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랜드 파더> 포스터.

영화 <그랜드 파더> 포스터. ⓒ ㈜한이야기 외


* 이 글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담겨있습니다.

영화 <그랜드 파더>는 입소문처럼 '한국판 <테이큰>'은 아니었다. 주연 배우 박근형씨가 두 영화의 성격이 다르다고 다수의 언론을 통해 밝혀왔듯, 리암 니슨식 액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평소 박한 평론으로 유명한 <씨네21> 박평식 평론가도 10점 만점에 4점을 주며 "연출이 겉늙고 게으르면"이라는 평을 남겼다. 박 평론가는 <테이큰> 개봉 당시에는 <그랜드 파더>보다 후한 6점에 "아버지 주먹은 단순명쾌 했네"라는 평을 남긴 바 있다.

또한 박 평론가가 <그랜드 파더>의 한 줄 평을 마치 쓰다만 듯 미 종결형으로 남긴 것에 주목하자. 박근형씨가 만 76세 고령이란 점도 잊지 말자. 장르적으로도 <테이큰> 시리즈는 '액션'이고, <그랜드 파더>는 '드라마'다. 보통 연출에 더 많은 공이 드는 건 드라마보다 액션이다. 연출에 행여나 기대를 걸면 그 기대는 채워지기 힘들다. 티켓 값은 다른 데서 뽑아야 한다.

두 영화는 액션이나 연출로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내가 주목한 두 영화의 결정적 차이는 가부장 중심의 가족주의를 건드리는 방식이다. 우선 <테이큰> 은 '전직 CIA 특수요원 출신' 아버지가 납치된 처자식을 구하고 마피아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다소 탈현실적인 설정은  이입보단 초인적인 힘, 절륜, 거침없음을 고루 갖춘 남성상에 대한 '판타지'를 이끌어낸다.

그렇다고 이입에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는 건 아니다. 미국인 가장의 등장은 오히려 강한 부성애에 세계적 보편성을 덧칠할 명분이 될 수도 있다. 이로서 <테이큰>은 영화가 어떻게 가부장 질서의 건재함을 재확인하고 순간의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오락영화로 부역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이 딱 <테이큰>의 한계다. 그럼 <그랜드 파더>는 어떨까.

이미 하한가 친 가부장제

<그랜드 파더>의 주인공은 베트남 참전군인 출신 박기광(박근형)이다. <테이큰>보다 현실적인 설정이다. 또한 복수를 하기는 하지만 이 복수는 상실한 가치를 되찾고 가족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초인적인 복수가 아니다. 기광의 직업은 고물 버스 운전기사다. 고엽제 후유증을 약 대신 술로 달래고 고작 한 달에 8만원의 보상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아들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랜드 파더>는 이처럼 <테이큰>과 달리 '이미 망했다'는 불가역적 현실에서 출발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어렸을 때 딱 한 번 본 손녀 보람(고보결)까지 기광을 증오한다. 할아버지가 술에 젖어 폭력을 휘둘러 가정 파탄을 냈었고 아빠에게 정신적 외상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가부장주의는 하한가를 친 상황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영화 <그랜드 파더>의 한 장면.

영화 <그랜드 파더>의 한 장면. ⓒ 한이야기


한국 남성들의 판타지가 비집고 들어갈 흥정의 틈이 없어 보인다. 재밌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부장들의 자존심 회복 및 반등의 틈을 주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부장들의 판타지를 극대화하는 욕심까지 부리지는 않고 어느 정도 주가 회복이 이루어질 쯤 지분을 전량 매도하듯 깔끔하게 손 털고 퇴장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 때문에 이 영화는 단순히 가부장주의에 부역하는 영화로 단정 짓기에 애매하다.

우선 기광은 아들이 죽기 전 무언가 짚이는 게 없었는지 궁금해 하지만, 아들의 학교선배였다는 김양돈(정재영) 일당은 거짓말을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해서 자신들이 짓는 건물에서 일하도록 기회를 줬지만 술을 마시고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경찰도 단순 자살로 사건을 대충 종결한다. 하지만 손녀에게 "아빠는 술을 안 마셨다"는 말을 듣고, 아들의 시신에 멍이 들었다는 걸 사실도 알게 된 후 심리가 복잡해지는데, 이를 묘사하는 노배우의 연기도 볼만한다.

오랜 세월 함께한 고물 버스를 폐차 시키며 "쉬면 쟤처럼 죽는 거지"라는 말을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다던가, 고엽제 후유증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들과 손녀를 떠올리며 무언가 결심을 하는 듯 보인다든가 등등. 끈질긴 부성애를 잘 표현해냈다. 결국 기광은 죽은 아들 지갑에서 나온 성매매 전단지에 적힌 '유리'라는 여성에게 아들의 행적을 조사하려고 한다.

혹은 일종의 타협안?

이 과정에서 유리가 아들의 빚을 갚으려던 손녀 보람이었고 양돈 일당이 포주였다는 사실을 알아 챈 기광은 크게 분노한다. 한편 보람은 아빠가 죽은 이유가 자신의 성매매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인 줄 알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자 기광은 "네 잘못이 아냐. 네 아빠는 자살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꼭 밝혀낼 거다"라는 말을 남긴다. 한편 배운 대로 할 뿐이라며 재수사를 거부하는 경찰에게는 자신도 "배운 대로" 하겠다는 말을, 보수단체 회원인 옛 동료에게는 "진짜 나쁜 놈들은 그 녀석들(젊은이들)이 아니야"라는 충고를 남긴다.

