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란 '주인공이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 노력한 끝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들에서는 주인공의 목표가 그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스로가 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요.

우디 앨런의 영화도 그렇습니다. 그를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애니 홀>(1977)과 <맨하탄>(1979) 이후의 거의 모든 영화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 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애정 문제가 해결되면 삶이 달라질 거라고 믿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중년의 위기에 부딪치거나 직업적 성공을 꿈꾸고 범죄에 연루되는 주인공이 등장할 때도 있지요.

삶의 의욕 잃은 남자

 영화 <이레셔널 맨>의 한 장면. 철학과 교수 에이브(호아퀸 피닉스)는 자신의 제자 질(엠마 스톤)의 구애를 받지만, 관계를 진전시키기 주저한다. 더이상 애정 놀음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이레셔널 맨>의 한 장면. 철학과 교수 에이브(호아퀸 피닉스)는 자신의 제자 질(엠마 스톤)의 구애를 받지만, 관계를 진전시키기 주저한다. 더이상 애정 놀음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 (주)프레인글로벌


이 영화 <이레셔널 맨>의 주인공 에이브(호아퀸 피닉스)는 새로 부임한 로드 아일랜드의 대학에서 깊은 절망을 느낍니다. 삶에 대한 의욕 자체가 없고, 특히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성욕마저도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죠. 그를 좋아하는 예쁜 제자 질(엠마 스톤)의 대시도 마다하고, 유부녀 리타(파커 포시)와의 정사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그에게도 변화의 기회는 찾아오는데, 그것은 바로 우연히 떠오른 살인 계획입니다.

살인이 전면에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분위기는 우디 앨런의 전작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범죄와 비행>(1989)이나 <매치 포인트>(2005) 같은 작품보다는 <맨하탄 미스터리>(1993)나 <스쿠프>(2006)와 비슷한 가벼운 톤인데, 살인을 계획하는 심리와 살인이 가져온 변화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죠.

이 영화의 블랙 유머는 장면의 진지함과 어울리지 않는 실소를 계속 터뜨리게 만들 정도로 괜찮은 편입니다. 살인은 음울한 소재이지만, 행위 자체가 감정이입을 방해하기 때문에 블랙 코미디로 다루기에 좋은 소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후반부의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정극으로 바뀐다는 데 있습니다. 에이브의 매력에 정신 못차리던 질이 현실을 똑바로 보기 시작하면서 극은 평범한 미스터리 드라마로 마무리되고 맙니다.

호아킨 피닉스는 주인공 에이브의 의욕 없는 루저 같은 모습을 현실적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원래 강렬한 캐릭터 연기가 장점인 그는, 이 영화에서 힘을 많이 빼고 일상의 감정과 느낌을 드러내려 노력합니다. 기존의 이미지에 익숙한 관객들이 이 영화의 그를 보고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이런 의도된 위화감은 극 중에서 블랙 코미디의 동력으로 활용됩니다.

살인이 그의 삶에 미친 영향

 영화 <이레셔널 맨>의 한 장면. 살인 직후 질(엠마 스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에이브(호아퀸 피닉스)는 극 중 처음으로 말쑥하고 번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살인이 가져다 준 삶의 활기가 잘 표현된 장면.

영화 <이레셔널 맨>의 한 장면. 살인 직후 질(엠마 스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에이브(호아퀸 피닉스)는 극 중 처음으로 말쑥하고 번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살인이 가져다 준 삶의 활기가 잘 표현된 장면. ⓒ (주)프레인글로벌


우디 앨런 특유의 로맨틱한 감각이 번뜩이는 <매직 인 더 문라이트>(2014)에서 자신의 매력을 환하게 발산했던 엠마 스톤은, 감독과 연달아 작업한 이번 영화에서는 그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정도의 연기를 보여 줍니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에이브가 중심이 되는 영화이니까요.

인생에서 권태라는 복병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지 모릅니다. 반복된 일상의 리듬에 우리를 내맡기다 보면 정말 숨막히게 지루할 때가 있지요. 또한 시간의 흐름은 우리를 가장 좋았던 시절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로맨스, 성공, 술, 마약, 섹스, 종교 등등 뭔가 새로운 도피처를 찾아 나서게 되지요. 그것이 우리 삶을 달라지게 만들어 줄 거라 믿으면서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잠깐 동안 지루함을 잊게 만들 뿐이죠. 게다가 여러 번 반복되면 또 다른 권태를 불러 일으키거나 심각한 중독에 빠지게 되는 부작용까지 있습니다.

우디 앨런은 여기에 한 가지 유용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에이브가 인생의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살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삶의 주도권을 되찾았기 때문이지요. 흘러가는 시간의 고삐를 틀어쥐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다 보면, 우리도 지루함과 이별하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영화 <이레셔널 맨>의 포스터. 살인으로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특유의 블랙 코미디 터치로 다룬 작품이다. 후반부의 평범한 전개와 결말이 아쉽다.

영화 <이레셔널 맨>의 포스터. 살인으로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특유의 블랙 코미디 터치로 다룬 작품이다. 후반부의 평범한 전개와 결말이 아쉽다. ⓒ (주)프레인글로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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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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