘쳐나던 프리미어리그에서 슈퍼스타임에도 겸손하고 이타적인 유형의 리더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명수비수 출신으로 제라드와 함께 오랜 세월 리버풀에서 동고동락한 제이미 캐러거는 제라드 "경기장과 훈련장에서 항상 동기부여를 주는 타고난 리더"라고 평가했다. 제라드와 리버풀과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마이클 오언 역시 "그는 축구선수로서는 물론이고 한 인간이자 남자로서도 완성된 사람이다. 리버풀의 선수들은 누구나 그라운드 안팎에서 제라드에게 의지했다"며 그의 영향력을 극찬했다.

리버풀에서도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제라드와 갈등을 겪거나 불화를 일으킨 선수와 감독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만 해도 그의 리더십과 인화력을 증명한다. 제라드는 선수생활을 마무리하지만, 단순히 기록과 숫자 이상으로 제라드가 소속팀과 팀동료, 팬들, 그리고 축구에 바친 헌신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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