그렇다면 기광이 배운 것은 무엇이고 진짜 나쁜 놈들은 누굴까. 기광은 자신에게 "사람 죽여 봤냐"고 물었던 양돈 일당 중 한 명을 고문하며 월남전 때 겪었던 트라우마를 꺼낸다. 수상해 보이는 집에 수류탄을 던졌는데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있었다면서 그때 받은 훈장을 던지고는 "너희는 날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말한다. 자칫 선악구도가 흔들릴 수 있는 장면을 감수하면서까지 영화가 전하는 기광과 양돈의 차이는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기광과의 마지막 혈투에서 양돈은 "다 먹고 살자고 했던 일"이라며 모든 걸 정당화한다. 기광의 손녀도 자기 발로 찾아왔고, 자기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포주가 됐을 것이며 죽은 기광 아들도 이를 빌미로 돈을 뜯어내려 해 몇 대 쳤더니 비틀거리다 떨어져 죽었을 뿐이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살아남고자 포주가 된 자신과 사람을 죽인 기광 중 누가 더 나쁘냐고 묻는다. 반면 기광은 '다 똑같다'는 식의 논리로 애써 변명하려 들지 않는다.

ⓒ 한이야기


그저 양돈에게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할 뿐이다. 악이 평범화되는 세상이 이미 아들을 죽였고 손녀를 성매매로 내몰았다. 그리고는 양돈을 죽인다. 이어서 자신도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데, 마지막 순간 기광이 꺼내려던 건 수류탄이 아닌 녹음기였다. <그랜드 파더> 전체는 바로 이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손녀가 보험금을 받을 수 있도록 아들의 타살을 입증하는 과정을 담은 녹음기를 들고 다닌 것이다.

수류탄이 녹음기를 대체하는 이 장면은 전쟁 같은 삶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끈질기게 놓치지 않은 부성애를 상징한다. 가족은 공동체 성립의 기본 단위고 가족 구성원끼리의 사랑은 역시 이타성의 기본 형태다. 영화는 이러한 할아버지의 희생으로 새 출발을 하는 손녀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부장들을 대변하는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한다.

여전히 수지가 안 맞는 흥정

<그랜드 파더>는 <국제시장>과 <인천상륙작전>처럼 '그때 그 시절'을 애써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전쟁터를 넘어 일상까지 확산된 악의 평범성에 순응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가정파탄의 책임을 명시적으로 반성하지도 않는다. 책임을 개인이 다 뒤집어쓰기에는 억울하기 때문이다. 전쟁터는 인간의 생존 불안과 불신을 자극하는 환경이다. 그런 환경에 기광을 몰아넣고 자아를 망가뜨린 국가는 책임이 없을까.

심지어 아들이 죽은 지금도 국가는 무책임하다. 국가조차 반성하지 않을 때 기광이 평생 동안 배운 '익숙한' 가치 지불 방식은 반성보다는 희생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들의 희생의 경제 질서 한편에는 기광의 옛 동료처럼 과거 희생의 공을 애써 미화하며 젊은이들과 싸우는 보수단체 회원의 서사가, 다른 한편에는 기광으로 상징되는 가족주의적 희생의 서사가 있다.

전자는 정신승리와 욕먹은 만큼 연장되는 수명밖에 남지 않지만 후자는 가부장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의 주가 회복을 이룬 뒤 손녀에게 지분을 전량 매도하고 장렬히 퇴장이라도 할 수 있다. 희생이라는 화폐 지불의 대가는 손녀와 할아버지의 짧은 추억을 회상하게끔 하는 마당의 화분이 등장하는 결말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수지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태생적으로 가부장적이고 가족주의적인 영화들의 약점은 상상력도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일단 여성의 역할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등장하는 혈육인 손녀는 할아버지를 원망하다가 성매매 사실이 밝혀져 자살 시도를 하더니 할아버지의 희생으로 죽은 아버지의 보험금을 타 새 출발을 하는 게 전부다. 이런 결말은 어찌보면 기괴하다.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면 정말 그런 손녀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세대교체 이슈를 노린 것이라 바통을 이어받을 손녀를 '민폐 캐릭터'로 만들기보다 나름의 역할을 부여하는 게 좋았겠지만, 그런 시도가 전혀 없다. 이는 영화의 정체성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정말 가족 구성원들의 소통을 도모하려는 것인지, 단지 이 땅의 가부장들의 자존심 회복과 대리만족에 부역하는데 만족하는 것인지 애매하다. 또한 가족주의 자체가 내장한 한계도 있다.

<그랜드 파더>가 반영하는 현실은 공동체의 핵심적 기능에 대한 기대가 이미 붕괴한 사회다. 기광은 경찰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자신이 배운 대로 문제를 해결한다. 끝내 국가를 향한 인정투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희생의 수준에서 끝난다. 공공의 영역에서의 '반성'이 오가야할 일까지 친밀성의 영역에서의 '희생'의 지불로 대체한 할아버지가 떠난 자리에는 결국 책임지지 않는 국가라는 불행의 씨앗이 남겨졌다.

부조리한 국가를 낳은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국가를 단죄해 자신도 함께 단죄하기에는 나름 억울한 맥락도 있고 실익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단죄하되 억울한 맥락은 대화로 풀어나갈 가능성을 상상해내는 일은 불가능한 걸까. 정말 <그랜드 파더>가 최선의 타협안인가.

ⓒ 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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