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플로렌스>는 실존 인물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Florence Foster Jenkins)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녀는 막대한 재산을 가진 중년 여인으로서, 유명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를 비롯한 여러 음악인들을 후원하였고, 뉴욕의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클럽을 창설했으며, 아마추어 소프라노로서 정기적으로 독창회도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엄청난 음치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죠.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딱히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를 모델로 삼아 만든 프랑스 영화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이하 <마가렛트>)를 재미있게 본 게 불과 몇 달 전이었기 때문에, 인물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메릴 스트립이 플로렌스를 연기하지 않았다면 그냥 안 보고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플로렌스>의 포스터.

영화 <플로렌스>의 포스터. ⓒ (주)이수C&E


그런데, 두 작품은 완전히 방향이 다른 별개의 작품이었습니다. <마가렛트>가 플로렌스의 실제 삶을 꼼꼼하게 리서치한 다음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 작품이라면, 이 영화는 플로렌스의 실제 삶을 가감없이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더군요. 또한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하는 <마가렛트>와는 다르게, 플로렌스와 그의 남편 베이필드(휴 그랜트), 그리고 피아노 반주자 맥문(사이먼 헬버그) 이렇게 딱 세 사람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다루는 데 집중합니다.

닐 조던과 더불어 90년대 초중반까지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영국 출신 감독이었던 스티븐 프리어즈는, 헬렌 미렌에게 200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더 퀸> 이후로 실화 소재의 영화를 여러 편 찍었습니다. 그 중에는 재작년에 개봉했던 <필로미나의 기적> 같은 걸작도 있었지요.

이 영화는 인물 간의 감정 교류를 섬세하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필로미나의 기적>과 비슷한 접근 방식을 취합니다.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배우들이 깊이 있는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적당히 느린 템포를 유지하죠.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 역시 정서적인 감흥을 자아내는 쪽입니다.

타이틀 롤을 맡은 메릴 스트립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줍니다. 메소드 연기의 대가답게,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만 기억 되던 플로렌스의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 넣어 생생하게 재현합니다. 플로렌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지친 모습, 초조함과 평온함 그리고 환희를 오가면서 말이죠.

어떤 캐릭터가 잘 개발돼 있지 않거나, 그 배역을 맡은 배우의 역량이 부족하면 메소드 연기는 그저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을 표현하는 것 같이 보이기 일쑤입니다. 중간 과정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면 평소의 톤과 격한 감정을 폭발시킬 때의 톤, 이렇게 딱 두 가지 밖에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가 쉽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는 캐릭터를 이렇게나 섬세하게 재현하여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영화 <플로렌스>의 한 장면. 음치 소프라노 역할을 맡은 메릴 스트립은 특유의 메소드 연기를 통해 인물의 감정을 폭 넗게 보여준다.

영화 <플로렌스>의 한 장면. 음치 소프라노 역할을 맡은 메릴 스트립은 특유의 메소드 연기를 통해 인물의 감정을 폭 넗게 보여준다. ⓒ (주)이수C&E


휴 그랜트는 오랜만에 연륜에 걸맞는 캐릭터를 만난 것 같습니다. 플로렌스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지만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에도 충실한 베이필드라는 캐릭터는 그의 원래 이미지와 잘 어울리거든요. 미국 드라마 <빅뱅 이론>의 하워드 역으로 이름을 알린 사이먼 헬버그도, 출발은 가벼웠지만 점점 속 깊은 모습을 드러내는 반주자 코스메 맥문의 모습을 피아노 연주까지 직접 해 내면서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육체적으로 약하다는 한계 때문에 함께 모여 살아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갖게 된 사고 능력과 감정 능력은 오늘날에 와서는 매우 정교한 수준에 이르렀지요. 하지만, 그 반대 급부로 인간은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자아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육체적, 정신적 위기가 닥칠 때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도와주는 것은 결국 우리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입니다. 그들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그물망이 우리를 어떻게든 버티게 만들어 주지요. 이런 관계는 언제나 상호적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받는 동시에 상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사상 최악의 소프라노였던 플로렌스의 삶을 그린 이 영화가 주목한 것도 바로 그런 상호적인 연대의 중요성입니다. 형편없는 공연을 치르기 위해 성심 성의껏 플로렌스를 돕는 베이필드와 맥문은 그 관계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위로와 격려를 발견해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이필드가 휴가를 떠난 동안 전전긍긍하던 플로렌스가 맥문의 집으로 찾아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고 그와 함께 쇼팽의 서곡 E단조를 함께 연주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플로렌스>의 한 장면. 베이필드의 부재로 마음의 갈피를 못 잡던 플로렌스가 반주자 코스메 맥문의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나눈 끝에 서로를 좀 더 잘 알게 되고, 쇼팽의 서곡 E단조를 같이 치면서 교감을 나눈다.

영화 <플로렌스>의 한 장면. 베이필드의 부재로 마음의 갈피를 못 잡던 플로렌스가 반주자 코스메 맥문의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나눈 끝에 서로를 좀 더 잘 알게 되고, 쇼팽의 서곡 E단조를 같이 치면서 교감을 나눈다. ⓒ (주)이수C&E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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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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