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북> 스틸 화면.

▲ <정글북>의 CG 영화 <정글북>은 분명 잘 만든 영화이고, 흥행도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찬사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불편한 것이 한가지 있다. ⓒ 월트디즈니스튜디오모션픽처스


영화 <정글북>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족 영화'의 장점이 뚜렷하게 드러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정글북>은 <아바타> 이후 최고의 3D 실사 영화라는 호평을 받고 있는데, 영화 속 CG의 현실감은 디즈니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의 목표는 솔직한 감동을 끌어낼 수 있도록, 기술적 한계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관객이 잠재의식 속에서 가짜로 느낄 만한 모든 요소를 없애겠다는 각오로 작업했다. 우주선이나 슈퍼 히어로를 만드는 건 차라리 쉬운 일이다. 상상하면 되니까. 하지만 살아 있는 동물을 CG로 만드는 건, 정말로 기술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존 파브로 감독)

정글을 배경으로 호랑이·늑대·곰·뱀·표범·코끼리 등 70여 종의 동물이 등장하는 <정글북>의 가장 큰 과제는 '리얼리티'였을 것이다. 만약 관객들에게 모글리(닐 세티)와 동물들이 함께 뛰어다니는 정글이 '가짜'라고 인식되거나 동물 캐릭터들이 어색하게 다가왔다면 영화의 몰입도는 와장창 깨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글북>은 정글의 모습을 완벽히 구현해냈고, '모션 캡처'에서부터 동물들의 개성을 살리는 '시각 효과'를 통해 관객들의 '의심'을 지워버렸다.

성취 놀랍지만... 의문이 드는 한 가지

 <정글북>의 스틸 화면

▲ 선악의 이분법 단순화하면 이해하기 쉽다. 누구는 절대악이고, 누구는 절대선이라는 식으로. 하지만 정말 그럴까.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정글북>이 이뤄낸 이와 같은 '성취'에 대해선 계속해서 칭찬해도 끝이 없다. 놀라울 정도로 현실감 있는 CG를 바탕으로 모글리와 정글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 영화는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췄다. 하지만 <정글북>과 그 원작인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정글북>의 '내용'도 그런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피상적으로 보기에 <정글북>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 자신들과 다른 '인간의 아이' 모글리를 맡아 기르는 늑대 락샤(루피타 뇽)의 모성과 가족애, 그리고 모글리를 정글이라고 하는 삶의 터전에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다른 동물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공존'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그 끈끈한 동료애와 정글의 법칙에 대한 존중은 '정글의 무법자'로 군림하는 호랑이 쉬어칸(이드리스 엘바)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히 유지된다.

<정글북>에서 '선(善)'과 '악(惡)'은 명확히 구분된다. 쉬어칸은 악이고, 그를 제외한 모든 동물은 선이다. 평화롭던 정글에 긴장 상태를 일으키고, 동물들과 어울려 잘(?) 지내고 있던 모글리를 죽이려고 하는 쉬어칸은 분명 '나쁜'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정당한 것일까? 쉬어칸(을 비롯한 정글의 동물들)은 '붉은 꽃(불)'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붉은 꽃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어른' 인간은 가장 위험한 존재다.

'불'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문명'을 나타내지만, 한편으로는 '파괴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불로부터 가장 취약한 환경에 사는 동물들은 자신들의 정글을 한순간에 태워버릴 수 있는 불을 두려워한다. 또,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무기이자 섬뜩한 공포다. 쉬어칸이 자신의 눈을 잃게 된 것도 불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인간을 정글로 들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렇게 따진다면 '무법'을 행한 것은 쉬어칸이 아니라 '늑대'들이고, 이에 동조한 정글의 동물들이 아닌가? 오히려 쉬어칸은 정글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글리는 아직 인간의 '아이'에 불과하지만, '도구'를 사용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유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될 테고, 이는 정글 전체에 '위협'이 될 소지가 있다. 쉬어칸이 모글리를 제거하려는 건 단순히 '복수심' 때문이라고 보긴 어렵다.

이쯤에서 소설 <정글북>의 저자 러디어드 키플링을 대입시켜 보자. 참신성과 독창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력과 휴머니즘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1907년)이기도 하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의 이면에는 '19세기 말부터 세계대전 이전까지 영국 제국주의 전성기 시절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비판이 뒤따른다.

<정글북>에 대한 다른 방향의 해석

 <정글북> 스틸 화면

▲ 모글리의 정체성 모글리는 인간이다. 그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자라서 어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정글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인도의 뭄바이(봄베이)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의 제국주의와 식민 통치, 서구 열강에 의한 원주민의 문명화, 남성 우월주의 등을 옹호했다. 과연 '작가의 삶'과 '그의 문학'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일제 강점기에 '친일 문학'으로 활약했던 작가들의 문학적 성취는 그의 '친일적 행위'와 별개로 칭송받아야 마땅한가?

서구 열강에 대한 원주민의 문명화를 옹호했다는 대목은 <정글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동물들이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터전인 정글을 '인도'와 병치(倂置)시킨다면 어떨까? 모글리는 '서양의 문물'을 이식하는 존재가 되고, 그를 받아들인 늑대들은 적극적인 수용자, 즉 개화파쯤 될 것이다. 그렇다면 쉬어칸은 어떨까? 서구 열강의 '폭력적인' 문명화에 반대하는 (꼬장꼬장한) 민족의 수호자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정글북>을 비롯해서 영화 <정글북>은 '쉬어칸'을 '악'으로 표현했다.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키플링에게 '문을 걸어 잠그는' 쉬어칸은 '악'과 동의어였을 것이다. 반면, 모글리는 정글에 '문명'을 전달하는 존재이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정당성'까지 갖춘 '선의 대변자'로 그려진다. 그를 지켜주는 늑대들과 곰 '발루(빌 머레이)', 표범 '바기라(벤 킹슬리)'의 우정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해서 쉬어칸이 '선'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절단해서 바라볼 수 없는 문제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쉬어칸의 방어적 태도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음에도 너무 쉽고 간단히 악으로 묘사된다. 그의 입장에서는 '정글을 지킨다'는 당위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몸으로 체감했던 공포가 그의 행동들을 이해하게 한다.

<정글북>이라는 텍스트에서 출발한 영화 <정글북>은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모글리'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자연(동물)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감동적으로' <정글북>을 이해하는 것도 하나의 해석이 될 테지만, 그 밖에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훨씬 더 풍성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영화 <정글북>의 포스터.

▲ 영화 <정글북>의 포스터 <정글북>을 감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굳이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전혀 다른 방식의 해석도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해관계는 달라진다. 우리는 대개 모글리에게 감정이입하지만, 쉬어칸에게는 쉬어칸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정글북 러디어드 키플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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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길을 가라.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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