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포스터. 이 영화는 죽음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포스터. 이 영화는 죽음에 관한 영화이다. ⓒ CGV아트하우스


"박카스 하나 드릴까요? 잘해드릴게."

일명 박카스 할머니로 통하는 소영의 고객은 노인 남성들이다. 다 시들어버린 듯 힘없어 보이는 눈빛과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고객들에게 그녀는 박카스를 내밀며 성심성의를 다하는 직업 정신을 발휘한다. 알만한 노인들 사이에서 '그 죽여준다는' 여자로 불리는 소영.

노인들을 상대하며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그녀는 임질 때문에 치료차 찾은 산부인과에서 우연히 충격적인 사건과 만나게 된다.

소영을 진료한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온 필리핀 여성. 센 척하는 흰 가운의 의사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여성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대립하는 잠깐의 모습은 시각적인 대비까지 완벽했다. 곧 둘 사이의 완벽하고 격한 대립은 대화에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감정이 격앙된 여성에게서 터져 나온 '애 아빠'라는 단어가 갈 곳 없이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 흩어지고 마는 듯했다. 그러나 흩어 사라진 줄 알았던 아픈 단어가 날 선 가위의 곤두선 머리가 되어 의사의 가운 앞섶을 벌건 피로 적셨다.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여자와 아이가 찾아와 '우리 여기 살아있었다'며 흘릴 법한 눈물처럼 말이다.

아이 아빠임이 분명하면서도 온몸으로 아이를 거부하는 남자의 가슴에 꽂힌 가위의 생채기는, 홀로 아이를 키워내야만 하는 여성과 그 아이가 감당해야 할 상처에 비하면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양공주와 코피노(kopino)

 극 중 혼혈아 민호와 박카스 할머니 소영.

극 중 혼혈아 민호와 박카스 할머니 소영. ⓒ CGV아트하우스


병원으로 올라가는 몇 계단 위에서 끌려가는 엄마를 울면서 보다가 이내 도망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친 어린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소영. 갈 곳 없는 아이를 데려와 일단 밥부터 차려 먹여 놓고 보는 소영에게는 길 위를 헤매는 고양이도 단골손님이다. 배고픈 때가 되면 집 앞에서 곡의 절정을 부르듯 냐아옹 울부짖는 길고양이의 밥그릇을 채워주는 이도 소영이기 때문이다.

엄마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소영이 돌보고자 한 민호라는 이름의 코피노(Kopino)와 소영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돌봄 받는 길고양이. 그리고 거리를 배회하는 쓸쓸한 노년의 남성은 소영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함께 나눠 가지고 있었다. 주목받지 못하는, 구석 자리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듯 드러나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들을 보듬어 주는 소영 역시 살아온 인생의 과정이 꽃길만은 아니었다.

'소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한 때 그녀가 '양미숙'이라는 이름이었고, 양공주로 살기도 했다던 시절의 역사가 드러나는 것은 그리 극적이진 않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 작업을 한다며 소영에게 인터뷰해주길 애걸복걸하던 감독이 겨우 들을 수 있던 소영의 이야기는 평범하지도 않다.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 없어. 다 지 듣고 싶은 얘기만 들어."

박카스 할머니 소영이 과거 양공주로 살았었다는 진실이 열의 있는 감독의 인터뷰 덕분에 완성도 높은 다큐멘터리에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픽션의 반대편에 위치한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특성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은 묻히기 마련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과거 미군을 상대했던 미군위안부 '양공주'와 노년남성을 상대해 먹고 사는 '박카스 할머니'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에만 열정적으로 귀가 열릴 것이다.

영화는 '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마는' 사람들의 귀를 막는다. 과거 소영이 양공주로 살면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은 어땠을 것이며, 그녀가 힘겹게 살았을 그 때 삶의 사회적 배경은 과연 어땠을 것인가에 대해 묻는다.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주둔을 독려하며 자국민 여성에게 그들을 상대로 성접대를 알선했던 시대적 사실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현 시점으로 돌아와 그녀가 집으로 데려온 필리핀여성과 한국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민호, 코피노(kopino)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개인과 사회의 문제에 눈과 귀를 열어보이라 권한다.

그들의 성욕

 "나랑 연애하고 갈래요?"

"나랑 연애하고 갈래요?" ⓒ CGV아트하우스


영화에서 다루는 남성의 '성욕'은 다양한 현실로 구조화된다.

소영이 양공주였던 시절에 잠깐 같이 살았던 흑인 병사. 이국땅 필리핀에 공부하러 잠깐 들렀던 한국 남성. 이 둘의 공통된 사실은 사랑은 있었을지언정 책임 없는 성욕으로 여성을 상대했다는 것이다.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돌도 안 된 아기를 입양 보냈다고 자책하는 소영. 어떻게든 아이와 살아보려고 애를 쓰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남자에게 비수 같은 가위를 꽂아버린 필리핀 여성. 그 둘은 당연하게도 남성이 남용한 성욕에 희생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름 모를 소영의 아들과, 아빠 엄마와 함께 찍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일기장에 끼워 간직하면서도 다함께 살지 못하는 어린 민호의 애달픔이 그것을 증명한다.

한편 미숙이라는 이름에서 소영으로 개명하여 사는 박카스 할머니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남성들의 성욕은 비교적 구차해진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소영과 같은 처지의 박카스 할머니들이 상대하는 노년 남성의 눈빛과 몸은 낙엽과도 같다. 조금만 힘을 주어 움켜쥐면 곧 바스러질 것 같은 모양새를 한 그들에게 남은 성욕은, 값싼 돈을 쥐여주고서라도 풀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다행으로까지 여겨진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때에 오는 절망

풍 맞아 쓰러져 죽어간다는 예전 고객의 소식을 듣고 만나러 간 소영은, 죽음을 앞두고 있으나 혼자서 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송노인의 처절함을 목격한다.

"나 혼자 먹지도 못해. 죽으려고 해도 혼자 못 죽어."

더는 선택할 수 없는 삶에 이르렀다는 절망은 이미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넘어섰다. 다 죽어가는 시아버지에게 내년에 또 찾아오겠다는 며느리의 인사, 멀찍이 서 있다가 부모의 채근에 못 이겨 하는 손자의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미 선택할 수 없는 삶의 문턱을 밟았는데 '내년'이라는 미래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라는 '안녕히'라는 말은 상대를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사회의 노인을 향한 작금의 시선을 다음 세대를 이용하여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늙어버렸다니."

한탄하며 바로 전에 약 먹은 것도 기억 못 하고 약봉지를 또 집어 드는 종수 할아버지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당장 죽을 수 없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미련으로 여태 살아있는가."

가족이 오래전에 하나씩 다 죽고 혼자 남아 겨우 살아내고 있던 재우 할아버지에게도 살아있다는 것의 가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육체적 죽음은 가깝게 도래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정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죽고 싶어도 혼자 죽을 수 있는 힘도 없는 노인들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삶에 이르렀을 때 죽음을 택하게 된다. 길고양이의 말 없는 울음소리 부탁도 들어주는 여자인데, 죽지 못해 사는 게 창피해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노인의 부탁을 어찌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잠자리에서 죽여주던 그녀, 소영이 진짜로 죽여주는 여자가 되어 그들 삶의 고통을 끊어준다. 낙엽만큼이나 바스락거리는 몸을 하고는 죽음을 향해 가는 이들에게 박카스 뚜껑을 따 줄 때보다 더 양껏 힘을 실어준다. 잘 가라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죽여주는 여자 윤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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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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