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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사내 모한의 고향 마을 구멍가게 누이. 모한의 고향 사람들은 어렸을 때 내 고향 동네처럼 서로가 '씨스터', '브라더', '엉클'로 부른다. ⓒ 송성영
네팔 사내 모한의 농막에서 이틀째. 모한의 농막에서 언덕길을 내려서면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모한과 함께 구멍가게 앞으로 다가가자 후덕하게 생긴 아줌마가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구멍가게 안에는 과자 몇 봉다리가 벽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아줌마가 펑퍼짐하게 앉아 있는 뒷면에 가스통과 가스렌지가 보인다. 아줌마와 네팔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모한이 내게 말했다.

"마이 씨스터."
"당신의 누이라고요?"
"예. 나의 누이입니다."
"정말요? 당신 어머니의 딸?"
"아니요. 이웃집 누이입니다."

동네 누이가 가스렌지에 불을 지펴 짜이를 끓여 내왔다. 누이는 낯선 외국인을 빤히 쳐다보며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웃음꼬리를 놓지 않는다. 그녀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었다. 모한이 내게 슬그머니 영어로 말했다.

"송! 당신과 내가 친구라고 했더니 믿기지 않는답니다." 
"왜요?"
"당신의 흰 수염 때문예요."
"나도 수염을 깎으면 10년은 젊어 보일 겁니다."

모한으로부터 내 말을 네팔어로 전해들은 그녀가 크게 웃는다. 그렇게 우리는 짜이 한 잔에 기분 좋은 웃음을 나눴다. 구멍가게를 나오면서 내가 짜이 값을 치르려 하자 돈을 받지 않는다. 내가 난감한 몸짓으로 모한을 쳐다보자 모한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내 손님은 누이의 손님이랍니다."
모한의 오렌지 농장. 오렌지 나무 사이사이에 옥수수를 심어 놓았다. ⓒ 송성영
모한의 농장에는 150여 주 정도의 오렌지가 심어져 있다고 하는데 오렌지 나무 사이사이에 옥수수를 심어놓았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오렌지 농장 아래로 너른 논밭이 펼쳐져 있다. 그는 자신의 논과 밭으로 나를 안내한다. 가뭄 탓에 농토는 메말라 있다. 어디가 논이고 밭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뒤섞여 있다. 모한의 농토는 400여 평쯤 돼보였다. 선친으로부터 형제들이 골고루 물려받은 땅의 일부라고 한다. 그의 농토 일부에는 감자가 심어져 있었다.

"감자를 수확하고 나면 벼를 심을 것입니다."
"땅은 무엇으로 일굽니까?"
"사촌에게 작은 트랙터(관리기)를 빌릴 것입니다."
"벼농사를 하려면 물이 반드시 필요한데 물은 어디서 끌어 옵니까?"
"몬순을 기다립니다. 조만간 비가 올 것입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벼농사를 지으려면 상시적으로 물을 관리해 줘야 한다. 물이 그다지 필요치 않는 밭벼를 심는 것일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서로 영어가 짧아 더 이상 자세한 농법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농토 저만치에서 몇몇 사내들이 땅을 일구고 있었다. 그가 사내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사내들 역시 잠시 일손을 놓고 화답을 한다.

"저 사람들 중에는 내 친구와 동생이 있습니다."
"당신의 친동생입니까?"
"아니요. 이웃 동생들입니다."
손 쟁기질하는 동네 사람들 ⓒ 송성영
힘겨운 쟁기질을 하며 웃고 있는 사내. 고단한 삶 속에서도 그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 송성영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소를 이용한 쟁기질이 아니었다. 쟁기처럼 생긴 농기구를 이용해 괭이질하듯이 푸석푸석 먼지가 오르는 메마른 논을 일일이 파헤치고 있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농기구는 소가 끄는 쟁기처럼 생겼지만 그보다는 훨씬 작은 1인용 농기구였다. 10여 년 농사일을 해온 나였지만 처음 보는 농기구였다.

"이 너른 논을 저걸로 어떻게 다 일굽니까?"
"너른 논은 농기계를 이용합니다."

농기계 빌리는 값이 만만치 않아 농토가 넓지 않은 사람들은 이웃 사람들끼리 서로 품앗이로 일한다는 것이다. 네 사람이 나흘에 걸쳐 돌아가면서 서로의 땅을 갈아준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내다 팔 곡식은 염두도 못 내고 자급자족할 정도의 농토를 일구고 있다고 한다.

하여 농한기에는 카트만두 등의 대도시로 나가 일당벌이 노동일을 한다는 것이다. 몇몇 선진국을 제외한 세계 어느 나라든 농민들의 고단한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에 의지할수록 농산물 값에 비해 공산품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

"하루 일당이 얼마나 됩니까?"
"하루 오백 루피의 정도 받습니다. 하지만 오백 루피로 세끼 밥 사먹고 나면 3백 루피 정도 버는 것이지요. 그 일도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대도시로 나갈 수밖에 없다. 소농으로 농사를 지으면 굶어죽지는 않겠지만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치려면 농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한국이 그렇듯이 모한네 동네 사람들 역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모한의 고향 송콕은 아홉 개 마을에 천 명 가까운 농민들이 살고 있는데 매년 아이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도시로 빠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진 몇 장을 찍고 힘겹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수고하시라는 인사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고단한 농사를 짓고 있음에도 그들은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받았다.
낫이나 호미 같은 작은 농기구를 만들고 있는 동네 대장간. ⓒ 송성영
작은 화덕에 불을 지펴 풀무질을 해가며 농기구를 만들거나 수리를 하는데 언제 저 쇠가 녹을까 싶다. ⓒ 송성영
농토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대장간을 만났다. 대장간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모한이 '마이 엉클'이라 부르는 늙은 대장쟁이는 자전거 바퀴를 이용해 작은 화덕에 불을 지펴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저 시원찮은 불꽃으로 어느 세월에 쇠를 녹일 수 있을까 싶다.

"나 어렸을 때는 여기서 우리 아저씨가 동네 농기구를 다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여기서 농기구를 만드나요?"
"낫이나 호미 같은 간단한 농기구를 만듭니다. 대부분의 농기구는 철물점에서 사서 씁니다."

불의 깊이를 조절해 가며 풀무질 하는 그의 쭈글쭈글한 손등에 힘줄이 선명하게 불거져 나온다. 평생 대장간 일을 해왔다는 늙은 대장장이에게 풀무질을 위한 자전거 바퀴는 세월의 바퀴였다. 그는 내가 사진을 찍거나 말거나 묵묵히 세월의 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가든 말든 늙은 대장장이는 화덕에 바람을 불어넣어 쇠를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농부가 흙을 다루듯이 그는 쇠를 다루고 있었다. 쇠는 땅에서 나온 것이다. 그 쇠는 대장장이의 손끝에서 농기구가 되어 땅을 일구게 될 것이다. 땅과 하나가 될 것이었다.

늙은 대장장이 또한 저 들녘에서 쟁기질을 하는 젊은 농부들처럼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의 은근한 미소는 젊은 농부들의 웃음과 또 다른 깊이가 있었다. 쇠의 성질에 따라 불을 조절해가며 평생 불을 다뤄왔을 그의 미소는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그는 사치스러운 금을 다루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삶의 근간을 이루는 농기구를 다루는 연금술사였다.
키질 하는 아들 모한 옆에서 참견하는 구순 노모 ⓒ 송성영
우리는 대장간에서 곧장 농막으로 돌아왔다. 모한이 창고에서 옥수수자루를 꺼내왔다. 오늘 내일 중에 방앗간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앗간에서 말린 옥수수를 빻기 전에 잡티를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그는 마당 저만치 나무 그늘 밑에서 키질을 하고 나는 적당히 할 일이 없어 농막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마늘을 깠다.

모한의 일하는 폼이 단순 노동에서 즐거움을 찾곤 하는 나와 닮아있다. 남정네가 아낙네들처럼 쪼그려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잡티를 골라내는 폼이 딱 그렇다. 얼마나 지났을까. 졸음이 몰려 온다. 마늘을 까는 손과 머리가 따로 놀고 있다. 네팔까지 와서 한가롭게 퍼질러 앉아 꾸벅꾸벅 졸아가며 마늘을 까고 있는 내 모습이 가물가물 보인다. 인도 사람들이 네팔 사람으로 착각하곤 했던 내 모습이 그렇듯이 네팔 사람이 다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 졸고 있는데 옆집에 사시는 모한의 구순 노모가 지팡이를 짚고 다가왔다. '저 졸지 않았어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나마스테' 합장을 했더니 빙그레 웃으며 '나마스테' 인사를 받는다.

구순 노모는 아들, 모한 앞으로 다가가 뭔가를 참견한다. 모한이 키질하던 손을 놓고 웃으며 네팔어로 뭐라 대꾸한다. 그리고 다시 키질을 한다. 노모는 아들의 키질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다시 뭐라 참견한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되는 참견 속에 모한의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급기야 버럭 화를 낸다. 티격태격하는 구순 노모와 오십대 중반의 아들 사이가 보기 좋아 웃음이 나온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엄니는 끊임없이 참견하며 아들을 걱정하고 아들은 그 어머니의 반복되는 지청구를 듣기 싫어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걱정거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엄니에게 화를 내곤 했다. 갑자기 한국에 있는 엄니가 보고 싶어진다.
길거리에서 만난 동네 아이들. 사진기를 들이대자 얼음땡 눌이를 하듯 차렷 자세로 표정이 굳어진다. 순박한 '촌놈'들이다. ⓒ 송성영
늦은 점심을 간단히 챙겨먹고 나서 네팔 정글에서 나온다는 찻잎, '데스밧'을 끓여 마시고 모한과 함께 오후 산책을 나섰다. 카브래 송콕 마을은 드문드문 몇 가구씩 모여 살고 있다, 언덕 위로 오르자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제법 큰 마을이 나온다.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버스가 들어온 지 10년 쯤 됐다고 한다. 모한이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 호랑이가 내려왔다고 한다.
신작로 양옆으로 오래된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마을 곳곳에 모한네 본가처럼 이층 가옥들이 보인다. 대부분 흙벽돌로 쌓아 올린 목조건물이다. 목조건물에는 연꽃 문양 등을 새긴 한국의 사찰 건물들처럼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길거리에서 세 명의 어린아이들이 걸어오고 있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바싹 긴장한 폼으로 제 자리에 우뚝 선다. 마치 얼음땡 놀이를 하듯 표정이 잔뜩 굳어진다. 내가 활짝 웃으며 '이쁜 얼굴로 웃어봐라' 했더니 가운데 서 있던 빨간 티의 여자애가 활짝 웃어준다.

이곳 어린 아이들은 대여섯 살 무렵 우리 집 두 촌놈을 닮아 있다. 두세 살부터 시골살이를 했던 녀석들은 낯선 손님이 찾아오면 담벼락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어 신기한 눈동자를 굴리곤 했었다. 이제 다 컸지만 내겐 여전히 순박한 촌놈들이다. 녀석들이 보고 싶다. 그렇게 나는 오래된 마을로 들어설수록 과거로 들어서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밀을 걸러내기 위해 키질 하는 아낙네 ⓒ 송성영
쌈닭처럼 생긴 녀석. 모한 말로는 네팔의 토종닭이라고 한다. ⓒ 송성영
밀 자루가 아무렇게 널려 있는 어느 집 앞에서 아낙네가 밀을 걸러 내기 위해 키질을 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염소들을 마치 개 산책 시키듯 목줄에 묶어 끌고 다니며 풀을 뜯기고 있다. 어느집 주변에서는 암탉이 쫑쫑거리는 병아리 몇 마리를 몰고 다닌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낯선 닭도 보인다. 가만 보니 날씬한 몸매에 깃털 없이 목이 긴 것이 쌈닭처럼 생겼다. 쌈닭처럼 날개를 파드닥 거리며 앞발을 세워 서로 다툰다. 모한에게 물었다.

"저 닭 혹시 싸움하는 닭 아닙니까?"
"맞습니다. 싸움을 아주 잘 하는 놈들입니다."
"이 마을에 저런 닭들이 많습니까?"
"예. 여기 토종닭입니다."

태국 등지에서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싸움을 벌이는 그 쌈닭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한은 내 짐작에 동의한다. 닭을 쫒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저만치서 열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애가 어린 염소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뿔도 없는 놈이 어린 여자애에게 머리를 앞세워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시늉을 한다. 그러다가 여자애한데 회초리로 된통 당한다. 여자애는 마치 말 안 듣는 장난꾸러기 어린 동생 다루듯이 한다.

좀 더 마을 깊숙이 들어서자 도로 양옆으로 들어서 있는 상점들이 다가온다. 상가라고 해봤자 두 군데의 작은 구멍가게에 허름한 식당 몇 군데가 전부다. 식당 겸 구멍가게도 보인다. 일손을 놓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보인다. 모한 말로는 술 마시는 상점들은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생긴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내 어릴 시절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농토에서 손을 놓고 술을 마셨다. 작은 구멍가게를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 앉혀 함께 술을 마셨다. 심지어는 다리 밑에 사는 거지들까지 불러들여 형 동생 해가며 술을 마셨다. 농기구 대신 술병을 잡았던 것이다.
모한의 고향 사람들. 이들은 모한의 형이며 아저씨 누님이다. ⓒ 송성영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앉아 있다가 낮술을 마신 모한의 친구와 사촌 동생을 만났다. ⓒ 송성영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외국인을 보기 힘든 시골 마을 사람들이다. 나의 '나마스테' 인사에 모두들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받는다. 그들은 모두가 모한의 '엉클'이며 형, 동생, 누님들이었다. 지금은 수몰지역처럼 도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나의 고향마을, 어린 시절의 동네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그랬다. 동네 사람 모두가 나의 형 동생이고 아저씨 아줌마였다. 내 어린 시절에도 그랬듯이 목줄 없이 길거리에서 어슬렁거리는 이곳 개들도 착하다. 사람에게 위협적으로 짖어대거나 송곳니를 내 보이는 개는 찾아 볼 수 없다. 언제 봤다고 내게 가까이 다가와 몸을 비벼대는 놈도 있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양을 이끌고 산책 나온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작은 상점의 처마 밑 신세를 졌다. 반대편 처마 밑에 앉아 있던 여자애 둘이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며 놀이를 하고 있다.

마음씨 좋게 생긴 꺼먼 피부의 모한 친구가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처마 밑으로 다가오면서 내게 인사를 건넨다. 처마 밑에는 의자 몇 개 놓여 있었는데 잠시 후 모한의 사촌동생도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모한이 친구가 술 한 잔 하잖다며 내게 의향을 묻는다. 모한의 사촌동생은 이미 낮술에 취해 혀 고부라지는 소리를 내고 있다.
주막에서 모한의 친구와 사촌동생과 함께 술을 마셨다. ⓒ 송성영
네팔의 전통주 '창'과 물소 고기 장조림 안주 ⓒ 송성영
우리는 서너 명이 들어서면 꽉 차는 선술집이나 다름없는 주막집으로 들어섰다. 모한은 주막집 주모에서 스스럼없이 '씨스터'라고 부른다. 주모가 대두병에 담겨진 연한 우유 빛 술을 내온다. 모한 친구가 내게 소주잔이 아닌 맥주 컵에 따라 준다. 동동주나 정종 맛이 나는 이 술의 이름은 네팔 전통술 '창'이라고 한다. 독주가 아니라서 그런지 첫 잔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마실 만하다.

안주로 나온 물소 고기 장조림은 고무 씹는 느낌이다. 모한 말대로 계속해서 우물우물 씹다보니 고소한 맛이 난다. 이미 낮술에 취해 있는 모한의 사촌동생은 네팔어로 모한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얘기하고 있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는 모한은 한 모금 하고나서 술잔을 내려놓는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네팔 사람들은 술을 즐깁니다. 한국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들도 술을 즐겨 마십니다."
"당신도 좋아 합니까?"
"종종 마십니다."

나는 모한의 친구와 술잔을 부딪쳐 가며 맥주 들이키듯 연거푸 두 잔을 가볍게 비웠다. 세 잔째 마실 무렵 알딸딸하니 취기가 오른다. 앉은뱅이 술처럼 서서히 취기가 오른다.

모한의 친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나를 보면서 빙글빙글 웃는다. 네 잔을 비우고 나서 그만 마시겠다고 선언했는데 모한의 사촌 동생이 계속해서 술을 권한다. 술 권하는 사회, 한국 사람들과 너무 닮았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며 술잔을 손으로 막았다.

사촌동생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모한에게 네팔어로 뭐라 뭐라 말한다. 내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을 자신을 상대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 들였나 보다. 집요하게 술 권하는 고향 친구들을 만난 것 같다.

"모한, 당신의 사촌동생이 내게 불만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술 취하면 저럽니다."
"한국의 친구들도 저럽니다. 고향 친구를 만난 것 같아 좋습니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술값을 계산하고 나오는데 모한의 친구가 따라 나서며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두병을 손에 쥐어 준다. 한 병을 다 비우고 두 병째, 반쯤 남았다. 여전히 주막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한의 사촌 동생이 잘 가라고 손짓을 한다. 모한 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자 다리에 힘이 풀린다. 술기운이 제대로 오르고 있다. 농막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기만 한데 기분이 좋다. 모한이 내게 묻는다.

"괜찮습니까?"
"그럼요. 고향에 온 기분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술 마시던 고향에 온 것 같습니다."
"예? 지금 한국말로 하신 겁니까?"
"아, 예 한국말이었습니다. 모한, 당신의 고향마을이 사라져 버린 내 고향 같다고요."

술기운 탓일까.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었지만 형 동생 누나 아저씨로 살아가면서 서로 나눌 줄 아는 사람들, 수 틀리면 안면몰수할 것처럼 티격태격 싸우다가도 힘겨운 일이 닥치면 품앗이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았던 사람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곳, 그 손길 따뜻한 사람들이 살았던 고향마을로 돌아가고 싶었다.
태그:#네팔 송콕 마을 , #대장장이, #품앗이, #네팔 전통술 창, #고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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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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